이 글에서는 『가람일기』에 나타난 필사 기록을 바탕으로 20세기 전반기의 필사와 필사자들의 존재양상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20세기 초 고전 간행이라는 시대적 조류 속에서 고서 필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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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아 (고려대학교)
2018
Korean
이병기 ; 가람일기 ; 필사자 ; 필사본 ; 서지학 ; Yi byeong-ki ; Karam Ilki ; transcriber ; transcript ; bibliography
911
KCI등재
학술저널
55-8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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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가람일기』에 나타난 필사 기록을 바탕으로 20세기 전반기의 필사와 필사자들의 존재양상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20세기 초 고전 간행이라는 시대적 조류 속에서 고서 필사가...
이 글에서는 『가람일기』에 나타난 필사 기록을 바탕으로 20세기 전반기의 필사와 필사자들의 존재양상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20세기 초 고전 간행이라는 시대적 조류 속에서 고서 필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정황과, 6·25이후 이러한 흐름이 주춤하다가 점차 쇠퇴하는 경향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가람이 필사에 관여한 총 36년의 세월 중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3년 동안에 전체 필사 서적의 절반과, 중요 문헌들의 상당수가 필사되었음은 눈여겨 볼만한 지점이다. 이처럼 필사의 성행과 쇠퇴가 진행되는 가운데, 필사자들의 존재양상 또한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이 당시의 필사자들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여 헤아릴 수 없으므로 일단은 추정에 머무를 수밖에 없지만, 단순히 필사를 하는 행위자들 수의 가감과 무관하게, 고문헌을 의식하고 감별할 수 있는 적합한 전문 필사자들의 존재는 확연히 줄었던 것으로 예측된다. 서지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가람은 필사자 선별에도 까다로운 기준이 있었다. 그가 왕성히 필사본을 만들었던 시기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여러 필사자들의 도움이 있었던 때이다. 1940년 이후 이렇다 할 필사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은 단순히 가람이 필사본 수집에 열정이 줄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필사를 부탁하는 일이 녹록치 않았으며, 노년의 가람이 직접 베끼는 데에도 한계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필사자들이 줄어들자, 자연스럽게 필사본을 만드는 일도 드물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필사가 성행하였던 시기에 필사자들은, 뚜렷하지는 않으나 몇몇 유형을 가지고 있었다. 공통된 것은 가람이 필사를 맡기는 인물은 모두 예사로운 寫字生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필사 부탁이 몇 인물로 집중되는 것은 고서에 대한 가람의 생각과 신념을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필사본으로 남겨진 각종 문헌에는 필사자들의 역량 뿐 아니라, 이를 원전에 가깝게 만들고자 한 가람의 깊은 고민의 흔적이 담겨 있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article tries to figure out how transcripts of the classic literatures created and how transcribers worked in early 20th century in Korea by analyzing Karam Ilgi where Yi byeong-ki depicted his transcription careers. It has been found that in the...
This article tries to figure out how transcripts of the classic literatures created and how transcribers worked in early 20th century in Korea by analyzing Karam Ilgi where Yi byeong-ki depicted his transcription careers. It has been found that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 era of classical publishing, transcription works were vigorously created in Korea. After the Korean War, however, this tendency of transcription boom slowed down and eventually declined significantly. In the meantime, it is notable that half of the book transcription works and most of the essential record transcriptions in the era had been made only in three years of time period, which accounts for less than one tenth of Yi byeong-ki’s whole transcription career of 36 years. During the boom and declination of transcribing classic works, subtle changes can be found among transcribers. This observation is based on speculation and hard to confirm since there is no evidence on how many transcribers were active during the period. Regardless of the exact changes in numbers of active transcribers, however, it can be easily presumed that the number of professional transcribers who can properly recognize and discern classics diminished considerably as time went by. Karam, who had an intimate knowledge of bibliography, had set up the highest standards for recruiting transcribers. When many transcribers assisted him, he was able to publish lots of transcripts of the classics. After 1940, however, only a few number of transcripts are to be found. Rather than because of his declined passion for collecting transcribed versions of the classics, it might be due to the fact that there were not many transcribers to ask for help and Garam felt his limitation in transcribing by himself because he was too old then. Therefore, it can be assumed that the number of transcripts started to diminish as there were fewer people to assist Karam. At times when transcribing was prevalent, transcribers could be distinguished by several types. At the same time, they had something in common in that they were not just mediocre 寫字生. The fact that Karam only asked only small numbers of transcribers for assistance supports this argument. Karam’s various transcription works contain traces of a deep agony of him who tried to make the transcripts closer to original versions.
목차 (Table of Contents)
참고문헌 (Reference)
1 "협률대성"
2 "해동이적"
3 "해동문헌총목록"
4 이겸노, "통문관 책방비화" 민학회 59-, 1988
5 "청구야담"
6 송정숙, "조선시대 사본 연구" 한국서지학회 (26) : 347-, 2003
7 "일동장유가"
8 "악장가사"
9 이민영, "서지학자로서의 이병기와 가람문고 연구" 12-21, 2013
10 이민희, "서지학자로서의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연구 - 『가람일기』에 나타난 고서 수집 및 거래를 중심으로 -" 한국학연구소 (37) : 193-227, 2011
1 "협률대성"
2 "해동이적"
3 "해동문헌총목록"
4 이겸노, "통문관 책방비화" 민학회 59-, 1988
5 "청구야담"
6 송정숙, "조선시대 사본 연구" 한국서지학회 (26) : 347-, 2003
7 "일동장유가"
8 "악장가사"
9 이민영, "서지학자로서의 이병기와 가람문고 연구" 12-21, 2013
10 이민희, "서지학자로서의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연구 - 『가람일기』에 나타난 고서 수집 및 거래를 중심으로 -" 한국학연구소 (37) : 193-227, 2011
11 문일평, "문일평 1934년" 살림 33-, 2008
12 강경호, "가집 <협률대성>의 편찬 특성과 전승·향유의 문화적 의미" 한국시조학회 (40) : 31-57, 2014
13 이병기, "가람일기" 신구문화사 1-766, 1975
14 이민희, "가람 이병기와 서지학" 애산학회 40 : 215-262, 2014
15 이형대, "가람 이병기와 국학" 민족문학사연구소 10 : 345-386, 1997
16 이병기, "韓國書誌의 硏究" 신구문화사 1-505, 1966
17 박영학, "嘉藍 李秉岐의 書誌觀 攷 - 書卷氣와 관련하여 -" 한국서지학회 (50) : 411-431, 2011
18 권순회, "南滄 孫晉泰의 歌集 轉寫와 『朝鮮古歌謠集』 편찬" 한민족어문학회 (54) : 101-129, 2009
19 김명준, "『악장가사』의 성립과 소재 작품의 전승 양상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2003
20 김윤희, "『송강가사(松江歌辭)』에 대한 가람 이병기의 비평과 정전화(正典化)의 실제" 한국학연구소 (44) : 81-107, 2013
21 김두헌, "『寫字廳先生案』과 조선시대 寫字官의 신분" 한국고문서학회 24 : 237-274, 2004
22 백진우, "20세기초 일본인 장서가의 필사기와 장서기 연구 - 마에마 쿄사쿠와 아사미 린타로의 장서를 중심으로 -" 대동한문학회 (구.교남한문학회) 49 (49): 179-210, 2016
송강 정철의 평전을 위한 기초 연구(2) - 『연보』 새로 쓰기 작업과 관련해서 -
소설 평점 속 평점가의 다양한 얼굴들 - 평점가의 태도에 따른 평점의 성격 -
학술지 이력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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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1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 |
2018-12-01 | 평가 | 등재후보로 하락 (계속평가) |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 |
201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기타) | |
201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기타) | |
2011-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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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49 | 0.49 | 0.46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44 | 0.41 | 1.24 | 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