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

      1910년대 박용만의 국제 인식 = Park Yongman's Capacity to Grasp the Nature of I​nternational Relations in the 1910s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106585559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and analyze Park Yongman’s capacity and perspective on the complicated and chaotic nature of the international relations or global conflicts between powers in 1910s, by analyzing his speech texts, letters...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and analyze Park Yongman’s capacity and perspective on the complicated and chaotic nature of the international relations or global conflicts between powers in 1910s, by analyzing his speech texts, letters and articles published in journals such as 『Shinhakwolbo』, 『Jekookshinmoon』, 『Shinhanminbo』 and 『Kookminbo』. Around March 1919, Korean independence activists established a provisional government in Korea, China and Russia with an emphasis on international diplomacy. At that time, Park Yongman was elected as the first foreign minister in the organized Seoul and Korea's interim governments. This proves Park Yongman's diplomatic prowess at the time was excellent. The leaders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were sure that he had high expectations.
      Although he had achieved what common people couldn’t do in various areas, most researches on him have been focused on his armed struggles against Japanese colonialism. But it seems to be part of what he was. Park Yongman, a young radical political reformer, was imprisoned three times. And in 1905 he left for America with great aspirations. But the reality of the United States was discouraging since USA was as bellicose as any other imperial nation. Park Yongman criticized the contradictions of Monroeism, which Americans are proud of, and constantly emphasized the need for calmness and self-sufficiency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He predicted that after 1915, the ambitions of Japan and America would collide with each other and war would take place. In order to rear up an independent army to go to war and to cultivate talented people to lead a new nation, and established the <Military School for Korea Youth(韓人少年兵學校)> and the <Korean Military Corporation(大朝鮮國民軍團)>. When the First World War broke out, Park Yongman extended the organization of the Korean Military Corporation to Korea, China and Russia. Park Yongman's choice of armed anti-Japaneseism and his argument for independence war was based on his recognition of international relations.

      더보기

      국문 초록 (Abstract)

      1919년 3월을 전후하여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와 중국, 러시아에서 외교에 중점을 두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 시기 조직된 한성정부와 이후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박용만은 모...

      1919년 3월을 전후하여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와 중국, 러시아에서 외교에 중점을 두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 시기 조직된 한성정부와 이후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박용만은 모두 초대 외무총장에 선출되었다. 이는 당시 박용만이 갖고 있던 역량과 그에 대한 한인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결과였다. 그러나 박용만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는 그의 활동의 한 부분인 무장 항일 활동에 치우쳐 있는 게 현실이다.
      이 논문은 박용만이 망명을 전후한 시기와 망명 이후 초대 외무총장에 선출되기 이전까지 『신학월보』, 『제국신문』, 『신한민보』, 『국민보』 등에 발표했던 글과 국제회의에서 발표한 연설문, 그리고 서신 등을 통해 그의 국제사회에 대한 인식과 변화과정을 정리하고 분석한 것이다.
      급진적인 정치개혁가의 길을 선택한 박용만은 상동청년회, 만민공동회, 보안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1905년 미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세 번이나 수감 될 정도로 개혁과 구국에 대한 의지가 굳건했고 실천적이었다. 그러나 큰 포부를 안고 도착한 미국에서 그가 목격한 미국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침략성을 갖고 있었다. 그는 미국인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먼로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며 한인들에게 국제사회의 냉혹함과 자강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박용만은 1915년을 전후하여 미ㆍ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때를 독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 사회적 조직체인 국민회를 ‘정치적 조직’, 즉 임시정부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對日 독립전쟁을 수행할 독립군 양성과 함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을 설립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군단의 세력을 국내와 중국, 러시아지역으로까지 확대시키며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그는 1918년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나 파리강화회의 등에 기대를 걸지 않았고, 외교노선을 추구하며 수립된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직을 거부했다. 그는 자국의 이익이 없다면 어떤 나라도 한국인들의 호소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11년 일어나 세계를 주목시켰던 중국의 신해혁명에 대해서도 박용만은 남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그는 당시를 혁명의 시대라고 보고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공화혁명의 성공을 바라고 있었지만 중국이 처한 현실과 그에 따른 여파를 분석하며 혁명 이후의 상황을 크게 우려했다.
      박용만은 수많은 글을 통해 국제사회의 현실을 알리고, 분석하며 한인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설득했다. 그가 남긴 글에는 그의 국제관계 인식이 담겨있고, 그 변화과정이 드러난다. 또한 그가 무장 항일노선을 선택하고, 독립전쟁론을 주장한 배경이 결국 그의 국제관계의 인식을 바탕으로 한 실천적 독립운동이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金鉉九, "金鉉九自傳, 又醒遺傳"

      2 "황성신문"

      3 "친목회회보"

      4 쟝세노, "중국현대사 1911-1949" 까치출판사 1982

      5 "주간조선"

      6 "제국신문"

      7 방선주,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8 김원용, "재미한인 50년사" 혜안 2004

      9 정병준, "우남 이승만연구" 역사비평사 2005

      10 민두기, "신해혁명사 : 중국의 공화혁명 1903~1913" 민음사 1994

      1 金鉉九, "金鉉九自傳, 又醒遺傳"

      2 "황성신문"

      3 "친목회회보"

      4 쟝세노, "중국현대사 1911-1949" 까치출판사 1982

      5 "주간조선"

      6 "제국신문"

      7 방선주,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8 김원용, "재미한인 50년사" 혜안 2004

      9 정병준, "우남 이승만연구" 역사비평사 2005

      10 민두기, "신해혁명사 : 중국의 공화혁명 1903~1913" 민음사 1994

      11 "신한민보"

      12 "신학월보"

      13 한규무, "상동청년회에 대한 연구, 1897~1914" 126 : 1990

      14 안형주,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지식산업사 2007

      15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미주 한인의 민족운동" 혜안 2003

      16 김도훈, "미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역사공간 2010

      17 "매일신보"

      18 홍선표,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와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동북아역사재단 (58) : 282-333, 2017

      19 박민영, "국치 전후 이상설의 연해주지역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9) : 357-392, 2007

      20 "국민보"

      21 "고종실록"

      22 국사편찬위원회,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45)" 국사편찬위원회 2001

      23 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37)" 국사편찬위원회 2001

      24 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 二" 국사편찬위원회 1968

      25 윤병석, "西間島 白西農庄과 大韓光復軍政府" 3 : 1991

      26 录自方志钦, "康梁与保皇会" 天津古籍出版社 1997

      27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 (1), (2)"

      2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支那各地 (3)"

      29 정병준, "1919년, 파리로 가는 김규식"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60) : 79-131, 2017

      30 홍선표, "1900∼1930년대 하와이 한인사회의 선전ㆍ외교활동" 한국민족운동사학회 (89) : 5-42, 2016

      31 박찬승, "1890년대 후반 도일(渡日) 유학생의 현실인식-유학생친목회를 중심으로-" 31 : 1999

      32 "(하와이)공고서"

      33 박걸순, "(독립운동계의 '3만') 정순만" 경인문화사 2013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2-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81 0.81 0.72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5 0.66 1.616 0.06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