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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1970년대 광명단 옹기에 대한 논란과 그 문화적 파장 = The Controversy on Minium Pottery and its Cultural Repercussions in the 197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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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4996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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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the 1970s, when it became a social problem to use minium, a kind of glaze for making pottery that contains lead, in pottery, the so-called minium incident took place. The minium incident accelerated the decline of the pottery workshop, which had been having difficulties due to the decline of consumption of pottery in the 1970s, and it became an opportunity for people to categorize pottery into two kinds, harmless or harmful to the human body. This paper deviated from the dichotomous view that divides right and wrong of the use of the minium glaze. It regarded the minium incident as a historical event and looked into the process it unfolded focusing on newspaper articles.
      Minium glaze started to be used to make pottery in the late Joseon Dynasty period and early Japanese colonial era. Soon after the Korean War, demand for pottery increased dramatically, and the use of minium glaze spread in pottery workshop. Potters used minium glaze for economic reasons, to raise the success rate of production and save firewood while increasing the amount of pottery production. Until the 1960s, pottery made with minium glaze was recognized positively in the society. In the 1970s, however, it was revealed that minium glaze was harmful as it contains lead, and it started to be considered negatively. As a result, glaze containing no lead component was introduced, and legal sanctions were made against the use of minium. Potters took legal measures opposing the law against the use of minium but after the minium incident, potters themselves, rejected minium pottery and looked for solutions.
      The minium incident had the following effects on pottery culture. First, the positive perception of pottery made by using the minium glaze turned negative. Second, it provided an opportunity to set legal standards related to the public health. Third, it changed the aesthetic point of view on pottery. Fourth, it accelerated the decline of pottery production since industrialization. Fifth, it offered an opportunity to recognize pottery from dichotomous point of view about the use of the minium gla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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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the 1970s, when it became a social problem to use minium, a kind of glaze for making pottery that contains lead, in pottery, the so-called minium incident took place. The minium incident accelerated the decline of the pottery workshop, which had be...

      In the 1970s, when it became a social problem to use minium, a kind of glaze for making pottery that contains lead, in pottery, the so-called minium incident took place. The minium incident accelerated the decline of the pottery workshop, which had been having difficulties due to the decline of consumption of pottery in the 1970s, and it became an opportunity for people to categorize pottery into two kinds, harmless or harmful to the human body. This paper deviated from the dichotomous view that divides right and wrong of the use of the minium glaze. It regarded the minium incident as a historical event and looked into the process it unfolded focusing on newspaper articles.
      Minium glaze started to be used to make pottery in the late Joseon Dynasty period and early Japanese colonial era. Soon after the Korean War, demand for pottery increased dramatically, and the use of minium glaze spread in pottery workshop. Potters used minium glaze for economic reasons, to raise the success rate of production and save firewood while increasing the amount of pottery production. Until the 1960s, pottery made with minium glaze was recognized positively in the society. In the 1970s, however, it was revealed that minium glaze was harmful as it contains lead, and it started to be considered negatively. As a result, glaze containing no lead component was introduced, and legal sanctions were made against the use of minium. Potters took legal measures opposing the law against the use of minium but after the minium incident, potters themselves, rejected minium pottery and looked for solutions.
      The minium incident had the following effects on pottery culture. First, the positive perception of pottery made by using the minium glaze turned negative. Second, it provided an opportunity to set legal standards related to the public health. Third, it changed the aesthetic point of view on pottery. Fourth, it accelerated the decline of pottery production since industrialization. Fifth, it offered an opportunity to recognize pottery from dichotomous point of view about the use of the minium gla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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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1970년대 옹기 제작에 쓰이는 유약에 납 성분이 함유된 광명단을 넣어서 사용한 것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면서 이른바 ‘광명단 사건’이 일어났다. 광명단 사건은 1970년대 옹기 소비의 감소로 어려움을 겪던 옹기공방의 쇠퇴를 가속화시켰고, 사람들이 옹기를 인체에 무해한 것과 유해한 것으로 나누어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광명단 유약의 사용 유무에 따라 좋은 옹기와 나쁜 옹기로 나누는 이분법적 인식에서 벗어나 광명단 사건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보고, 그 전개 과정을 신문기사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광명단 유약은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 사이에 옹기 제작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직후 옹기 수요가 급증하면서 옹기공방에서 광명단 유약의 사용이 확산되었다. 옹기장인은 옹기 생산량을 늘리는 가운데 제작의 성공률을 높이며, 화목을 절약하기 위해 기술․경제적인 목적을 가지고 광명단 유약을 사용하였다. 1960년대까지는 사회적으로 광명단 유약을 사용하여 만든 옹기가 긍정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광명단 유약은 그 속에 포함된 납 성분의 유해성이 밝혀지면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그 영향으로 납 성분이 들어가지 않은 유약이 보급되고, 광명단 사용에 대한 법적 제재가 이루어졌다. 옹기장인은 광명단 사용 제재에 대해 반발하며 법적으로 대응하였지만, 광명단 사건이 끝난 후에는 옹기장인 스스로 광명단 옹기를 배척하며 활로를 모색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광명단 사건은 옹기문화에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쳤다. 첫째, 광명단 유약을 사용하여 만든 옹기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부정적인 것으로 전환시켰다. 둘째, 국민보건과 관련된 법적 기준 마련의 계기가 되었다. 셋째, 옹기에 대한 미적 관점에 변화를 일으켰다. 넷째, 산업화 이후 옹기제조업의 쇠퇴를 가속화하였다. 다섯째, 광명단 유약 사용 유무를 기준으로 옹기를 이분법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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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옹기 제작에 쓰이는 유약에 납 성분이 함유된 광명단을 넣어서 사용한 것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면서 이른바 ‘광명단 사건’이 일어났다. 광명단 사건은 1970년대 옹기 소비의 감...

      1970년대 옹기 제작에 쓰이는 유약에 납 성분이 함유된 광명단을 넣어서 사용한 것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면서 이른바 ‘광명단 사건’이 일어났다. 광명단 사건은 1970년대 옹기 소비의 감소로 어려움을 겪던 옹기공방의 쇠퇴를 가속화시켰고, 사람들이 옹기를 인체에 무해한 것과 유해한 것으로 나누어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광명단 유약의 사용 유무에 따라 좋은 옹기와 나쁜 옹기로 나누는 이분법적 인식에서 벗어나 광명단 사건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보고, 그 전개 과정을 신문기사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광명단 유약은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 사이에 옹기 제작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직후 옹기 수요가 급증하면서 옹기공방에서 광명단 유약의 사용이 확산되었다. 옹기장인은 옹기 생산량을 늘리는 가운데 제작의 성공률을 높이며, 화목을 절약하기 위해 기술․경제적인 목적을 가지고 광명단 유약을 사용하였다. 1960년대까지는 사회적으로 광명단 유약을 사용하여 만든 옹기가 긍정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광명단 유약은 그 속에 포함된 납 성분의 유해성이 밝혀지면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그 영향으로 납 성분이 들어가지 않은 유약이 보급되고, 광명단 사용에 대한 법적 제재가 이루어졌다. 옹기장인은 광명단 사용 제재에 대해 반발하며 법적으로 대응하였지만, 광명단 사건이 끝난 후에는 옹기장인 스스로 광명단 옹기를 배척하며 활로를 모색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광명단 사건은 옹기문화에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쳤다. 첫째, 광명단 유약을 사용하여 만든 옹기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부정적인 것으로 전환시켰다. 둘째, 국민보건과 관련된 법적 기준 마련의 계기가 되었다. 셋째, 옹기에 대한 미적 관점에 변화를 일으켰다. 넷째, 산업화 이후 옹기제조업의 쇠퇴를 가속화하였다. 다섯째, 광명단 유약 사용 유무를 기준으로 옹기를 이분법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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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김창민, "환금작물과 제주농민문화" 집문당 1995

      2 신상호, "한국 옹기와 일본 도자기의 제작기법 비교 연구" 홍익대학교 도예연구소 1990

      3 "한겨레"

      4 이한승, "청송 진안마을 옹기 생산의 변화 양상" 안동대학교 대학원 2009

      5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 학고재 1996

      6 국립중앙과학관, "전통과학기술 조사연구: 대장간, 옹기, 기와" 국립중앙과학관 과학기술사연구실 1994

      7 송성수, "우리에게 기술이란 무엇인가" 녹두 1995

      8 송재선, "우리나라 옹기" 동문선 2004

      9 김재호, "옹기장인의 옹기제작기술과 전통지식" 국립문화재연구소 48 (48): 142-157, 2015

      10 정명호, "옹기장과 제조기술에 대한 고찰(하)" 무악실학회 1996

      1 김창민, "환금작물과 제주농민문화" 집문당 1995

      2 신상호, "한국 옹기와 일본 도자기의 제작기법 비교 연구" 홍익대학교 도예연구소 1990

      3 "한겨레"

      4 이한승, "청송 진안마을 옹기 생산의 변화 양상" 안동대학교 대학원 2009

      5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 학고재 1996

      6 국립중앙과학관, "전통과학기술 조사연구: 대장간, 옹기, 기와" 국립중앙과학관 과학기술사연구실 1994

      7 송성수, "우리에게 기술이란 무엇인가" 녹두 1995

      8 송재선, "우리나라 옹기" 동문선 2004

      9 김재호, "옹기장인의 옹기제작기술과 전통지식" 국립문화재연구소 48 (48): 142-157, 2015

      10 정명호, "옹기장과 제조기술에 대한 고찰(하)" 무악실학회 1996

      11 정양모, "옹기" 대원사 2001

      12 편나래, "생애사를 통한 서울의 옹기 판매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11

      13 마샬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커뮤니케이션북스 1997

      14 "문화일보"

      15 정수진, "무형문화재 제도의 성립,그 역사성의 재고" 한국민속학회 40 : 475-508, 2004

      16 "매일경제"

      17 "동아일보"

      18 이정일, "기계용어사전" 일진사 2000

      19 "경향신문"

      20 옹기민속박물관, "경기도 옹기점 현황 조사 보고서: 서울․인천 지역 포함" 2008

      21 이은희,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식품위생 제도화" 대한의사학회 25 (25): 205-24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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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5-12-01 평가 등재후보로 하락 (기타) KCI등재후보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9-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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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6 0.66 0.7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73 0.77 1.336 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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