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辰倭亂期의 明ㆍ日 강화교섭은 조선에 부정적인 강화인식을 축적시켰고, 北人은 柳成龍을 강화주도자로 설정하여 탄핵했다. 그러나 명군 철수 후 德川家康이 우호적으로 강화교섭을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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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 2007
학위논문(석사) -- 고려대학교 대학원 , 한국사학과 한국중세사전공 , 2007.2
2007
한국어
서울
49 p. : 삽도 ; 26 cm.
지도교수: 조광
참고문헌 : p. 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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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期의 明ㆍ日 강화교섭은 조선에 부정적인 강화인식을 축적시켰고, 北人은 柳成龍을 강화주도자로 설정하여 탄핵했다. 그러나 명군 철수 후 德川家康이 우호적으로 강화교섭을 요...
壬辰倭亂期의 明ㆍ日 강화교섭은 조선에 부정적인 강화인식을 축적시켰고, 北人은 柳成龍을 강화주도자로 설정하여 탄핵했다.
그러나 명군 철수 후 德川家康이 우호적으로 강화교섭을 요청해오자, 강화배격만으로는 이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宣祖는 北人을 실각시키고 이덕형에 對日정책을 맡겼다. 이덕형은 전쟁 종결을 위해 궁극적으로 일본중앙정권과의 강화가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인지했다. 하지만 그는 對馬를 대상으로 한 정책을 펼쳤다. 섣불리 對日강화가 거론될 수 없었던 당시 분위기와 함께, 그는 對馬를 견제ㆍ포섭하여 자강한 후, 幕府와의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책을 일결 짓기 위해 필요했던 明의 委官이 파견되지 않고, 선조가 강화성사를 재촉하면서 정책은 중단되었다.
선조는 이제 勝戰의 명분을 얻은 상태에서의 조속한 강화를 원했다. 유영경은 이러한 선조의 의향에 부응했다. 그는 家康이 조선에 서계를 전하려했다는 정보와, 犯陵賊에 대한 정보를 이용하여, 이를 사절 파견명분으로 활용했다. 유영경은 명분확보에 만족하지 않고, 명분을 强化하는 과정을 거쳤다. 對馬가 보내온 가짜 犯陵賊을 진짜로 포장하여 宗廟에 바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가짜 犯陵賊의 처형을 반대하는 여론에 의해 위기를 맞았으나,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으려는 宣祖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처형에 이르렀고, 명분 强化과정과 별도로 준비되던 사절은 그 즉시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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