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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금강역사상에 관한 몇 가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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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4520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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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석굴암 금강역사상과 관련하여 이 글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석굴암 금강역사상처럼 맨손에 웃옷을 벗고 우락부락한 모습의 금강역사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하는 것이다. 둘째는 금강역사상을 흔히 인왕상이라고도 하는데, 두 개의 명칭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금강역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인왕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지에 관한 것이다. 또 통상적으로 금강역사라고 하면 말 그대로 손에 금강저를 쥔 역사를 일컫는데, 금강저를 쥐지 않고 맨주먹으로 격파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경우에도 금강역사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셋째는 석굴암에서 발견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또 한 쌍의 석굴암 금강역사상은 도대체 어떤 연유로 남겨지게 되었는지 이다. 아울러 만든 시점은 석굴암 안의 금강역사상과 같은지, 다른지 이다. 이 글은 이러한 몇 가지 궁금증에서 출발하였다.
      석굴암 금강역사상은 8세기 동아시아 금강역사상의 보편적인 특징을 지녔다. 간다라나 인도 본토의 금강역사상과는 달리 쌍으로 만들어졌고, 손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격파자세를 하고 있다. 또 그 중 1구는 입을 연 아상으로, 나머지 1구는 입을 꾹 다문 훔상이다. 바로 이 세 가지 특징, 즉 아형과 훔형에, 이들이 서로 쌍을 이루며, 맨손인 금강역사상은 중국에서 6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형식이다. 특히 이 시기는 중국의 불교조각이 漢化되는 때이기도 해서 그 변화원인은 중국 내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며, 이에 관한 좀 더 면밀한 검토는 후일을 기하였다. 석굴암 금강역사상 형식은 바로 이 漢化된 금강역사를 기본으로 삼았다.
      아울러 금강저를 쥔 상은 금강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옳지만, 맨손인 경우도 여전히 금강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물론 5세기경 중국 금강역사상은 본의에 충실하여 금강저를 쥔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6세기 전반 금강역사는 중국화를 거쳐 맨손으로 등장한다. 이 시기 이미 '금강'이라는 개념은 '금강저'라는 제한된 범위를 벗어나 '모든 번뇌와 삿된 것을 깨뜨릴 수 있는 단단한 것'으로 상징되었고, 따라서 맨손의 역사 역시 넓은 의미의 금강역사로 파악하여도 무방한 것으로 보았다. 또 금강역사를 흔히 인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20세기 일본의 영향으로 생겨난 결과로 파악하였으며, 금강역사는 인왕으로 바꾸어 부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는 또 한 쌍의 석굴암 금강역사상의 파편이 있다. 이들 파편은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 역시 필자의 의문 중 하나였다. 석굴암 금강역사상은 부조이지만 입체감을 잃지 않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인 조각이다. 금강역사상의 양팔을 몸에서 떼어 부조 밖으로 돌출시킨 것은 조각을 훨씬 더 입체적으로 보이게는 해주었지만, 한 쌍의 실패작을 낳았다. 금강역사상은 7세기 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8세기까지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금강역사상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석굴암 금강역사상의 조영 이후 금강역사는 사천왕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금강역사가 사천왕에게 유행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 원인 역시 앞으로 필자가 기울여야할 과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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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금강역사상과 관련하여 이 글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석굴암 금강역사상처럼 맨손에 웃옷을 벗고 우락부락한 모습의 금강역사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하는 ...

      석굴암 금강역사상과 관련하여 이 글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석굴암 금강역사상처럼 맨손에 웃옷을 벗고 우락부락한 모습의 금강역사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하는 것이다. 둘째는 금강역사상을 흔히 인왕상이라고도 하는데, 두 개의 명칭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금강역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인왕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지에 관한 것이다. 또 통상적으로 금강역사라고 하면 말 그대로 손에 금강저를 쥔 역사를 일컫는데, 금강저를 쥐지 않고 맨주먹으로 격파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경우에도 금강역사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셋째는 석굴암에서 발견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또 한 쌍의 석굴암 금강역사상은 도대체 어떤 연유로 남겨지게 되었는지 이다. 아울러 만든 시점은 석굴암 안의 금강역사상과 같은지, 다른지 이다. 이 글은 이러한 몇 가지 궁금증에서 출발하였다.
      석굴암 금강역사상은 8세기 동아시아 금강역사상의 보편적인 특징을 지녔다. 간다라나 인도 본토의 금강역사상과는 달리 쌍으로 만들어졌고, 손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격파자세를 하고 있다. 또 그 중 1구는 입을 연 아상으로, 나머지 1구는 입을 꾹 다문 훔상이다. 바로 이 세 가지 특징, 즉 아형과 훔형에, 이들이 서로 쌍을 이루며, 맨손인 금강역사상은 중국에서 6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형식이다. 특히 이 시기는 중국의 불교조각이 漢化되는 때이기도 해서 그 변화원인은 중국 내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며, 이에 관한 좀 더 면밀한 검토는 후일을 기하였다. 석굴암 금강역사상 형식은 바로 이 漢化된 금강역사를 기본으로 삼았다.
      아울러 금강저를 쥔 상은 금강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옳지만, 맨손인 경우도 여전히 금강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물론 5세기경 중국 금강역사상은 본의에 충실하여 금강저를 쥔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6세기 전반 금강역사는 중국화를 거쳐 맨손으로 등장한다. 이 시기 이미 '금강'이라는 개념은 '금강저'라는 제한된 범위를 벗어나 '모든 번뇌와 삿된 것을 깨뜨릴 수 있는 단단한 것'으로 상징되었고, 따라서 맨손의 역사 역시 넓은 의미의 금강역사로 파악하여도 무방한 것으로 보았다. 또 금강역사를 흔히 인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20세기 일본의 영향으로 생겨난 결과로 파악하였으며, 금강역사는 인왕으로 바꾸어 부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는 또 한 쌍의 석굴암 금강역사상의 파편이 있다. 이들 파편은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 역시 필자의 의문 중 하나였다. 석굴암 금강역사상은 부조이지만 입체감을 잃지 않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인 조각이다. 금강역사상의 양팔을 몸에서 떼어 부조 밖으로 돌출시킨 것은 조각을 훨씬 더 입체적으로 보이게는 해주었지만, 한 쌍의 실패작을 낳았다. 금강역사상은 7세기 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8세기까지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금강역사상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석굴암 금강역사상의 조영 이후 금강역사는 사천왕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금강역사가 사천왕에게 유행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 원인 역시 앞으로 필자가 기울여야할 과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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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守信亭, "金剛力士武道礎 卷1-5" 春松軒 1805

      2 문명대, "한국의 불상조각 3, 통일신라 불교조각사 연구(下)" 예경 182-231, 2003

      3 문명대, "한국부조(조각)상의 연구(1) -신라인왕상(金剛力士)考-" 동국대학교 4 : 37-103, 1979

      4 문명대, "한국부조(조각)상의 연구(1) -신라인왕상(金剛力士)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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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문명대, "토함산 석굴" 한언 146-, 2000

      7 임영애, "중국석굴의 금강역사상 -붓다 수호에서 寺域 수호로-" 근간

      8 임영애, "중국 신중상의 얼굴변화-異人化의 시작"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6) : 259-280, 2006

      9 이기영, "인왕반야경과 호국불교" 5 : 491-521, 1975

      10 임영애, "인도와 간다라의 執金剛神"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9) : 333-353, 2007

      1 守信亭, "金剛力士武道礎 卷1-5" 春松軒 1805

      2 문명대, "한국의 불상조각 3, 통일신라 불교조각사 연구(下)" 예경 182-231, 2003

      3 문명대, "한국부조(조각)상의 연구(1) -신라인왕상(金剛力士)考-" 동국대학교 4 : 37-103,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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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임영애, "중국 신중상의 얼굴변화-異人化의 시작"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6) : 259-28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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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임영애, "인도와 간다라의 執金剛神"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9) : 333-353, 2007

      11 문명대, "신라화엄경사경과 그 변상도의 연구 -寫經變相圖의 연구(1)-" 14 : 27-64, 1979

      12 이기백, "신라 경덕왕대 화엄경 사경 關與者에 대한 고찰" 83 : 126-140,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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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김정숙, "고구려 삼실총 ‘支天力士像’의 도상적 원류 -인도 약샤侏儒像의 東漸 문제-, In 동서의 예술과 미학" 솔출판사 175-200, 2007

      25 "경주 신라 유적의 어제와 오늘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 유리원판전 Ⅱ"

      26 박형국, "경주 석굴암 諸佛像에 관한 佛敎圖像學的 考察" 신라문화선양회 21 : 64-66, 2000

      27 林玲愛, "간다라(Gandhara)의 金剛力士" 중앙아시아학회 9 : 161-185, 2004

      28 柳宗悅, "石佛寺の彫刻に就いて, In 朝鮮とその藝術" 春秋社 1973

      29 村田治郞, "法隆寺關係の史料抄, In 法隆寺の硏究史" 中央公論美術出版 400-, 1987

      30 "法林寺主佛三尊 左右金剛神等皆所塑也(T49 no.2039, 三國遺事 卷第四 義解第五 良志使錫)"

      31 니시고리 료우스케, "天部の佛像事典" 東京美術 54-55, 1983

      32 東伏見邦英, "可無流知 -佛國寺と石窟庵-" 17 : 13-, 1936

      33 林玲愛, "克孜爾石窟金剛力士的特征及其意味" 中山大學校 藝術史硏究中心 8 : 251-268, 2006

      34 나카무라 하지메, "佛敎美術事典" 東京書籍 342-, 2003

      35 八木春生, "中國南北朝時代における金剛力士像について, In 中國佛敎美術と漢民族化-北魏後期を中心として" 法藏館 13-, 2004

      36 "三國遺事 孝善 第9 大城 孝二世父母 神文王代"

      37 "三國史記 卷44 列傳 第4"

      38 "T08 no.246 仁王護國般若波羅密多經(不空 譯) 2卷"

      39 "T08 no.245, 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鳩摩羅什 譯) 2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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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7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20-04-20 통합 KCI등재
      2020-04-01 학회명변경 영문명 : The Center of Research for Silla Culture Dongguk University -> The Research Institute for Silla Culture of Dongguk University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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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3 0.73 0.67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2 0.69 1.45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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