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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鄭鳳時의 행적과 유교담론 = Jeong Bong-Si’s Whereabouts and Confucian Discours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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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8244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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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Jeong Bong-Si was active as a bureaucrat during the period of the Korean Empire, born in Gangwon-do Province in the mid-19th century at the culmination of Neo-Confucianism. While he was active as a bureaucrat in the Korean Empire, his accomplishments as well as administrative ability were acknowledged, e.g. participating in compiling Gukjobogam. However, Jeong Bong-Si became one of the representative pro-Japanese Confucian scholars who were active at Gyeonghagwan in cooperation with the Japanese Empire till his death since its occupation of the Korean Empire. Jeong Man-Jo and he were the only two persons who became Bujehak, Daejehak, and the President of Myeongnyun Hagwon, starting as a lecturer at Gyeonghagwon.
      Active as a lecturer at the lecture institute of Gyeonghagwon from 1912 through 1929, Jeong Bong-Si composed poetry and prose praising the Emperor and the Crown Prince of the Japanese Empire and gave lectures justifying the colonial rule of the Japanese Empire with the teachings of Confucianism. His Confucian discourse was a series of contents favorable for maintaining the social order in Joseon under Japanese rule by the Japanese Empire while the ‘thought of righeousness’ of Neo-Confucianism in Joseon was removed. The pro-Japanese Confucian Scholars’ discourse of Confucianism that fell below the level of Neo-Confucianism of the former dynasty period, rather, made Confucianism and Confucian scholars recognized as old and worn-out thought and corrupt students of Confucianism. Thus, entering the 1930s, Confucianism and Confucian scholars were completely eliminated from the mainstream of Kore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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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g Bong-Si was active as a bureaucrat during the period of the Korean Empire, born in Gangwon-do Province in the mid-19th century at the culmination of Neo-Confucianism. While he was active as a bureaucrat in the Korean Empire, his accomplishments ...

      Jeong Bong-Si was active as a bureaucrat during the period of the Korean Empire, born in Gangwon-do Province in the mid-19th century at the culmination of Neo-Confucianism. While he was active as a bureaucrat in the Korean Empire, his accomplishments as well as administrative ability were acknowledged, e.g. participating in compiling Gukjobogam. However, Jeong Bong-Si became one of the representative pro-Japanese Confucian scholars who were active at Gyeonghagwan in cooperation with the Japanese Empire till his death since its occupation of the Korean Empire. Jeong Man-Jo and he were the only two persons who became Bujehak, Daejehak, and the President of Myeongnyun Hagwon, starting as a lecturer at Gyeonghagwon.
      Active as a lecturer at the lecture institute of Gyeonghagwon from 1912 through 1929, Jeong Bong-Si composed poetry and prose praising the Emperor and the Crown Prince of the Japanese Empire and gave lectures justifying the colonial rule of the Japanese Empire with the teachings of Confucianism. His Confucian discourse was a series of contents favorable for maintaining the social order in Joseon under Japanese rule by the Japanese Empire while the ‘thought of righeousness’ of Neo-Confucianism in Joseon was removed. The pro-Japanese Confucian Scholars’ discourse of Confucianism that fell below the level of Neo-Confucianism of the former dynasty period, rather, made Confucianism and Confucian scholars recognized as old and worn-out thought and corrupt students of Confucianism. Thus, entering the 1930s, Confucianism and Confucian scholars were completely eliminated from the mainstream of Kore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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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정봉시는 성리학의 절정기인 19세기 중반 강원도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시기에 관료로 활동하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관료로 활동하면서『국조보감』편찬 등에 참여하는 등 행정 능력뿐만 아니라 학식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정봉시는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 이후 사망할 때까지 일제에 협력하여 경학원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일제협력유림 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정만조와 함께 경학원 강사로 시작하여 부제학・대제학 및 명륜학원 총재에 오른 유이한 인물이었다. 정봉시는 1912년부터 1929년까지 경학원 강원강사로 활동하며 일제의 천황과 황태자를 칭송하는 시문을 짓는 한편, 일제의 식민통치를 유교의 가르침으로 정당화하는 강연을 하였다. 그의 유교담론은 조선 성리학의 ‘의리사상’이 제거되고 일제가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 조선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유리한 내용으로 점철되었다. 전왕조시대의 성리학보다 수준이 떨어진 일제협력유림의 유교담론은 오히려 유교와 유림을 낡고 케케묵은 생각과 썩은 유생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 들어서면 유교와 유림은 우리 역사의 주류에서 완전히 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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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봉시는 성리학의 절정기인 19세기 중반 강원도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시기에 관료로 활동하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관료로 활동하면서『국조보감』편찬 등에 참여하는 등 행정 능력뿐만 아...

      정봉시는 성리학의 절정기인 19세기 중반 강원도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시기에 관료로 활동하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관료로 활동하면서『국조보감』편찬 등에 참여하는 등 행정 능력뿐만 아니라 학식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정봉시는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 이후 사망할 때까지 일제에 협력하여 경학원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일제협력유림 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정만조와 함께 경학원 강사로 시작하여 부제학・대제학 및 명륜학원 총재에 오른 유이한 인물이었다. 정봉시는 1912년부터 1929년까지 경학원 강원강사로 활동하며 일제의 천황과 황태자를 칭송하는 시문을 짓는 한편, 일제의 식민통치를 유교의 가르침으로 정당화하는 강연을 하였다. 그의 유교담론은 조선 성리학의 ‘의리사상’이 제거되고 일제가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 조선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유리한 내용으로 점철되었다. 전왕조시대의 성리학보다 수준이 떨어진 일제협력유림의 유교담론은 오히려 유교와 유림을 낡고 케케묵은 생각과 썩은 유생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 들어서면 유교와 유림은 우리 역사의 주류에서 완전히 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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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정욱재, "한말·일제하 유림 연구 : 일제협력유림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09

      2 금장태, "한국의 선비와 선비정신"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3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3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4 이기훈, "일제하 청년담론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5

      5 권희영, "일제시기 조선의 유학담론" 한국민족운동사학회 (63) : 121-154, 2010

      6 변은진, "일제강점기 유교 단체 기관지의 현황과 성격" 호서사학회 (93) : 181-223, 2020

      7 정욱재, "일제강점기 經學院 講士의 위상과 활동" 호남사학회 (86) : 145-174, 2022

      8 박양신, "일본의 한국병합을 즈음한 '일본관광단'과 그 성격" 동양학연구원 (37) : 69-89, 2005

      9 정욱재, "유도창명회의 창명(彰明) 연구" 역사실학회 (77) : 239-263, 2022

      10 박학래, "연재학파(淵齋學派)의 형성과 전개- 『계산연원록(溪山淵源錄)』을 중심으로-" 유학연구소 50 : 111-152, 2020

      1 정욱재, "한말·일제하 유림 연구 : 일제협력유림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09

      2 금장태, "한국의 선비와 선비정신"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3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3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4 이기훈, "일제하 청년담론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5

      5 권희영, "일제시기 조선의 유학담론" 한국민족운동사학회 (63) : 121-154, 2010

      6 변은진, "일제강점기 유교 단체 기관지의 현황과 성격" 호서사학회 (93) : 181-223, 2020

      7 정욱재, "일제강점기 經學院 講士의 위상과 활동" 호남사학회 (86) : 145-174, 2022

      8 박양신, "일본의 한국병합을 즈음한 '일본관광단'과 그 성격" 동양학연구원 (37) : 69-89, 2005

      9 정욱재, "유도창명회의 창명(彰明) 연구" 역사실학회 (77) : 239-263, 2022

      10 박학래, "연재학파(淵齋學派)의 형성과 전개- 『계산연원록(溪山淵源錄)』을 중심으로-" 유학연구소 50 : 111-152, 2020

      11 다니엘스, "역사의 연구" 을유문화사 1983

      12 주경철,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 문학과 지성사 1999

      13 김도형, "국권과 문명" 지식산업사 2022

      14 서명일, "계몽운동기(1905-1910) 사회진화론 수용의 논리" 고려대학교 대학원 2006

      15 "高宗實錄"

      16 정봉현, "雲籃先生文集"

      17 "經學院雜誌"

      18 "純宗實錄"

      19 강윤정, "白下 金大洛의 현실인식과 민족운동" 7 : 2009

      20 유준기, "民族運動과 宗敎活動" 국학자료원 2001

      21 류미나, "植民地時期朝鮮における經學院: 儒敎敎化機關と儒敎イデオロギーの再編"

      22 이명화, "朝鮮總督府의 儒敎政策(1910~1920년대)" 7 : 1993

      23 "朝鮮總督府官報"

      24 "承政院日記"

      25 이범세, "恥齋集"

      26 김상정, "寒月氷屑"

      27 "大韓民報"

      28 "大韓每日申報"

      29 "大東學會月報"

      30 "大朝鮮獨立協會會報"

      31 "儒道"

      32 홍동현, "1920년대 하의도 농민운동의 전개와 抗日 연대" 도서문화연구원 (56) : 309-33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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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2-06 학회명변경 영문명 : 미등록 -> The Society for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9-29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미등록 -> The Journal for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3-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1-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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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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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28 1.28 1.1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7 0.89 2.254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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