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대한제국기 성균관의 고등교육기관화를 둘러싼 담론을 살펴 보았다.대한제국기라 함은 1897년부터 1910년까지를 말한다. 성균관에 관한 담론이발견되는 것은 1899년 황성신문이 발간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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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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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kyunkwan ; the Great Han Empire ; Residency-General ; Higher Education ; Confucian scholars ; 성균관 ; 대한제국 ; 통감부 ; 고등교육기관 ; 유학 ; 국가주의 ; 대동학회 ; 문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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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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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대한제국기 성균관의 고등교육기관화를 둘러싼 담론을 살펴 보았다.대한제국기라 함은 1897년부터 1910년까지를 말한다. 성균관에 관한 담론이발견되는 것은 1899년 황성신문이 발간된...
본고는 대한제국기 성균관의 고등교육기관화를 둘러싼 담론을 살펴 보았다.대한제국기라 함은 1897년부터 1910년까지를 말한다. 성균관에 관한 담론이발견되는 것은 1899년 황성신문이 발간된 이후다. 이 시기 보수 유생들과 개신유학자층은 언론과 상소 등을 통해 성균관에 대한 기대를 표출하고 있었다. 보수 유생들이 성균관의 복권을 주장하고 있었던 데 반해 개신유학자층은 부국강병과 문명화의 관점에서 성균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겉으로 표방한 것과는 달리 성균관을 고등교육기관으로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1904년 들어 대한제국 정부의 힘이 약화되고, 통감부라는 새로운 정치 권력이 등장했다. 국가적 위기감 속에서 지식인들의 발화도 늘어났다. 그런가운데 통감부는 기본적으로 성균관에 대해 방관자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국가주의의 확장 속에서 성균관에 대한 기대감은 커져갔고, 통감부도 나름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성균관에 관한 담론의 변화 속에서 각 세력의 입장이 복잡하게얽혀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본고는 성균관을 둘러싼 담론에서 두 가지 특징을 발견했다. 첫째, 1904년을기점으로 성균관 담론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1904년 이전까지 보수 유생들과 개신유학자층은 전통 유학에 기반하여 고등교육기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 상대적으로 개신유학자층은 신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국민교육의 관점에서 접근하였다는 차이가 있다. 1904년 이후에도 보수 유생 본고는 대한제국기 성균관의 고등교육기관화를 둘러싼 담론을 살펴 보았다.대한제국기라 함은 1897년부터 1910년까지를 말한다. 성균관에 관한 담론이발견되는 것은 1899년 황성신문이 발간된 이후다. 이 시기 보수 유생들과 개신유학자층은 언론과 상소 등을 통해 성균관에 대한 기대를 표출하고 있었다. 보수 유생들이 성균관의 복권을 주장하고 있었던 데 반해 개신유학자층은 부국강병과 문명화의 관점에서 성균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겉으로 표방한 것과는 달리 성균관을 고등교육기관으로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1904년 들어 대한제국 정부의 힘이 약화되고, 통감부라는 새로운 정치 권력이 등장했다. 국가적 위기감 속에서 지식인들의 발화도 늘어났다. 그런가운데 통감부는 기본적으로 성균관에 대해 방관자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국가주의의 확장 속에서 성균관에 대한 기대감은 커져갔고, 통감부도 나름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성균관에 관한 담론의 변화 속에서 각 세력의 입장이 복잡하게얽혀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본고는 성균관을 둘러싼 담론에서 두 가지 특징을 발견했다. 첫째, 1904년을기점으로 성균관 담론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1904년 이전까지 보수 유생들과 개신유학자층은 전통 유학에 기반하여 고등교육기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 상대적으로 개신유학자층은 신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국민교육의 관점에서 접근하였다는 차이가 있다. 1904년 이후에도 보수 유생들은 여전히 전통적 유학 교육의 장으로서 성균관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생들은 대한제국 정부의 학교 설립 조칙을 수용하며, 국가 간 경쟁에서 살아남기위해 고등교육기관이 필요하다는 분위기에 호응하였다. 국가주의적 교육관은 황성신문과 만세보 등의 신문과 각종 학회지에서 더욱 명료하게 전개되었다. 이들은 정부의 성균관 방치를 규탄하고, 성균관 구성원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교육관 자체가 국가주의화 하는 속에서 성균관을 고등교육기관으로 만들고자 하는 여론도 강렬하게 일어났던 것이다.둘째, 대한제국 정부와 통감부 모두 성균관 정책 입안을 정치적으로 접근했고,이는 당대 성균관에 관한 담론들과 일정하게 조응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한제국 정부가 유생층을 포용하기 위해 유교를 종교화하겠다고 선언하고 성균관의 위상 제고 표방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통감부도 기본적으로 유생층의 포섭이라는 정치적 목적 하에 성균관에 대한 정책을 수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통감부 설치 초기 교육 업무를 담당했던 시데하라는 순차적으로 성균관을 고등교육기관으로 만들겠다고 밝혔고 이는 이전 대한제국 정부의 정책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토 통감은 시데하라를 경질했고, 성균관 정책도 보류시켰다.그러다가 1907년 황태자의 성균관 방문, 1908년 순종의 성균관 방문을 계기로성균관학칙을 개정하여 학과 체계를 신식으로 정비하였다. 이는 실업 분야의 보통교육에 주력한다던 통감부 교육 정책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따라서 통감부 시기 성균관 정비는 교육 내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외부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study examined the discourse around Sungkyunkwan turninginto an institution of higher education during the Great Han Empireand found two characteristics. First, there were changes to the discourse of Sungkyunkwan around 1904, before which both co...
This study examined the discourse around Sungkyunkwan turninginto an institution of higher education during the Great Han Empireand found two characteristics. First, there were changes to the discourse of Sungkyunkwan around 1904, before which both conservativeand reformed Confucian scholars reached an agreement that an institution of higher education should be founded based on traditional Confucianism. Relatively speaking, reformed Confucian scholars recognized the importance of new science and took an approach from the perspective of national education, in which they were different from their conservative counterparts. Even after 1904, conservative Confucianscholars still designed Sungkyunkwan as a place of traditional Confucian education. Confucian scholars, however, responded to the atmosphere of a need for institutions of higher education to react to the royal edict on school establishment from the government of Korean Empire and survive in the competition among the nations. The nationalistic view of education developed in an even clearer manner in newspapers such as Hwangseong Shinmun and Mansebo and all kinds of journals. They denounced the way the Government neglected Sungkyunkwan and urged the members of Sungkyunkwan to have an awakening. A strong public opinion emerged to make Sungkyunkwan an institution of higher education as the view of education itself was becoming nationalistic.Secondly, both the government of Korean Empire and Residency-General made a political approach toward the formulation of Sungkyunkwan policy, which corresponded to the Sungkyunkwan discourses of the times in some constant fashion. Just like the government of Korean Empire declared to turn Confucianism into a religion to embrace the Confucian scholars and never gave up its claim for the heightened status of Sungkyunkwan, Residency-General seems to have set policies for Sungkyunkwan basically under the political goal of embracing Confucian scholars. Being responsible for education affairs in theearly days of Residency-General, Shidehara announced a plan of turning Sungkyunkwan into an institution of higher education in a sequential manner. His plan did not stray off the old government policy of Korean Empire much. Residency-General Ito, however, replaced Shidehara and put the Sungkyunkwan policy on hold. After the CrownPrince's visit to Sungkyunkwan in 1907 and King Sunjong's visit toit in 1908, the its school regulations were revised with its subject system arranged in a new mode, which went against the educational policy of Residency-General that tried to focus on common education inthe field of business. It is thus natural that the arrangement of Sungkyunkwan should be interpreted to have followed the external political purposes rather than the internal perspective of education during the period of Residency-General. Some conservative Confucian scholars and their reformed counterparts made a positive response to the expansion of Confucian education.
목차 (Table of Contents)
참고문헌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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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청소년 문화운동과 교육개혁담론:안팡(Der Anfang)지에 나타난 학교개혁 담론을 중심으로
1920년대 극동지역 미취학아동 교육기관- 선봉에 기초하여 -
기호학 및 ‘성리학적 구성주의’ 이론을 적용한 기록과 기록관리 행위의 본질과 사회적 역할의 이해:레코드 컨티뉴엄의 보완에 초점을 맞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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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2005-05-31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외대사학 -> 역사문화연구 |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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