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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초반 金道練 賄賂事件과 政界改編 = Kim Do Ryeon's Bribery Case and Political Reconstruction Early in King Sejong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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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4062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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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세종의 본격적인 통치는 동왕 4년 5월에 태종이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종은 親政이 개시된 이후에도 곧바로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政界에는 여전히 태종의 侍從舊臣...

      세종의 본격적인 통치는 동왕 4년 5월에 태종이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종은 親政이 개시된 이후에도 곧바로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政界에는 여전히 태종의 侍從舊臣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친정을 계기로 왕권강화를 도모해야 했던 세종에게 정치적으로 매우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세종은 보다 강력한 왕권 행사를 위해 시종구신 중심의 정치 구도를 해체하고 정계를 새로 개편해야 했다. 金道練 賄賂事件은 바로 이러한 요구가 있던 시기에 발생하여, 세종초반 정계개편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세종 8년에 밝혀진 ‘김도련 회뢰사건’은 김도련이라는 자가 노비를 쟁송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소송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17명의 전․현직 대소신료에게 많은 노비를 증여한 전형적인 뇌물수수사건이었다. 이 사건에는 특히 인사권ㆍ병권에 관여했던 핵심 인사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정치적 파장도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김도련 회뢰사건은 세종의 진상조사 촉구로 인해 더욱 확대되었다. 세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태종의 주요 시종구신들을 퇴진시킴으로써 정계를 개편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해가기 시작했다. 우선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하였고, 이후 政曹의 판서를 자주 교체하여 그 재임기간을 단축시킴으로써 신료집단의 인사권 장악도 견제하였다. 또한 김도련 사건 이후 議政府의 議政 구성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 사건 이전까지 의정부 의정들은 거의 대부분 공신출신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공신출신 의정들이 모두 물러나고, 황희ㆍ맹사성과 같은 비공신 출신들로 교체되었다. 이는 곧 최고합좌기구에서 창업기의 주요세력이 물러났음을 의미한다. 결국 세종은 이 사건을 활용하여 정계를 국왕 중심으로 재편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해갔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권강화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세종은 김도련 사건을 정치적으로 확대시켜 정계개편을 도모하였지만, 사건을 처리하고 마무리할 때에는 이전과 매우 다른 방식을 지향하였다. 그는 관기 쇄신의 강도를 서서히 높여가며 밑으로부터 점진적인 세력교체를 추진하였고, 그러한 가운데 일어난 이 사건을 활용하여 시종구신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구축하였다. 그러나 그 처벌은 ‘贓吏를 경계하는 수준’에서 마무리하였다. 사건 처리과정에서 충ㆍ불충의 논리가 배제된 만큼, 주요 인사들이 전면 교체되면서도 논죄가 극단으로 흐르지 않았고, 이후 그들의 복권도 보다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즉 세종은 태종생존기까지 주로 활용되었던 忠ㆍ不忠에 따른 토역논리를 지양하여 가혹한 治罪확대를 가급적 축소하고, 士風 쇄신이라는 전제 하에 관료의 불법행위와 도덕적 물의만 단죄하는 수위에서 정치국면을 전환한 것이다. 이는 건국 이래 추구되었던 武斷的인 왕권방식이 세종 친정이후 비로소 지양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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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ing Sejong's regime started earnestly after King Taejong died in May, the 4th year of King Sejong's era. However, King Sejong did not perform his powerful domination right after his direct governing started. For, Sijonggushin (侍從舊臣: the gover...

      King Sejong's regime started earnestly after King Taejong died in May, the 4th year of King Sejong's era. However, King Sejong did not perform his powerful domination right after his direct governing started. For, Sijonggushin (侍從舊臣: the government officials who served King Taejong early in King Sejong's era while King Taejong was still alive) still took their own positions in the political field. They were very bothersome to King Sejong who had to go for strengthening of king's power through the chance of his direct governing. King Sejong, therefore, had to break up the Sijonggushin based political composition and reconstruct the political field to perform more powerful king's power. Kim Do Ryeon's bribery case happened at this moment that asked for such requirement, and then it became a critical factor for political reconstruction early in King Sejong's era.
      'Kim Do Ryeon's Bribery Case' that was disclosed in the 8th year of King Sejong's era was a typical bribery case in which Kim Do Ryeon gave a number of servants to 17 existing and former government officials in order to take an advantage in the lawsuit related with the contestation on servants. This case included especially the core people who were involved in the power to implement personnel management and military management. Its political wave, therefore, could not help but have a big influence.
      The Kim Do Ryeon's bribery case got extended further due to King Sejong's pressing for fact finding, which helped King Sejong start to make the major people of Sijonggushin resign from their positions and seize the political leadership. First of all, he took the rights to implement personnel management and military management, and then reduced the reappointment period of the ministers of personnel management and military management by often changing them to restrain also the new officials' seizure of the personnel management right. After the Kim Do Ryeon's case, in addition, there was an important change also in the membership composition of Euijeongbu (議政府: the highest government officials' decision making organization in Joseon). Before this case, the membership of Euijeongbu was organized of most of meritorious retainers. This case, however, made the meritorious retainers all resign from their official positions, who were replaced with non-meritorious officials such as Hwang Hee, Maeng Sa Seong and etc. This means that the major power playing in the foundation age of Joseon left the highest decision making organization. As a result, King Sejong used this case to reconstruct the political field for being based on the king and started to seize the political leadership, based on which he could accelerate strengthening of king's power.
      King Sejong tried to reconstruct the political field by politically extending the Kim Do Ryeon's case. However, he handled and concluded this case in a way very different from the ways used by the former kings. He tried to change the power gradually from the bottom by making the government spirit reform stronger slowly. Under this tendency, Kim Do Ryeon's bribery case happened. He used this case to repel the members of Sijonggushin involved in this case from the center of power. The punishment to them was, however, concluded at 'the level of restraining the bribed government officials'. The judgment on this case did not go to any extreme edge while the major government officials were totally replaced because the logic of faith/non-faith was excluded from the case handling process. Later, therefore, they could get reinstated relatively smoothly. That is, King Sejong cut the logic of faith/non-faith used mainly until the life time of King Taejong and reduced extension of punishment as much as he could so that it could not be too severe. He just changed the political situation at the level of convicting of only the government officials' illegal actions and moral hazard. This means that the king's power maintaining style based on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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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崔承熙, "조선초기 정치사연구" 일조각 2002

      2 金成俊, "조선초기 贓吏子孫禁錮法의 성립, in: 한국중세정치법제사연구" 일조각 1985

      3 李秉烋, "조선초기 政局의 推移와 容軒 李原의 對應" 32 : 2004

      4 閔賢九, "조선 世宗代 초엽의 兩王體制와 國政運營" 22 : 2006

      5 鄭杜熙, "세종대 대간의 정치적 지위, in: 조선초기 정치세력연구" 일조각 1983

      6 姜芝嫣, "고려 우왕대(1374년~88년) 정치세력의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1995

      7 鄭杜熙, "黃喜, in: 조선시대 인물의 재발견" 일조각 1997

      8 閔賢九, "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 한국연구원 1983

      9 韓忠熙, "朝鮮初期 六曹와 統治體系" 啓明大學校 出版部 1998

      10 李樹健, "土姓의 分化, in: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1 崔承熙, "조선초기 정치사연구" 일조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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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李樹健, "土姓의 分化, in: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11 유재리, "世宗初 兩上統治期의 國政運營" 조선시대사학회 36 (36): 5-65, 2006

      12 "『朝鮮王朝實錄』 (太祖~世宗實錄) 『高麗史』 『高麗史節要』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容軒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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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7 0.98 2.253 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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