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애장왕대의 종묘개편에 반영된 지위 관념을 분석한 글이다. 애장왕대의 개편은 『예기정의』와 대력 14년(779)의 묘의를 참고하여 王肅의 설에 따라, 제후 5묘로서 二昭二穆의 친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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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홍 (경북대학교)
2020
Korean
애장왕 ; 오묘제 ; 천자 7묘 ; 태종 ; 황고 ; 황조 ; King Aejang ; Five Royal Shrine System (五廟制) ; Cheonja Seven Shrines (天子7廟) ; Taejong (太宗) ; Hwangjo (皇祖) ; Hwanggo(皇考)
KCI등재
학술저널
237-267(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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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애장왕대의 종묘개편에 반영된 지위 관념을 분석한 글이다. 애장왕대의 개편은 『예기정의』와 대력 14년(779)의 묘의를 참고하여 王肅의 설에 따라, 제후 5묘로서 二昭二穆의 친묘 4...
이 글은 애장왕대의 종묘개편에 반영된 지위 관념을 분석한 글이다. 애장왕대의 개편은 『예기정의』와 대력 14년(779)의 묘의를 참고하여 王肅의 설에 따라, 제후 5묘로서 二昭二穆의 친묘 4를 부묘하고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의 불훼묘를 소목의 수에서 별립한 것이었다. 두 대왕은 여전히 종묘에 모셔진 것이므로, 두 대왕의 별립을 근거로 원성왕계의 확립을 말하기 어렵다.
혜공왕대의 개편으로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大功德으로 대대로 허물지 않는 宗이 되었다. 이는 천자가 功德에 따라 祖宗을 세운 것과 같다. 신문왕 12년(692)의 태종 묘호 논쟁은 조종의 호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태종호에 반영된 천자의식은 혜공왕대의 개편으로 문무왕까지 확대되었다. 조종은 시조와 같은 불훼묘였는데, 이는 시조와 같은 공통의 조상이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원성왕은 ‘조종의 만파식적’을 계승할 수 있었고, 애장왕은 두 대왕을 계속 종묘에 모실 수 있었다.
皇祖, 皇考의 皇은 황제, 皇家를 의미한다. 이는 漢 宣帝가 皇考廟를 설립한 것과 唐 중종이 신룡 원년(705)에 종묘를 복원하며 皇家의 태묘, 皇考, 皇兄이라 표현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애장왕대에 친묘 4를 부묘한 것은 증조 할아버지인 원성왕과 함께 할아버지인 혜충대왕을 계속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섭정인 김언승은 개편을 통해 원성왕이 구축한 황가가 황조 혜충대왕과 황고 소성대왕으로 이어지는 것을 드러낼 수 있었다. 결국 애장왕대의 개편은 원성왕계라는 왕족의 확립이자 인겸계라는 근친 왕족의 분지화를 꾀한 것이라 하겠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text analyzes the Jongmyo reforms that occurred during the second year of the reign of King Aejang (801) and traces the concepts of rank reflected in the reforms. The reforms at the time referred to the discussion on the Jongmyo(廟議) in the 14...
This text analyzes the Jongmyo reforms that occurred during the second year of the reign of King Aejang (801) and traces the concepts of rank reflected in the reforms. The reforms at the time referred to the discussion on the Jongmyo(廟議) in the 14th year of dali(大曆) of Tang(779) and lijizhengyi(禮記正義) that follows Wang Su(王肅)'s interpretation. Therefore King Taejong and King Munmu were excluded from the number of zhaomu(昭穆). Placed the four shrines of blood relatives(親廟 4) means that the number of the ancestral tablet(廟數) was five royal shrines(諸侯五廟) of two of zhao(昭) and two of mu(穆). The two great kings still was placed the Jongmyo. Therefore it is hard to say that King Wonseong's bloodline was established because their tablet was located in another place.
During the reign of King Hyegong, King Taejong and King Munmu became the permanent ancestral tablet(宗) for their great achievements(大功德) in conquering Baekje and Goguryeo. This follows the logic of Giving the name 'Jojong(祖宗)' to ancestors with great achievements in the Cheonja seven shrine system. And Jojong means common ancestor. The dispute of The title Taejong in the 12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hinmun (692) was a conflict over the title of Jojong The title Jojong was extended to King Munmu due to the reform of King Hyegong's reign. This perception continued into the reign of Aejang.
Hwang(皇) in Hwangjo(皇祖) and Hwanggo(皇考) means emperor and Imperial Family. This can be seen through two things. One is that king Xuandi(宣帝) of Han(漢) built a Hwanggomyo(皇考廟). The other is the discussion on the Jongmyo(廟議) in the first years of Shenlong of Tang(705). It can be said that the reforms were made to maintain the permanent memorial tablets of the two kings, who were common ancestors, while at the same time keeping the memorial tablets of King Wonseong, who was the king's great-grandfather, and King Hyechung, who was the king's grandfather. In the end, through reform, the near-chin royal family called the lineage of Ingyeom(Hyechung) was established within the royal family called the lineage of King Won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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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이력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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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
2017-01-23 | 통합 | ||
2013-01-01 | 평가 |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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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79 | 0.79 | 0.74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72 | 0.66 | 1.364 | 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