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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조선 후기 일본사신 접대를 통해 본 朝日관계 - 差倭제도와 접대규정 변화를 중심으로 - = The Neighbor System at The reception to Japanese Envoys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Point of Change about The Reception Rules to Chawae and The System of Chaw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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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3687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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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ow Chawae(差倭), the representative diplomatic envoying during late Joseon, was established and institutionalized and how the reception rules changed. Chawae system was established along with the enforcement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ow Chawae(差倭), the representative diplomatic envoying during late Joseon, was established and institutionalized and how the reception rules changed.
      Chawae system was established along with the enforcement of Gyeomdaeje(兼帶制). Enforcing this system, they could reduce cost to receive envoys considerably as they had to receive Songsa(送使) nine times a year (later reduced to eight times) only from then. In the process that Gukwangsa(國王使) disappeared and Teuksongsa(特送使) was changed to trading envoys, however, Japan came up with new envoys exclusively in charge of diplomatic affairs, which offset reduced reception. The diplomatic envoys they came up with in this way were Byeolchawae(別差倭). Byeolchawae was dispatched under the name of treating all different diplomatic affairs and induced reception from Joseon. But on Joseon, it was a severe burden to receive all of them officially as diplomatic envoys. This is why they divided them into two kinds in consideration of the members, purpose of dispatch, or characteristics of envoying. In other words, Hyangjeopwigwan(鄕接慰官) built a system to receive diplomatic envoys having roles and functions similar to those of previous Teuksongsa while Gyeongjeopwigwan(京接慰官) did so for Byeolchawae corresponding to Gukwangsa.
      Meanwhile, centering around Waegwan, Chawae appeared to be exclusively in charge of diplomatic affairs, and they were Gwansuchawae(館守差倭). In the incident of adapting national document, Gwansuchawae was dispatched to be fully in charge of managing Waein in Waegwan. Later, Joseon came to recognize Gwansu and conclude treaties dealing with managing Waegwan or such. Until then, Gwansu was strongly diplomatic as the name of Gwansuchawae tells us, and Jeopwigwan was being received. In the process of moving Waegwan to Choryang, however, Gwansu came to be a practical manager of Waegwan and became received by Dongraebusa and Busancheomsa just like Yeonryesongsa.
      Tongsinsa dispatched in 1682 which was first after the move to Choryangwaegwan concluded treaties to reduce and reorganize existing Byeolchawae. In this process, the name of Jaepanchawae(裁判差倭) fully and generally in charge of diplomatic affairs started, and existing Byeolchawae were divided into Daechawae and Sochawae to reorganize the members and reception rules.
      But this kind of attempt was not very successful in reducing the burden. Therefore, Joseon tried to revise its reception system in connection to its policy to sweep away old abuses and led to concluding Yipye-treaty as Yeokjitongsin was right there at the moment. As a result, they could discontinue Jungjeoloseon(中絶五船) and abolish reception for Dojugohwanchawae and later even see fruition to reduce the days of reception for Daechaw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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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에서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외교사행이라 할 수 있는 差倭가 성립되어 제도화되는 과정과 접대규정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차왜제도는 兼帶制 시행과 맞물려 성립되었...

      본고에서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외교사행이라 할 수 있는 差倭가 성립되어 제도화되는 과정과 접대규정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차왜제도는 兼帶制 시행과 맞물려 성립되었다. 이 제도의 시행은 1년에 9차례 혹은 8차례의 送使船만 접대하면 되었기 때문에 사신 접대비용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國王使가 사라지고, 特送使가 무역 사신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일본측은 외교 문제를 전담하는 사신을 새로 만들어 내어 축소된 접대를 상쇄하였다. 이렇게 생성된 외교사신이 別差倭이다. 별차왜는 각종 외교현안을 명목으로 파견되어 조선측의 접대를 이끌어 내었다. 하지만 조선은 이들을 모두 공식적인 외교사행으로 접대하기에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때문에 사신의 구성과 파견 목적, 성격 등을 고려하여 두 부류로 구분하였다. 즉 기존에 특송사의 역할과 비슷한 성격을 지니는 외교사신은 鄕接慰官이, 국왕사에 준하는 성격의 별차왜는 京接慰官이 접대하는 제도를 마련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왜관을 중심으로 외교업무를 전담하는 차왜가 등장했는데, 館守差倭이다. 관수차왜는 국서개작사건 과정에서 왜관 내 왜인들의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이를 전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조선은 이후 館守를 인정해 주면서 왜관 관리 등의 내용을 담은 약조들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관수는 관수차왜라는 명칭에서도 드러나듯 외교적 성격이 강했고, 接慰官의 접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초량으로 倭館이 이전하는 과정에서 관수는 왜관의 실무관리자로 성격이 변화되면서 年例送使처럼 동래부사와 부산첨사의 접대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초량왜관으로 이전한 후 처음으로 파견된 1682년 通信使는 기존의 별차왜를 축소ㆍ재정비하는 약조를 체결하였다. 이 과정에서 외교업무를 총괄하여 전담하는 裁判差倭의 명칭이 시작되었고, 기존의 별차왜도 大ㆍ小差倭로 구분하여 구성원, 접대규정도 재정비하였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부담을 크게 완화시키지는 못하였다. 때문에 조선 내의 구폐를 시정하는 정책과 연계하여 접대 제도를 개편하고자 하였고, 마침 易地通信 과정과 맞물려 釐弊約條의 체결로까지 이어졌다. 결과 中絶五船의 중단 및 島主告還差倭의 접대가 폐지되었고 이후 대차왜의 접대일수를 줄이는 결과도 이루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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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통문관지"

      2 "증정교린지"

      3 양흥숙, "조선후기 동래 지역과 지역민 동향 : 왜관 교류를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대학원 2009

      4 이승민, "조선후기 대일통교무역의 폐해와 기사약조(1809)의 체결"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04

      5 양흥숙, "조선후기 대일 접위관의 파견과 역할" 24 : 72-, 2000

      6 "조선왕조실록"

      7 손승철, "조선시대 한일관계사연구-교린관계의 허와 실" 경인문화사 2006

      8 민덕기,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한ㆍ일관계" 경인문화사 2007

      9 홍우재, "동사록"

      10 허지은, "근세 왜관 館守의 역할과 도다 도노모(戶田賴毛)" 한일관계사학회 (48) : 171-222, 2014

      1 "통문관지"

      2 "증정교린지"

      3 양흥숙, "조선후기 동래 지역과 지역민 동향 : 왜관 교류를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대학원 2009

      4 이승민, "조선후기 대일통교무역의 폐해와 기사약조(1809)의 체결"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04

      5 양흥숙, "조선후기 대일 접위관의 파견과 역할" 24 : 72-, 2000

      6 "조선왕조실록"

      7 손승철, "조선시대 한일관계사연구-교린관계의 허와 실" 경인문화사 2006

      8 민덕기,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한ㆍ일관계" 경인문화사 2007

      9 홍우재, "동사록"

      10 허지은, "근세 왜관 館守의 역할과 도다 도노모(戶田賴毛)" 한일관계사학회 (48) : 171-222, 2014

      11 "邊例集要"

      12 "通航一覽"

      13 "裁判差倭謄錄"

      14 "東萊府接倭狀啓謄錄可考事目錄抄冊"

      15 정성일, "易地聘禮실시전후 대일무역의 동향" 15 : 16-19, 1991

      16 長正統, "日鮮關係におる記錄の時代" 50 (50): 76-77, 1968

      17 "同文彙考"

      18 "各司謄錄"

      19 "別差倭謄錄"

      20 "備邊司謄錄"

      21 이와가따, "1811年 對馬島 易地通信硏究 :기미책을 중심으로" 한일관계사학회 (23) : 123-174, 2005

      22 이혜진, "17세기 후반 조일외교에서의 裁判差倭성립과 조선의 외교적 대응" 8 : 1998

      23 홍성덕, "17세기 조ㆍ일 외교사행 연구" 전북대학교 1998

      24 이상규, "17세기 倭學譯官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91-9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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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0.52 0.52 0.5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5 0.67 1.012 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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