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향성과 의식의 분리에 관하여

국문 초록 (Abstract)

본 연구에서는 블락의 “인지적 의식(access consciousness 혹은 A-con)"과 ”현상적 의식(phenomenal consciousness, 혹은 P-con)의 구분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블락에 따르면, A-con은 P-con없이도 또한 P-con은 A-con없이도 발생할 수 있다. 후자의 예는 대화나 독서에 몰두하다가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나 밖에서 들려오는 공사 소음을 듣지 못하는 경우이다. 어느 순간 밖에서 공사하는 소리를 의식한다. 그러나 그 소리를 의식하기 이전에도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그 소리를 듣고는 있었다 (소음이 상당히 심했기 때문에). 관심이 공사 소음으로 옮아 갈 때 비로소 그 경험은 P-con이면서 동시에 A-con이 된다. 즉, 그 경험이 “어디선가 공사하고 있다”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블락의 A-con은 언어행위/사유 등 이성적 활동과 연관된 관계적인 성질이다. 즉, 어떤 상태가 A-con이라면 그 상태는 언어행위와 사유에 활용됨을 뜻한다.
P-con없는 A-con이 있는가? 맹시 환자(blindsight)는 시계(visual field)의 어떤 부분에 대해 아무런 시각 경험이 없다고 말한다. 그 부분은 완전히 검게 보인다. 그러나 여러 실험을 통해 밝혀진 사실은 그 부분에 놓여진 물체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냥 아무런 답이나 해보라도 했을 때 올바른 답을 제시한다. 즉, 화살이 위를 향하고 있을 때 상, 하, 좌, 우 선택지들 중에서 상을 25%보다 훨씬 높은 확률로 선택한다. 따라서 어떤 정보가 시각 기관을 통해 입수되기는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정보 상태는 맹시 환자의 경우 P-con이 없을 뿐 아니라, A-con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정보가 “화살이 위를 향하고 있다”는 생각을 유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블락은 보다 강화된 맹시 환자(Super-blindsight)를 상상한다. 이 경우엔 비록 P-con은 없으나 화살이 위를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다. 어제 밤에 생각하였던 문제의 해답이 아침에 갑자기 떠오르는 것처럼. 그러나 이렇게 강화된 맹시 환자도 A-con이라고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비록 그 정보 상태가 생각을 인과적으로 촉발은 하였으나, 그 정보 상태가 생각의 근거나 이유를 제공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경험이 인과적으로 판단과 연결되어 있으면 그 경험이 A-con이라고 하는 것은 블락이 의도한 A-con의 정의와 부합하지 않는다.
통상 우리의 지각 경험은 세계에 대한 판단의 이유를 제공한다. 내가 컵에 물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즉, A-con이 있기 위해 P-con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개입해야 한다. 나의 현상적 의식이 컵에 물이 있다는 외적 사태와 규칙적으로 연결이 되어있고 이러한 연결에 대한 지식에 기초하여 컵에 물이 있다는 판단에 도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특정한 방식에 대한 적절한 기술이 아니다. 우리의 현상적 의식은 컵에 물이 있다는 판단에 대한 즉각적인 근거를 제공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현상적 의식이 그것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외부 세계에 대한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게 아니고, 현상적 의식 자체가 직접적으로 인식론적 근거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과연 “컵에 물이 있다”는 내용의 판단이 가능한지도 의심스럽다. 최소한 어떤 경험적 내용의 경우 P-con은 A-con을 위해 본질적으로 개입해야 하고, 이러한 개입이 위의 맹시와 강화된 맹시 두 경우 모두 결핍되어 있다. P-con을 A-con과 분리시킬 경우 A-con이 제대로 이해될 수 없음을 보임으로서 지향성과 의식의 분리를 재고할 필요성을 논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