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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측 정보 자료를 통해 본 1920년대 金星淑의 활동 궤적과 사상 = The Trajectory of Kim Seong-suk’s Activities and thought in the 1920s through Information Materials from the Japanese Author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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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trajectory and thought of Kim Seong-suk’s activities in the 1920s by using information materials from the Japanese authorities.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I would like to analyze the thought of Kim Seong-suk by focu...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trajectory and thought of Kim Seong-suk’s activities in the 1920s by using information materials from the Japanese authorities.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I would like to analyze the thought of Kim Seong-suk by focusing on the reason why Kim Seong-suk chose Beijing, China as an overseas activity site, and focusing on the magazine “Revolution” in Beijing. In particular, it pointed out the problems of the research that had been centered on Kim Yong-chan and Yang Myung in the previous 󰡔Revolution󰡕, and this magazine demonstrated that Kim Seong-suk actively expressed his attention and argument as the main editor. In the process, the third volume of 󰡔Revolution󰡕 was newly introduced to academia.
      After Kim Seong-suk studied in Beijing, the first to appear in the Japanese documents is Kito Katsumi’s March 1925 report. After studying abroad in Beijing in early 1923, Kim Seong-suk took the lead in the student society in Beijing during 1924, and since 1925, with financial support from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and the Soviet embassy, ​​he published the magazine 󰡔Revolution󰡕. He presented his communist theories in this magazine.
      He moved to Guangzhou, which emerged as the center of the Chinese revolution in early 1926, and participated in the Chinese Communist Revolutionary Movement by preparing for the armed independence movement until December 1927. After the failure of Canton Uprising, he graduated from Sun Yat-sen University in 1928 and fled to Shanghai. In 1930, he returned to the Korean revolutionary society as a Japanese professor at Sun Yat-sen University.
      Although he was a communist theorist, he was convinced that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colonial Korea should be pursued according to a method suitable for the reality of Korea. He insisted that he should be in solidarity with the communists of the Soviet Union, China, and Japan, but that the central axis should be considered from the point of view of Korea in the colonial reality. For this reason, he was able to not fall into that dogma while believing in the theory of communism. Rather than representing the position of any one faction, he tried to find a strategy for a unified independence movement through discussion.
      Still, he was very confident in his movement until he took part in the 1927 Canton Uprising. He thought that only the armed struggle centered on the proletariat could bring independence, that the Chinese revolution was imminent, and that the Chinese revolution would succeed first, which would further strengthen 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Therefore, he actively participated in supporting the Chinese revolution. His convictions were so strong during this period that the abyss caused by the failure of the Canton Uprising would have been even deeper.
      On the other hand, the encounter with Hegel’s thought in the process of forming Kim’s ideology shows that he transformed from a monk to an independence activist, and that the derivation of the strategy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that regards violence as an art is not inconsistent with Buddhist values.
      To him, violence did not simply mean physical force to punish the enemy, but was perceived as a process that must be passed in order to be born anew, abandoning the past ‘conservative, passive, fatal, past-centric, male-centric, and feudal’ values. The driving force behind his independence movement was the belief that ‘destruction is the mother of creation’, and that an independent Korea should be created as a ‘new Korea’ that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the past.
      However, the failure of the Canton Uprising, the death of many Korean youths, and the meeting with a woman named Du Junhui are expected to bring about a new ordeal and a change of reflection and perception for him. This will be another research task in illuminating the life and thoughts of Kim Seong-s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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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연구는 일본 측 정보자료를 활용하여 독립운동가 김성숙의 1920년대의 활동 궤적과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3·1운동 후 김성숙이 국외의 활동지로서 중국 북경을 선택한 이유와 함께, 북...

      이 연구는 일본 측 정보자료를 활용하여 독립운동가 김성숙의 1920년대의 활동 궤적과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3·1운동 후 김성숙이 국외의 활동지로서 중국 북경을 선택한 이유와 함께, 북경에서 김성숙이 발간한 잡지 󰡔혁명󰡕을 주목하여 김성숙의 사상을 분석하고자 한다. 특히 종래 󰡔혁명󰡕을 김용찬과 양명을 중심으로 파악해온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 잡지는 김성숙이 주필로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의와 주장을 피력했다는 점을 논증했다. 그 과정에서 󰡔혁명󰡕 3호를 처음으로 발굴, 소개하였다.
      김성숙의 북경 유학 후, 일제 측 자료에 그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토 가츠미의 1925년 3월의 보고서이다. 김성숙은 1923년 초 북경에 유학한 후 1924년 중에는 북경유학생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1925년부터 중국공산당과 소비에트 대사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잡지 󰡔혁명󰡕을 발간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하여 자신의 공산주의 이론을 피력했다.
      1926년 초 중국혁명의 중심지로 부상한 廣東으로 이동하여 1927년 12월까지 무장독립운동을 준비하며 중국공산혁명운동에 가담했다. 광동봉기 실패 후 1928년 중산대학을 졸업하고 상해로 피신했다가 1930년에 다시 중산대학 일본어교수로 한인 혁명가 사회에 복귀했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가이면서도,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은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맞는 방법에 따라 추진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중국, 일본의 공산주의자들과 연대해야하지만, 어디까지나 중심축은 식민지 현실 속에 있는 조선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면서도 그 도그마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고, 어느 한 파의 입장을 대변하기보다 토론을 통해 통일된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1927년 광저우 봉기에 참여하기까지 자신의 운동노선에 큰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무산대중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만이 독립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며, 중국의 혁명은 임박했고, 중국의 혁명이 먼저 성공함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위한 역량도 한층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중국혁명 지원에 참여했다. 이 시기에 그의 신념은 매우 굳건했기 때문에 廣東 봉기의 실패로 인한 나락은 더욱 깊었을 것이다.
      한편, 김성숙의 사상 형성 과정에서 헤겔 사상과의 만남은 승려에서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점이나, 또한 폭력을 예술이라고 여기는 독립운동 방략 도출이 결코 불교적 가치관과 모순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에게 폭력이란 단순히 원수를 응징하기 위한 물리적 힘을 의미한다기 보다, 과거의 ‘보수적, 소극적, 숙명적, 과거 중심적, 남성 중심적, 봉건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 태어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그야말로 ‘파괴야말로 창조의 어머니’이며, 독립된 조선은 과거의 조선과 전혀 다른 ‘새로운 조선’으로 창조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그의 독립운동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廣東 봉기의 실패, 수많은 조선 청년들의 죽음, 그리고 두군혜라는 여인과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시련이자 반성과 인식의 전환을 불러일으켰을 것이 예상된다. 이는 김성숙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는 데에 있어서 또 다른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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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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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장세윤, "중국공산당의 광주봉기와 한인 청년들의 활동" 수선사학회 (24) : 215-245,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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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허장환) 신문조서, 경성지방법원 형사사건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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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6-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5-05-20 학술지등록 한글명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외국어명 : JOURNAL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TUDIES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4-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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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9 0.59 0.6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4 0.62 1.442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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