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1950~1970년대 한국의 무의촌 문제가 징병제와 밀착하는 흐름 속에서 대안을 모색한 양상을 검토하였다. 20세기 후반 한국의 보건의료는 식민지의 유제로 남겨진 인력 부족, 도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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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Abstract)
본 논문은 1950~1970년대 한국의 무의촌 문제가 징병제와 밀착하는 흐름 속에서 대안을 모색한 양상을 검토하였다. 20세기 후반 한국의 보건의료는 식민지의 유제로 남겨진 인력 부족, 도시 편...
본 논문은 1950~1970년대 한국의 무의촌 문제가 징병제와 밀착하는 흐름 속에서 대안을 모색한 양상을 검토하였다. 20세기 후반 한국의 보건의료는 식민지의 유제로 남겨진 인력 부족, 도시 편재의 문제에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점증한 군의관 대거 징집의 흐름이 더해지며 이중의 난관을 마주하였다. ‘무의촌’은 그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된 문제적 기표로, 그 자체로 지방 농어촌의 만성적인 의료 위기를 상징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징병제의 제약을 역으로 활용하여 무의촌 위기의 타개책으로 삼는 방안을 타진했다. 군의관을 무의촌에 고정 배치하여 보건의료망의 사각을 메꾼 움직임이 그 첫 걸음이었으며, 이는 의사를 무의촌에 투입하는 대신 병역을 면제하는 구상으로 발전하였다. 마침내 의료계는 5.16 쿠데타 이후 단행된 네 차례의 의사 동원을 결정적 계기로 하여 보건의료-병역 대체 논의를 공론화하며 그 논리를 확충하였다. 이는 1970년대에 이르러 지금의 공중보건의사 제도 수립로 귀결되었다. 여건의 측면에서는 타 부문의 병역 대체 도입이, 동력의 측면에서는 정부와 의료계를 아우른 외연 확장이 그를 뒷받침했다. 이로써 사반세기에 걸친 한국의 무의촌 위기는 징병제를 제도적 기반으로 삼아 타개의 국면에 진입하였다. 징병제와의 착종을 고유의 특징으로 내재한 한국적 보건의료의 일면이었다. 단, 최소 재정의, 동원 기반의 지방의료를 고착화한 점에 주목하면, 한국 보건의료의 또다른 한계를 주조해온 측면도 함께 사유할 필요가 있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article reviews how the crisis of doctorless villages in South Korea in the 1950s-70s was closely linked to the conscription system. In the second half of the 20th century, the public health system of South Korea faced a double challenge: one was...
This article reviews how the crisis of doctorless villages in South Korea in the 1950s-70s was closely linked to the conscription system. In the second half of the 20th century, the public health system of South Korea faced a double challenge: one was the colonial legacy of a medical shortage and urban concentration, the other was a massive conscription of military doctors after the Korean War. The term ‘doctorless village’ was a problematic signifier that reflected these historical contexts. It itself symbolized the chronic medical crisis in rural areas. However, behind the crisis, the idea of reversing the constraints from conscription and using it as a solution of doctorless villages was germinating. At first, the Ministry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planned two alternative conceptions to fill the gaps in the public health network. One was to station military doctor in doctorless villages and the other was to dispatch civilian doctors in doctorless villages and exempt them from military service. After a series of doctor mobilizations since the May 16 coup, the medical community generally agreed with the conception and publicized it themselves. They developed arguments of alternative services by public health work and strengthened its logics. By the 1970s, the conception culminated in the establishment of the current Public Health Doctor system. In terms of condition and momentum, not only the introduction of alternative service in other sectors, but also the extension of the consensus among the government and medical community accelerated this trend. As a result, the doctorless village crisis in South Korea, which had been a critical issue for a quarter of a century, entered a phase of resolution by utilizing the conscription system as its institutional foundation. It was an aspect of the ‘Korean’ public health system characterized by the entanglement with conscription. It is also necessary to consider that it has imposed another limitation on medical care in rural areas by institutionalizing the public health system relying on mobilization and minimum budget, th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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