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20년대 항일민족전선 좌파의 독립운동가로 중국 상해에서 줄곧 활동했던 현정건의 생애와 활동내역을 추적하여 그 전모를 구명하고 성격과 의미 파악까지 시도해 본 연구작업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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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대구대학교)
2012
Korean
현정건 ; 현상건 ; 고려공산당 ; 상해파 ; 개조파 ; 청년동맹회 ; 임시의정원 ; 민족유일당운동 ; 한중연대 ; Hyun Jeong-gun ; Hyun Sang-gun ; the Korean Communist Party ; Shanghai faction ; Kaezoh[Reconstructionist] group ; the Korean Young Men’s Confederation in Shanghai ; the Korean Provisional Assembly ; the One-and-only national party movement ; Sino-Korean solidarity
KCI등재
학술저널
149-198(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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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20년대 항일민족전선 좌파의 독립운동가로 중국 상해에서 줄곧 활동했던 현정건의 생애와 활동내역을 추적하여 그 전모를 구명하고 성격과 의미 파악까지 시도해 본 연구작업의 ...
이 글은 1920년대 항일민족전선 좌파의 독립운동가로 중국 상해에서 줄곧 활동했던 현정건의 생애와 활동내역을 추적하여 그 전모를 구명하고 성격과 의미 파악까지 시도해 본 연구작업의 결과물이다.
1893년 대구에서 중인가계의 지방관의 아들로 태어난 현정건은 1910년 결혼 당년에 상해로 가서 재종형 현상건의 후견 하에 영어를 공부하여 통관업자로 일하였다. 반일친러파 망명객이던 현상건이 일제에 굴복하여 점차 변절해가는 모습을 보임에 그와 관계를 끊은 현정건은 1919년에 독립운동의 장으로 들어섰다.
운동행로의 초기부터 현정건은 사회주의계열 조직들에 몸담아 활동하였다. 1920년 한국공산당에 가담하였고, 1921년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당에 참여한 후 이동휘ㆍ김립의 측근이 되어 활동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개조파 지도부의 일원으로 활약하였고, 1924년에는 좌우합작 조직인 청년동맹회의 위원급 간부가 되어 대동통일운동을 막후 지도하였다. 그 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된 임시정부개조운동에 주력하여, 관련 개혁안들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발의했으며, 대한교민단 간부로도 활동하였다. 청년동맹회가 사회주의 운동노선을 재차 전면화시킨 1925년에는 그 선전계몽활동을 선도하였다. 1926년부터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 국면에서도 그는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와 관내촉성회연합회의 집행위원으로 거푸 선임되면서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1924년부터 고등보수학원, 삼일공학 등의 한인유학생 교양ㆍ지도기관에서 영어교사로 봉직했고, 1926~1927년에는 한인청년들의 중국 대학ㆍ군관학교 입학자격 심사 업무를 위임받아 주관했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후세대 간부 양성과 민족혁명운동의 한중연대 조성에 기여하는 성질의 일들이었다.
이렇듯 다방면으로 활동하던 현정건은 1928년 봄에 중국국민당 반공쿠데타 정권의 좌파탄압 형세를 이용한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 압송되었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 징역형이 선고되어 험한 옥고를 겪었다. 1932년 6월에 만기 출옥한 그는 그해 연말에 돌연 병사하여, 마흔 살 나이로 생을 마쳤다.
현정건은 자타 공인의 사회주의자였고, 상해지방의 민족전선 좌익 대오를 이끌고 간 중심인물군의 한 명이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전일적 좌파조직보다 좌우합작 조직들에서 중책을 맡아 더욱 돋보이는 역할들을 수행하였다. “공산주의운동이 독립운동이요, 독립운동이 공산주의운동”이라는 신조로 그는 시종일관 꿋꿋한 혁명가적 자세와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러기에 현정건은 민족독립 달성과 근대국가 건설의 과제를 껴안고서 사회주의 사상과 노선에 기대어 분투했던 전형적 민족혁명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고, 그렇게 기억됨이 온당한 것이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this paper, the author tried to trace and clarify the overall life-course and activities of a Korean revolutionary, Hyun Jeong-gun, who had lived in Shanghai throughout 1920s and acted on the anti-Japanese national front. Several findings and their...
In this paper, the author tried to trace and clarify the overall life-course and activities of a Korean revolutionary, Hyun Jeong-gun, who had lived in Shanghai throughout 1920s and acted on the anti-Japanese national front. Several findings and their implications are summarized as follows.
Born in a middle-stratum family of Daegu in 1893, Hyun attended middle school in Seoul, and left for China in 1910. He studied English in Shanghai and got a job in customs clearance. Much disappointed with a pro-Japanese defection of Hyun Sang-gun, his cousin and a respected anti-Japanese exile, he entered the stage of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by himself in 1919.
From the very beginning of a new career, Hyun joined successively the political organizations of explicitly or mainly a socialist line, such as the Korean Communist Party(1920), the Shanghai faction of that party(1921), the Kaezoh[Reconstructionist] group at the National Representatives Conference(1923), and the Korean Young Men’s Confederation in Shanghai(1924; KYMCS). In each case, he acted as an executive or a leader behind the curtain.
Also in 1924, he tried with KYMCS’s comrades to realize a unification of the national front regardless of right or left wing affiliation. Thus he propelled, as a representative in the Korean Provisional Assembly, to reform the organization of the Government, looking forward to its really being transformed into the assumed supreme institution of the unified national front.
In 1927, he was elected twice as an executive of the new organizations for building up of the one-and-only national party, and leadingly participated in that movement at least within the region of mainland China. And yet, he was unfortunately arrested by the Japanese police in 1928, and was sentenced to 3 years of jailing. At the end of the year of 1932, and six months after release from prison, he died of sudden illness, and thus ended his own life at the age of 40.
Hyun Jeong-gun was certainly a recognized socialist, and was a member of some central figures who guided and led the leftist ranks of the national front in Shanghai. However, it was more in left-and-rightist joint organizations than in purely and fully leftist ones that he was entrusted with heavy responsibilities and took important roles. He maintained then consistently a firm posture and straight walks of action, with a belief that “the communist movement is national independence one, and vise versa.” In short, it is reasonable that he should be appreciated and memorized as a typical revolutionary who fought hard for achievement of national independence and modern state building through socialist visions and l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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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신탁통치 문제의 로컬리티 -해방직후 재일조선인 사회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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