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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초기 방어실태와 성주(星州) 전투 = The Status of Defense at the Initial Period of Imjin-War(壬辰倭亂) and the Seongju (星州) Comb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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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조선은 위화도 회군이라는 군사 쿠데타를 계기로 성립한 나라이기 때문에 역대 국왕들은 군사 문제에 대단히 예민하였다. 특히 태종은 병권을 권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하고 국왕의 병권 독...

      조선은 위화도 회군이라는 군사 쿠데타를 계기로 성립한 나라이기 때문에 역대 국왕들은 군사 문제에 대단히 예민하였다. 특히 태종은 병권을 권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하고 국왕의 병권 독점을 확고히 하기 위해 사병제를 혁파하고 공병제를 확립하였으며, 장군과 군인 간의 사적 관계를 철폐하였다. 그리고 이후 조선 정부에서는 군대를 평시체제와 전시체제로 구분하여, 평시체제의 지휘관은 전시에는 자신이 평소 선발하고 훈련한 군대를 통솔할 수 없고, 중앙에서 별도로 임명한 지휘관으로 하여금 그 군대를 통솔하도록 하였다. 이에 전시체제 지휘관은 전시에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군대를 데리고 전장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전시체제 지휘관에는 국왕이 가장 신임하는 대신이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전시체제를 유성룡이 ‘제승방략’이라고 잘못 칭하면서 오해가 발생하였다. 즉 그는 진관체제가 변하여 제승방략이 되어 임진왜란 초기에 패배하였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오해였다. 진관체제는 평시체제로서 제승방략이라고 말한 전시체제와는 차원이 다른 체제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초기 방어 체제와 관련하여 북상하는 일본군을 피해 정신없이 피난 가는 조정으로부터 어떠한 특별한 조치가 내려오지 않는 상태에서 전라도와 경상우도의 대응 태세는 사뭇 달랐다. 전라도는 평시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로써 전시 상황에 대처하였다. 원래는 평시체제의 지휘관이 전시에 자기 휘하의 군대를 통솔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부에서 전시체제의 지휘관을 내려 보내지 않자 평시체제의 지휘관인 전라감사가 전라도 진관군사들을 직접 통솔하였던 것이다. 이에 전라감사 이광은 전라도 군사를 이끌고 용인까지 북상하여 왕명을 기다리다가 전투에서 패배를 겪기도 하지만, 다시 전라도 지역에 들어와서는 자신의 관할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군의 진입을 격퇴하는 쾌거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에 반해 경상도에서는 임진왜란 초기 전투에서 평시체제와 전시체제가 모두 붕괴됨에 따라 각처의 사족들이 의병장이 되어 산졸(散卒)들을 수습하여 왜적 퇴치에 나섰다. 그런데 이러한 의병 조직은 전시체제와 유사한 형태를 띠었다. 즉 정부에서 파견된 전시체제의 지휘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의병장들이 전시체제의 지휘관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면서 왜적을 퇴치하였던 것이다. 경상우도의 예를 들면, 김면, 곽재우, 정인홍 등 세 명의 의병 대장이 담당 구역을 나누어 해당 군현의 군사를 통합하여 작전을 수행하는 전시체제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의병 조직의 내부 모습도 의병장 아래 참모장, 선봉장, 복병장, 돌격장, 좌부장, 우부장 등 여러 직책을 두었는데, 현직 관리가 이 직책에 참여하고 있었다. 즉 전라도는 평시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임란에 대처하였고, 경상우도는 변형된 전시 체제를 갖추어 왜적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성주 전투와 관련해서는 지금까지 이형석의 『임진전란사』에 따라 3차례 전투가 있었다고 알려져 왔다. 성주 전투를 다룬 책이나 논문에서도 대체로 3차례 성주 전투가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난중잡록』을 살펴보면 성주 전투는 3차례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성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무려 18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 와중에 수많은 의병들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성주성에서 일본군을 몰아내었다. 그런데 성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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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As Chosun was a country founded with the military coup caused by Wihwado(威化島) Retreat as a chance, the kings of the country throughout the history were quite sensitive about the employment of the military. Particularly, Taejong(太宗) regarded ...

      As Chosun was a country founded with the military coup caused by Wihwado(威化島) Retreat as a chance, the kings of the country throughout the history were quite sensitive about the employment of the military. Particularly, Taejong(太宗) regarded military power as the source of authority and abolished the private miliary system but established the public one in order to make the king’s monopoly of the military power firmly, and he also abolished the private relations between the general and soldiers. Later, Chosun government divided the military organization into peace and war footings and did not allow the commander of the peace footing to lead the military that he had selected and trained himself during the war and allowed the commander appointed additionally by the center to command the military.
      Concerning the defense system at the initial period of Imjin-war, Jeolla-do(全羅道) and Gyeongsangwu-do(慶尙右道) dealt with it quite differently. Jeolla coped with the wartime situations while maintaining the peace footing. Originally, the commander of the peace footing was not allowed to lead the military under his command during the war. In the urgent situation, however, as the government did not send the commander of the war footing, Jeolla’s governor, the commander of the peace footing, did command and control the troops and soldiers. In Gyeongsangwu-do, however, as both peace and war footings collapsed at the early period of Imjinwaeran, sajok(士族) from all different places became the forces leader and collected the scattered soldiers to go out to drive away the Japanese invaders. Yet, that forces organization was similar to that of the war footing.
      About the Seongju(星州) Combat, it has been known that it took place three times, but according to 『Nanjungjaprok(亂中雜錄)』, those three times were not all. To recover Seongju Seong(星州城), either large or small combats had developed up to 18 times. In the meantime, a lot of righteous armies were sacrificed. The righteous armies’ activity was even more noticeable in Gyeongsangwu-do than in Jeolla-do. As one of the reasons for that, we can point out the fact that peace and war footings both collapsed in Gyeongsang and also solidarity among sajok(士族) and their control over the people were stronger there than in Jeo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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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龍蛇日記"

      2 "亂中雜錄"

      3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체제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4 송정현, "조선사회와 임진의병 연구" 학연문화사 1998

      5 김경태, "임진전쟁 초기 이광의 활동과 용인전투에 대한 재고" 역사연구소 (89) : 01-32, 2016

      6 이형석, "임진전란사" 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1974

      7 최영희, "임진왜란중의 사회동태–의병을 중심으로-" 한국연구원 1975

      8 신윤호, "임진왜란기 성주전투와 일본군의 동향" 호남사학회 (53) : 77-103, 2014

      9 조원래, "임진왜란과 호남지방의 의병항쟁" 아세아문화사 2001

      10 임진왜란사연구회, "임진왜란과 전라좌의병" 보고사 2011

      1 "龍蛇日記"

      2 "亂中雜錄"

      3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체제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4 송정현, "조선사회와 임진의병 연구" 학연문화사 1998

      5 김경태, "임진전쟁 초기 이광의 활동과 용인전투에 대한 재고" 역사연구소 (89) : 01-32, 2016

      6 이형석, "임진전란사" 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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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임진왜란사연구회, "임진왜란과 전라좌의병" 보고사 2011

      11 김강식, "임진왜란과 경상우도의 의병운동" 혜안 2001

      12 하태규,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 관군의 동향과 호남방어" 한일관계사학회 (26) : 147-180, 2007

      13 김종수, "임진왜란 초기 방어실태와 웅치·이치 전투" 전북사학회 (51) : 335-364, 2017

      14 김진수,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조선군의 대응양상에 대한 검토-경상좌병사 박진(朴晉)과 권응수(權應銖)의 활동을 중심으로 -"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84) : 1-27, 2012

      15 노영구, "임진왜란 초기 경상우도 의병의 성립과 활동 영역 - 김면(金沔)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 한국역사연구회 (64) : 33-64, 2007

      16 이호준,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 지역 전투와 군사체제"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77) : 117-181, 2010

      17 하태규, "임진왜란 초 호남지방의 실정과 관군의 동원실태" 역사문화학회 16 (16): 37-72, 2013

      18 전북사학회, "임진왜란 웅치전투와 이치전투" 전라북도 완주군 2017

      19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임란의병사의 재조명" 안동시·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2012

      20 조원래, "새로운 관점의 임진왜란사 연구" 아세아문화사 2005

      21 고석규, "내암 정인홍의 의병활동" 2 : 1992

      22 정현재, "경상우도 임진의병의 전적 검토 – 김면·정인홍 의병군단을 중심으로" 17 : 1995

      23 "燃藜室記述"

      24 "朝鮮王朝實錄"

      25 "懲毖錄"

      26 "征蠻錄"

      27 "寄齋史草"

      28 "孤臺日錄"

      29 "壬辰錄"

      30 노영구, "壬辰倭亂 초기 양상에 대한 기존 인식의 재검토 - 和歌山縣立博物館 소장 「壬辰倭亂圖屛風」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31) : 169-197, 2003

      31 "壬亂日記"

      32 "來庵集"

      33 김종수, "Ⅰ-4. 군역제도의 붕괴" 국사편찬위원회 28 : 1996

      34 김종수, "16세기 갑사의 소멸과 정병입역의 변화" 32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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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7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7-10-23 학회명변경 영문명 : 미등록 -> Military History Institute, MND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6-06-29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미등록 -> military history KCI등재후보
      2006-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4-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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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9 0.69 0.62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3 0.6 1.024 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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