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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ㆍ18 민중항쟁과 김대중 = The May 18th Gwangju Democratic Uprising and Kim Dae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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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May 18th Gwangju Democratic Uprising was first started by students in front of the gate of Chonnam University on the morning of May 18th in 1980. The students' demonstration against the May 17th coup d'état of the New Military Power developed into the democratic uprising by the citizens' participation. The citizens' participation occurred against the coup d'état of the New Military Power, and against the indiscriminate murder and brutal suppression of soldiers.
      Kim Dae Jung was suppressed severely by Park Jung Hee dictatorship since the president election of 1971. Likewise, the province of Chonnam, including Gwangju city, were discriminated by Park Jung Hee regime. and the province of Chonnam had lagged far behind the other areas in industry.
      Kim Dae Jung got great support from the progressive intellectuals and masses since 1970s. But Kim Dae Jung was arrested by the New Military Power on May 17, 1980. The New Military Power tried him to put to death on suspicion of agitation of the Gwangju Uprising. Kim dae Jung was one of the greatest victims of the Gwangju Uprising.
      The Gwangju citizens became angry at the coup d'état of the New Military Power, at the indiscriminate murder and brutal suppression of soldiers toward students, and at the arrest of Kim Dae Jung. Kim Dae Jung was not in Gwangju during the Gwangju Uprising. He didn't know the Gwangju Uprising until July 10. Nevertheless, most of Gwangju citizens thought of him during the Gwangju Uprising, and they shouted slogan: "Release Kim Dae Jung!" Consequently, Kim Dae Jung was with Gwangju citizens during the Gwangju Uprising. He was not the direct background and cause of the outbreak of the Gwangju Uprising. However, he was a very important element at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Gwangju Uprising.
      After Gwangju Uprising, Honam masses and Kim Dae Jung tried to find out the truth of the Gwangju Uprising, to retrieve the honor of the victims, and to punish Jun Doo Hwan and his followers. In conclusion, Kim Dae Jung had a special connection with the Gwangju Upri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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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May 18th Gwangju Democratic Uprising was first started by students in front of the gate of Chonnam University on the morning of May 18th in 1980. The students' demonstration against the May 17th coup d'état of the New Military Power developed int...

      The May 18th Gwangju Democratic Uprising was first started by students in front of the gate of Chonnam University on the morning of May 18th in 1980. The students' demonstration against the May 17th coup d'état of the New Military Power developed into the democratic uprising by the citizens' participation. The citizens' participation occurred against the coup d'état of the New Military Power, and against the indiscriminate murder and brutal suppression of soldiers.
      Kim Dae Jung was suppressed severely by Park Jung Hee dictatorship since the president election of 1971. Likewise, the province of Chonnam, including Gwangju city, were discriminated by Park Jung Hee regime. and the province of Chonnam had lagged far behind the other areas in industry.
      Kim Dae Jung got great support from the progressive intellectuals and masses since 1970s. But Kim Dae Jung was arrested by the New Military Power on May 17, 1980. The New Military Power tried him to put to death on suspicion of agitation of the Gwangju Uprising. Kim dae Jung was one of the greatest victims of the Gwangju Uprising.
      The Gwangju citizens became angry at the coup d'état of the New Military Power, at the indiscriminate murder and brutal suppression of soldiers toward students, and at the arrest of Kim Dae Jung. Kim Dae Jung was not in Gwangju during the Gwangju Uprising. He didn't know the Gwangju Uprising until July 10. Nevertheless, most of Gwangju citizens thought of him during the Gwangju Uprising, and they shouted slogan: "Release Kim Dae Jung!" Consequently, Kim Dae Jung was with Gwangju citizens during the Gwangju Uprising. He was not the direct background and cause of the outbreak of the Gwangju Uprising. However, he was a very important element at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Gwangju Uprising.
      After Gwangju Uprising, Honam masses and Kim Dae Jung tried to find out the truth of the Gwangju Uprising, to retrieve the honor of the victims, and to punish Jun Doo Hwan and his followers. In conclusion, Kim Dae Jung had a special connection with the Gwangju Upri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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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1980년 5월 18일 전남대생들의 시위는 1980년 봄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했다. 학생들의 시위는 민주정부 수립을 좌절시킨 신군부의 5ㆍ17 계엄확대조치와 계엄군의 야만적 진압행위로 인해 시민들의 참여를 촉발시켰고, 마침내 항쟁으로 발전했다.
      김대중은 5ㆍ18현장에 없었다. 그와 5ㆍ18 현장을 연결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당연히 김대중은 항쟁의 주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시위 현장에서 ‘김대중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김대중은 사실상 학생ㆍ시민들과 함께 있었다.
      김대중과 광주시민들의 결합은 지역적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이다. 호남지역은 박정희 정권의 인사 및 경제개발정책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 박정희 독재정부가 사라진 1980년 호남인들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호남인들은 자연스럽게 민주화운동 지도자이자 동향인인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5ㆍ17쿠데타로 인해 김대중이 체포되었고, 민주정부 수립도 무산되었다. 호남인들의 실망과 분노가 클 수밖에 없었다.
      5ㆍ18항쟁이 김대중의 사주에 의해 발생했다는 신군부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완전히 조작된 것이다. 다른 한편 신군부가 자신을 체포한 것이 5ㆍ18항쟁 발발의 가장 큰 요인과 배경이라는 김대중의 주장 역시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김대중은 항쟁의 전개과정에서 항쟁을 증폭시킨 주요한 변수 중 하나였다고 정의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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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 18일 전남대생들의 시위는 1980년 봄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했다. 학생들의 시위는 민주정부 수립을 좌절시킨 신군부의 5ㆍ17 계엄확대조치와 계엄군의 야만적 진압행위로...

      1980년 5월 18일 전남대생들의 시위는 1980년 봄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했다. 학생들의 시위는 민주정부 수립을 좌절시킨 신군부의 5ㆍ17 계엄확대조치와 계엄군의 야만적 진압행위로 인해 시민들의 참여를 촉발시켰고, 마침내 항쟁으로 발전했다.
      김대중은 5ㆍ18현장에 없었다. 그와 5ㆍ18 현장을 연결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당연히 김대중은 항쟁의 주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시위 현장에서 ‘김대중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김대중은 사실상 학생ㆍ시민들과 함께 있었다.
      김대중과 광주시민들의 결합은 지역적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이다. 호남지역은 박정희 정권의 인사 및 경제개발정책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 박정희 독재정부가 사라진 1980년 호남인들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호남인들은 자연스럽게 민주화운동 지도자이자 동향인인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5ㆍ17쿠데타로 인해 김대중이 체포되었고, 민주정부 수립도 무산되었다. 호남인들의 실망과 분노가 클 수밖에 없었다.
      5ㆍ18항쟁이 김대중의 사주에 의해 발생했다는 신군부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완전히 조작된 것이다. 다른 한편 신군부가 자신을 체포한 것이 5ㆍ18항쟁 발발의 가장 큰 요인과 배경이라는 김대중의 주장 역시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김대중은 항쟁의 전개과정에서 항쟁을 증폭시킨 주요한 변수 중 하나였다고 정의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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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김만흠, "한국정치의 재인식 : 민주주의 지역주의 지방자치" 풀빛 1997

      2 나간채, "한국의 5월운동" 도서출판 한울 2011

      3 정경환, "한국 현대정치사 연구" 신지서원 2000

      4 남영신, "지역패권주의 연구" 학민사 1992

      5 James D. Wilkinson, "지식인과 저항: 유럽, 1930-1959년" 문학과 지성사 1984

      6 곽결호, "지속가능한 국토와 환경" 법문사 2011

      7 전남사회운동협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광주5월민중항쟁의 기록" 도서출판 풀빛 1985

      8 국토개발연구원, "제2차국토종합개발계획 제2편 인구정착기반의 조성" 1992

      9 최영진, "정체성의 정치학" 1 (1): 2001

      10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풀빛 1999

      1 김만흠, "한국정치의 재인식 : 민주주의 지역주의 지방자치" 풀빛 1997

      2 나간채, "한국의 5월운동" 도서출판 한울 2011

      3 정경환, "한국 현대정치사 연구" 신지서원 2000

      4 남영신, "지역패권주의 연구" 학민사 1992

      5 James D. Wilkinson, "지식인과 저항: 유럽, 1930-1959년" 문학과 지성사 1984

      6 곽결호, "지속가능한 국토와 환경" 법문사 2011

      7 전남사회운동협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광주5월민중항쟁의 기록" 도서출판 풀빛 1985

      8 국토개발연구원, "제2차국토종합개발계획 제2편 인구정착기반의 조성" 1992

      9 최영진, "정체성의 정치학" 1 (1): 2001

      10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풀빛 1999

      11 이영진, "오월과 애도의 정치 : 죽은 자와 어떻게 만나야 할 것인가" 전남대학교 5ㆍ18연구소 2012

      12 김영택, "실록 5ㆍ18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1996

      13 정해구, "사료편찬위,5ㆍ18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5ㆍ18사료편찬위원회 2001

      14 나의갑, "사료편찬위,5ㆍ18민중항쟁" 도서출판 고령 2001

      15 하홍규, "분노를 보다-감정과 사회적 맥락" 6 : 2013

      16 김영미, "분노 감정의 정치학과 『제인 에어』" 한국근대영미소설학회 19 (19): 33-62, 2012

      17 "동아일보"

      18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1" 삼인 2011

      19 최영태, "극우 반공주의와 518광주항쟁" 호남사학회 (26) : 113-146, 2006

      20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5월민중항쟁사료선집" 풀빛 1990

      21 박만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재조명 : 1980, 90년대 신군부와 김대중을 중심으로" 전남대학교 5ㆍ18연구소 2011

      22 김상봉, "[5.18연구]응답으로서의 역사-5.18을 생각함-" 5.18연구소 6 (6): 139-156, 2006

      23 김홍국, "5ㆍ18의 제도화 과정과 김대중" 전남대학교 5ㆍ18연구소 2011

      24 박찬승, "5ㆍ18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5ㆍ18사료편찬위원회 , 사료편찬위 2001

      25 이광일, "5ㆍ18민중항쟁과 현재, 그리고 김대중 : ‘정치사회학적 입장’에서" 전남대학교 5ㆍ18연구소 2011

      26 이종범, "5ㆍ18민중항쟁과 정치ㆍ역사ㆍ사회: 2. 5ㆍ18항쟁의 원인과 배경" 5ㆍ18기념재단 2007

      27 김동욱, "5ㆍ18민중항쟁과 정치ㆍ역사ㆍ사회: 2. 5ㆍ18항쟁의 원인과 배경" 5ㆍ18기념재단 2007

      28 박명서, "5ㆍ18민중항쟁과 법학" 5ㆍ18기념재단 2006

      29 광주광역시5ㆍ18사료편찬위원회, "5ㆍ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1997

      30 최영태, "5ㆍ18 그리고 역사: 그들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의 나라로" 도서출판 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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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6-06-10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전남사학 -> 역사학연구 KCI등재
      2006-03-21 학회명변경 한글명 : 전남사학회 -> 호남사학회
      영문명 : Chonnam Historical Association -> Honam Historical Assoc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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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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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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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8 0.68 0.6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3 0.6 1.183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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