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기독자에게 있어서나 비 기독자에게 있어서나 이 세계는 동일한 하나의 세계이다. 과거에는 기독교 세계(Christendom)와 이방세계(Heathendom)를 구별하여 기독교의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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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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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기독자에게 있어서나 비 기독자에게 있어서나 이 세계는 동일한 하나의 세계이다. 과거에는 기독교 세계(Christendom)와 이방세계(Heathendom)를 구별하여 기독교의 선교운동은 후자에서만 실천될 수 있고 또 그것은 필연적으로 “외국”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기독교의 황금시대는 지나갔다. 본래부터 기독교 세계, 혹은 기독교 문명(Corpus Christianum)이란 실지로 없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더욱 그런 망상(妄想)을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은 선교사업의 시대로부터 에큐메니칼의 시대로 진입(進入)하게 되었다. 전자가 확장(Expansion)의 시대라고 하면 후자는 “전체성”(Wholeness)의 시대이다. “전체적인 복음을 전체교회가 세계에!”(The whole church - the wole gospel - the whole world)라는 것이 이 시대의 그리스도교회의 공동과제가 되었다. 성격은 우리에게 일러주기를 우리 기독자는 이 세계 안에 있으며, 또한 이 세계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준다. 기독자는 그 자신을 이 세계에서 분리시키거나, 이 세계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살기 위하여 창조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특권적인 전망(展望)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극심한 교만은 없다. 다만 우리는 아무도 번개할 수 없는 두가지의 필연성 사이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즉,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을 덜 죄악적이 되게 할 수도 없고, 다른 면으로는 이 세상을 현실 그대로 받아 들일 수도 없는 그런 디렘마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매우 불안스러운 시츄에이션이기는 하지만은, 그러나 이것만이 이 세계 안에 있는 기독자에게 있어서 결실있는 행위를 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입장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계를 심판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고난받으시는 종”(The suffering servant)으로서 세상에서 살으신 그 생활을 본받아서 이 세계와 완전한 Identification을 이루어서 마침내 이를 구속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2:47에 “내가 세상을 정죄하려고 온 것이 아닝, 구원하려고 옴이다”고 하였다.
토마스・칼라일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자기가 사는 세대에서 한 발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이 저주받을 세대여 하고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이 세계에 개입(介入)되어 있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는 이 세계의 운명에 대하여 공동책임이 있고 연대(連帶)적인 입장에 서게되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가지는 지도자는 원칙에 의해서만 판단하거나, 행동하거나, 살 수 없고, “여기”(here)와 “이제”(now)의 현실, 즉 종말(Eschaton)에 의하여 판단하고, 행동하고 살아야 한다. 이것은 보통 세상에서 말하는 윤리와는 정 반대의 태도이다.
세상에 어떤 사물이든지 그 자체가 좋거나 나쁜 것은 없다. 또한 인간들이 그것을 이용하는 사용 여하에 따라서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할 수도 없다. 다만 어떤 사물은 그 자체에 주어진 시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빛에 비추인 그때의 상황에 의해서만, 또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일에 어느 정도 부합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느 정도 가능적으로 사용되어 질 수 잇는가?에 의하여 좋아도 지고 나빠도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주어진 긴급한 사명은 사람의 신앙을 그의 직업과 일치시키어(신앙과 생활의 일치) 생의 하나의 새로운 스타일(style)을 만들어 내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Lewis Mumford는 그의 저서 “The condition of man"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각적인 갱신이 시작되어야 할 곳은 한 곳 뿐이다. 오늘날 우리의 최선의 계획도 잘못 진행되는 이유는 그것이 아무런 내적 성장도 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되어지는 까닭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셔야 한다. 각자는 먼저 조용히 자기의 짐을 져야 한다. 그 최초의 단계는 개인적인 것이다. 즉 인격(person)을 향한 관심의 반향으로 변해야 한다. 이런 변화가 없이는 사회질서에 있어서 아무런 개선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한번 이런 변화가 시작될 때 모든 것은 가능하다.
통털어 말해서 인간은 숫자나 단위가 아니라 책임있는 인격이라는 것, 인간은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Community)안에서 “나와 너”(I and Thou)의 만남에서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것, 또한 인간은 자기 중심에서 떠나서 어떤 위대한 일에 자기 자신을 위임하는 데서만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우리의 자유도 내용있는 참 자유가 되려면 신앙과 모험으로 자기를 투입(投入)하는데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자각하는 데에라야만 인간의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의 장점과 약점을 할 수 있는대로 발런스(balance)를 취해서 체면을 유지하고, 세대에 편승(便乘)하려는 그런 간교한 미봉책(彌縫策)을 보리고 용감하게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회개가 있은 연후에야 새로운 개혁이 라든가. 새 생활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기독자는 그가 정규적으로 어떤 큰 쇼(show)를 하지 않더라도, 또는 어떤 혁명적인 세력이 큰 데몬스츄레이션을 하지 않을 지라도 만일에 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능력으로서 살며 하나님의 나라가 실지로 오케 하는ㄷ 길잡이가 되도록 살기만 한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가가 될 수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는 바울의 말은 시대를 초원하여 언제 어느 때든지 모든 기독자에게 윤리적인 결단을 재촉하는 경고(警告)라고 생각한다.
바르트신학에 있어서의 Analogia Entis와 Analogia Fidei와 Analogia Relationis의 개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