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1800년 정조국장의 올바른 재현을 목적으로 국왕의 의위(儀衛)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의장군 복식에 관하여 고찰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정조 국장은 조선 후기 대대적인 국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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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 안동대학교, 2016
학위논문(석사) -- 안동대학교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 , 융합콘텐츠학과 문화예술경영전공 , 2016
2016
한국어
600.13 판사항(6)
700.103 판사항(23)
경상북도
iv, 70 p. : 삽화 ; 26 cm
지도교수: 이은주
참고문헌: p. 6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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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800년 정조국장의 올바른 재현을 목적으로 국왕의 의위(儀衛)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의장군 복식에 관하여 고찰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정조 국장은 조선 후기 대대적인 국가예...
이 연구는 1800년 정조국장의 올바른 재현을 목적으로 국왕의 의위(儀衛)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의장군 복식에 관하여 고찰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정조 국장은 조선 후기 대대적인 국가예제 정비 이후 처음 치러진 왕의 장례이므로 그 의미가 크다. 특히『정조국장도감의궤』에는 의장에 관한 사항이 타 의궤에 비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1800년 의장과 의장군 복식 연구에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현재 진행 중인 궁중의례 재현에서 의장과 의장군 복식에 관한 내용이 올바르게 재현되고 있는지에 의문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대표적인 궁중의례행사인 ‘궁중문화축전’과 ‘단종문화제’의 답사를 진행한 결과 몇 가지의 사항에서 원전과 다소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의궤와 당시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세부내용을 참고하지 않고 반차도와 전례서의 내용에만 치중하면서 생긴 오류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왕실의례는 때에 따라 상황에 맞게 대처하여 치러졌기 때문에 기록과 실제 행사의 내용은 차이가 날 수 있다. 특히, 재현행사를 위해 가장 쉽게 참고할 수 있는 ‘반차도’는 사전(事前)에 제작된 계획서의 성격을 가지므로, 행사의 구체적인 상황이 반영되지 않았다. 이러한 내용은 관청들 사이에 오고 간 문서인 ‘계사(啓辭)ㆍ이문(移文)ㆍ품목(稟目)ㆍ감결(甘結)’ 등을 통해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다.
위의 내용을 확인한 결과 몇 가지 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의장군의 숫자는 의장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대기(大旗) 5명, 중기(中旗)는 3명, 소기(小旗)와 고(鼓)는 2명이 들며 나머지 의장은 모두 1명이 든다. 이 부분은 왕실의례 재현행사에서 가장 많이 오류가 생기는 부분이다. 후기의 반차도에서 의장군이 생략되어 그려졌기 때문에 현재 재현에서도 모든 의장을 한 명이 잡는 모습으로 재현해 왔다.
의장군 복식은 분류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의장기를 드는 의장군은 청의(靑衣)에 피립(皮笠)을 착용하고, 산(傘)ㆍ선(扇) 시위(侍衛)와 은마궤군(銀馬机軍)은 청의에 자건(紫巾)을, 의장물과 기물군은 홍의(紅衣)에 자건을 착용한다.
청의와 홍의는 무명으로 만든 소창의(小氅衣) 형태의 옷이다. 착수(窄袖)에 옆이 트인 긴 포(袍)이다. 피립은 초립(草笠) 형태의 붉은색 가죽 모자이며, 자건은 무명으로 만든 직사각형 형태의 모자이다. 여기에 공통적으로 홍목대(紅木帶)를 하고 청색 제비행전[耳行纏]을 착용하면 의장군 복식이 완성된다.
궁중의례 재현에 있어서 고증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반영하여 의례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의궤 속 논의를 통해 의례는 꾸준히 변화ㆍ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재현은 단순히 전례서와 반차도만을 사용하지 않고 실질적인 논의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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