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황병기의 작품 중 가야금을 사용한 악곡들의 양식 변화에 대한 연구이다. 가야금 독주는 물론 장구 반주를 동반하거나 대금, 성악 등과 함께 편성된 작품들까지 살펴보되, 1962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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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3
학위논문(박사) -- 서울대학교 대학원 , 협동과정 음악학(한국음악학전공) , 2013. 8
2013
한국어
K780 판사항(22)
서울
A study of stylistic change in the Gayageum music of Hwang Byungki
xi, 181 p. : 삽화 ; 26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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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황병기의 작품 중 가야금을 사용한 악곡들의 양식 변화에 대한 연구이다. 가야금 독주는 물론 장구 반주를 동반하거나 대금, 성악 등과 함께 편성된 작품들까지 살펴보되, 1962년의...
본 논문은 황병기의 작품 중 가야금을 사용한 악곡들의 양식 변화에 대한 연구이다. 가야금 독주는 물론 장구 반주를 동반하거나 대금, 성악 등과 함께 편성된 작품들까지 살펴보되, 1962년의 작품 <숲>부터 2001년 작품인 <추천사>를 그 범위로 하였다. 본 연구에서 양식은 작곡가가 전통을 작품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판단하였는데, 그 방법론으로 혼종성(混種性; hybridity)과 혼합주의(混合主義; syncretism)라는 개념적 틀을 사용하였다. 혼종성은 이질적인 문화가 결합하여 복합적인 정체성을 보이는 문화적 특성이지만 혼합주의는 정체성의 경계를 넘어 여러 가지 문화를 자유롭게 차용하고 절충하는 입장이다.
연구 결과, 황병기의 가야금 음악은 크게 네 개의 양식 시기로 구분됨을 발견하였다. ‘양식시기(stylistic period)’는 시간순(chronological)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양식의 변화가 시간의 경과를 전제로 하고 또 거시적인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으므로 ‘시기’라 명명하였다. 여기서 시대의 흐름은 음악 부문 뿐 아니라 황병기의 문화적 모태인 대한민국 사회 일반의 역사와 당시 국제 사회의 변화를 가리킨다. 황병기는 국민주의를 표방하지도 않았고 전통을 의식적으로 모방하지 않았지만 그 자신의 설명처럼 본질적으로 ‘한국 음악’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그의 작품 양식은 사회상·시대상을 반영하여 왔다.
제 1기는 황병기 개인의 창작사는 물론 현대 한국음악사 최초의 가야금 독주곡인 <숲>부터 <가라도>까지의 1960년대 작품 외에 1970년대의 작품들 중 전통의 표현 방식에서 1960년대 작품들에 가까운 <고향의 달>과 <아이보개>를 아우른다. 이 시기는 한국사회가 탈식민지적 혼종성의 문화적 풍토 위에 새 국가 공동체 건설에 박차를 가하던 때인데, 창작 국악은 이런 문화를 기반으로 서양음악의 미학과 기법을 차용하여 전통음악의 새로운 발전상을 확립하였다. 그런 가운데 황병기는 한국사회 일반의 혼종성을 극복하고 전통의 개념을 확장하는 자신만의 혼합주의를 이미 이 시기부터 발전시켰다.
제 2기는 한국사회의 산업화가 궤도에 오르면서 문화 부문에서도 축적된 지식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진취적인 실험이 시도되던 때였다. 황병기는 창작 국악을 세계 현대음악의 당당한 한 부문으로 간주하고 현대음악의 전위적 기법들을 응용하였다. 또 그는 이 시기에 조선 후기와 유교 문화 중심의 전통음악 개념을 확장하려는 노력으로 신라의 문화를 상상 속에 부활시켜 불교적 색채를 더하고 서역(西域)의 옛 악기들을 묘사하기도 하는 등 수직적(통시적)이면서도 수평적(탈한반도적 국제주의)인 혼합주의를 발전시켰다. 이 시기를 연 상징적인 작품이 <침향무>이며 <산운>, <비단길>, <영목> 등의 1970년대 작품과 1980년대의 작품인 <밤의 소리>가 서로 다른 방식의 실험을 통해 이러한 양식을 꽃피웠다. 특히 1975년의 작품인 <미궁(迷宮)>은 이 시기 황병기의 실험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작이다.
제 3기는 1980년대의 경제 호황 속에 자신감을 회복한 대한민국이 1986년의 아시안 게임과 1988년의 서울 올림픽 등의 대규모 국제 행사를 개최하면서 유구한 역사의 전통문화에 대해 이전 시대보다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 문화적 풍조를 배경으로 한다. 황병기의 음악도 이 시기에는 제 2기의 실험주의보다 민속악을 중심으로 한 전통회귀적 성향을 보였다. 그 대표작으로, 기보음악의 방식을 통해 산조를 본격적으로 응용한 1987년 작품 <남도환상곡>이 있으며 1990년대 작품인 <춘설>과 <달하 노피곰> 역시 각기 다른 방식을 통해 이러한 경향을 이어갔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민속악적 감성을 바탕으로 한 낭만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마지막 제 4기는,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통해 신흥 강소국으로 발돋움한 대한민국이 문호를 개방하고 과거의 경직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세계의 문화를 자유롭게 향유하던 환경을 배경으로 한다. 서양 음악 등 외래 음악과 국악의 결합은 이전 시기에도 시도되었으나 1990년대 후반 이후의 이 시기에는 대한민국의 문화가 국제화하면서 정체성의 경계를 초월한 혼합주의가 대두되었다. 황병기 역시 <시계탑>을 통해 본격적으로 서양문화를 묘사하고 <하마단>에서는 제 2기의 국제주의를 발전시켜 서역 뿐 아니라 스트라빈스키(Stravinsky)까지 아우르는 혼합주의를 극대화하였다. 그런가 하면 <차향이제>와 <추천사> 등의 작품에서는 전통적 색채를 과거보다 관조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정체성의 경계에서 자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이와 같이 황병기 음악의 양식은 작곡가의 개인적 발전만의 결과가 아니라 그의 문화적 모태인 대한민국의 독특한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그의 양식 시기는 시간의 경과를 순차적으로 따른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이전 시기의 양식에 가까운 작품들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구별되는 양식 속에서도 황병기의 음악은 대체로 전통적 5음계의 명맥을 유지하며 한국 정서를 표현하였으며, 전 양식 시기를 통틀어 견고한 형식미로 일관함으로써 그의 음악의 이질감을 완화시켜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성취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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