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전남 高興郡 豆原面 雲垈里 요지군에 대한 학술 조사가 일단락되었고, 이어 2004년 운대리 도요지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필자는 한국도자사에서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운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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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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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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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전남 高興郡 豆原面 雲垈里 요지군에 대한 학술 조사가 일단락되었고, 이어 2004년 운대리 도요지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필자는 한국도자사에서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운대리 ...
2001년 전남 高興郡 豆原面 雲垈里 요지군에 대한 학술 조사가 일단락되었고, 이어 2004년 운대리 도요지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필자는 한국도자사에서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운대리 요지와 결부시켜 검토하게 되었다.
첫째는 조선 초기(1392-1468) 운대리 요와 도기소 자기소 및 其他窯의 개념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둘째는 조선 전기(1468-1592)에 운대리 도자기가 일본에 수출된 무역자기였을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이 가운데 첫 번째는, 조선시대에 수많은 가마가 도기소, 자기소로 등재되지 않은 ‘기타 요’였기 때문에 그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주제이다. 기타 요에 대한 이해에는 『세종실록』「지리지」 고흥 지방에 ‘자기소, 도기소가 서쪽에 각각 한 군데 있는데 모두 하품’ 이라는 기록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 기록에서 고흥의 도기소, 자기소는 운대리 요지와는 전혀 위치가 다르며 운대리 요업에 대한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즉, 운대리 가마는 세종연간의 도기소, 자기소와 어떤 관련도 없다. 그럼에도 수많은 가마가 운대리에 밀집되어 운영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선 초기의 제3의 가마 즉, 기타 요에 대한 개념이다.
두 번째는, 조선 전기(1468-1592년)에 운대리 요에서 대량생산된 귀얄분청, 분장분청과 극소량의 철회분청과 그 수요처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주지하듯 경기도 광주에 분원 관요가 설치(1467. 4-1468. 12)되면서 분원에서 백자를 주로 생산하였다. 그 영향으로 전국 각지에서 백지를 주산품으로 제작하기 시작하여, 조선은 백자의 시대로 바뀌었다. 그런데 고흥 운대리에서는 계속 귀얄, 분장 등의 분청사기가 대량 제작되었다. 이는 백자보다 귀얄분청과 분장분청을 선호하던 일본 수요자들을 겨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일본에서 조선 도자의 사용이 급증한 것은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가 茶道를 확립하면서부터의 일이다. 이 때부터 일본인은 센노리큐의 정신을 이어 질박하고 자연친화적인 다완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1564년 중국 도자기는 茶會에서 소용없어졌다는 기록, 중국 다완을 사용하는 유행이 사라지고 高麗茶碗, 세토다완, 라쿠다완을 사용한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도 파악된다. 이는 일본에서 조선 도자기를 중국 도자기보다 한층 선호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기록들이다.
일본에서는 조선 도자기를 ‘고려다완’ 이라 불렀다. 고려다완이라는 명칭은 1506년 문헌에 등장한 후 1561년부터 1591년까지 30여 년간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임란 이전부터 조선 도자에 대한 관심과 수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뒷받침해 준다.
일본의 다완, 그리고 특히 가라쓰(唐津)와 시노(志野) 도기는 일본에 수출된 조선 도자기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특히 상감분청, 인화분청, 박지분청, 철회분청, 귀얄분청, 분장분청, 백자, 철회백자를 모방하였다. 이 가운데 운대리 분청사기도 모방의 대상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이렇게 조선 도자기를 모방한 양식은 일본 도자기의 중요한 전통을 이루었다.
운대리 분청사기는 굽 안바닥까지 백토 분장이 두텁게 입혀진 특징을 보인다. 투박한 흙의 질감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기호에 잘 맞는 그릇이다.
한국 도자사에서 운대리 가마가 갖는 또 하나의 의미를 지적하자면, 소량이지만 철회분청의 존재이다. 철회분청은 일찍이 충남 공주 계룡산 학봉리 가마에서만 제작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운대리에서도 철회분청이 제작된 것은 새로운 사실로서 주목된다. 조선의 철회분청은 철회백자와 함께 미노(美濃)의 시노와 히젠(備前)의 에가라쓰(繪唐津)의 탄생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도 13-23.
운대리 도자기는 육로나 해로를 통해 주변 지역으로 원활하게 운반되었을 것이며 주변 입지로 보아 무역자기로서의 가능성이 충분하다. 경남 웅천 가마의 도자기가 일본에 수출되어 다완으로 애용된 것처럼, 운대리 가마의 도자기 또한 일본 수출용 도자기로서 손색이 없다. 국내에서는 고흥과 주변 지역 주민들의 생활용기로, 그리고 지역의 관청 소용 그릇으로도 공급되었을 것이다.
운대리를 중심으로 하여 이러한 연구가 기능한 것은, 나말여초의 청자, 여말선초의 회청사기, 조선의 분청사기와 백자, 특히 극소량이지만 철회백자 등이 요지에서 출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출토 양상은 운대리가 통일신라 말부터 조선까지 오랜 요업의 역사를 지니면서 다양한 도자기를 제작했음을 말해 준다. 운대리는 특히 조선시대에 요업이 활발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도기소, 자기소, 기타 요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고, 무역자기로서 운대리 도자기에 대해서도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다만 구체적인 문헌 전거를 추적함으로써 무역 경로를 복원하는 등의 밀도 있는 작업은 후일의 연구로 미루기로 한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field researches on the kiln site located in Undae-ri(雲垈里), Duwon myeon, Goheung-gun in Jeonnam (全南) Province has been completed in 2001. In 2004 was held a conference on the Undae-ri kiln site. On the basis of these two occasions, I was...
The field researches on the kiln site located in Undae-ri(雲垈里), Duwon myeon, Goheung-gun in Jeonnam (全南) Province has been completed in 2001. In 2004 was held a conference on the Undae-ri kiln site. On the basis of these two occasions, I was able to reconsider two critical issues in the history of Korean ceramics from the materials found in the Undae-ri site.
The first issue regards the nature of the Undae-ri kiln in relation to the two categories of dogiso and jagiso recorded in historical texts during the first phase (1392-1468) in the history of Joseon ceramics, which, according to my periodization is divided into five phases. In this article, I argued that the Undae-ri kilns were part of "the other kilns unrecorded in the texts ," many of which existed throughout the country in the Joseon period (1392-1910).
According to the chapter of "Jiriji (地理志)" in Sejong Silok (世宗實?), there were a jagiso (磁器所) and a dogiso (陶器所) in the western part of Goheung region, and these kilns produced ceramics that were evaluated as the lowest in the three levels.
However, it should be noted that the kilns mentioned in the record seem completely irrelevant to the Undae-ri kiln. In other words, the ceramic production in Undae-ri was not recorded in the "Jiriji" chapter in Sejong silok, which means that the Undae-ri kiln has nothing to do with the dogiso or jagiso during the King Sejong's reign (1418-1450). In this sense, this can be only explained by bringing in a third concept, which is "the other kilns unrecorded in the texts."
The second issue is on the nature of Undae-ri ceramics as export ceramics in the second phase (I468-1592). From the Undae-ri kiln was produced abundant pieces of buncbeong with guiyal (design brushed with white slip) and bunjang(design coated with white slip) decorations as well as a very small number of buncbeong with underglaze iron-brown design. The problem here is by whom and where these vessels were consumed.
When the Bunwon (Governnent Kiln) was established in Gwangju, Gyeonggi Province (April, 1467-December, 1468), it mainly produced white porcelains.This affected the patterns of ceramic productions throughout the country resulting in the mass production of the white porcelains, This mark; the beginning of the white porcelain era, However, regardless of the general trend, Undae-ri kilns in Goheung continued to produce a great number of buncbeong wares with guiyal and bunjang design. It is likely that they were made for the Japanese consumers who preferred guiyal and bunjang buncbeong wares to white porcelains.
In Japan, the Joseon ceramics became increasingly popular when Senno Rikku(千利休, 1522-1591) established tile art of tea ceremony, This was when tile Japanese people, inspired by the ideas of Senno Rikku, started to use the tea bowls that looked rather rustic and unrefined, or in other words close to nature. This new trend is attested in various records, which mention that the Chinese ceramics were no longer used in the tea ceremonies, and that Goryeo tea bowls, Seto tea bowls, Rakku tea bowls were used instead of the Chinese tea bowls. It shows that the Joseon ceramics were then more favored than the Chinese ceramics in Japan.
The Japanese then referred to the Joseon ceramic wares as "Goryeo (918-1392) tea bowls." In textual records, tills designation appears in 1506, and is most frequently mentioned during the thirty years between 1561-1591. It shows that prior to the Imjin Invasion (王辰倭亂, 1592-1598) there were much interest and frequent imports of Joseon ceramics in Iapan.
The Japanese tea bowls, especially the Karatsu and Sino wares were influenced by tile imported Joseon ceramics, which includes the buncbeong wares decorated with inlaid, stamped, bakji (design cut off the white slip from the body), underglaze iron -brown,guiyal, bunjang designs, plain white porcelains and white porcelains with underglaze iron-brown decorations. It is highly likely that the buncbeo
목차 (Table of Contents)
참고문헌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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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흥 운대리 조선시대 요지에 관한 일고찰 『高興雲垈里 陶磁文化의 性格』" 高興郡·高興文化院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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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속의 그림: 사카이 호이쓰의 회화 제작과 그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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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201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2009-03-23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재)성강문화재단 한국미술연구소 -> 한국미술연구소영문명 : Sung Kang Foundation -> Center for Art Studies |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
2005-06-29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재)성강문화재단 -> (재)성강문화재단 한국미술연구소영문명 : Sungn Gang Culture Foundation -> Sung Kang Foundation | |
2005-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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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84 | 0.84 | 0.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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