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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세기 고구려의 王室 神聖化 관념에 대한 검토 = A Study on The Royal Sanctification Idea of Goguryeo Dynasty In the 4th and 5th Centu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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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Goguryeo’s royal reverence idea was derived from the sacred lineage perception on founders. The Jian Goguryeo Tablet, King Gwanggaeto Tablet, and Moduru Stele that were built approximately in the 4th and 5th centuries have a lineage perception t...

      The Goguryeo’s royal reverence idea was derived from the sacred lineage perception on founders. The Jian Goguryeo Tablet, King Gwanggaeto Tablet, and Moduru Stele that were built approximately in the 4th and 5th centuries have a lineage perception that founders of Goguryeo are offsprings of the heavenly gods and grandchildren of the water god. The important thing is that the idea of reverence to the Goguryeo royal family was not found in all the records of the 4th and 5th centuries. In the memorial inscriptions of the Anak #3 Tomb and Deokheungri Tobm that were built in the similar periods only personal achievements are recorded. Also, the Chungju Goguryeo Tablet that was assumed to have been written in the 5th century is an official record of Goguryeo, but there was no information on sacred lineage of Goguryeo founders.
      Chumo, founder of Goguryeo, ran from North Buyeo and was settled in Biryusu. During the process, Gyerubu that was represented by founder Chumo took the initiative away from Sonobu[=Yeonnobu=Biryubu] that was a dominant power of natives in Jolbon. In the process Gyerubu expanded its initiative, it was assumed that they would labor at securing legitimacy as a representative of the League and efficient control of the people. It was also revealed from the fact that Goguryeo kings themselves gave sacrificial rites to primogenitors of league member countries for integration with the League during the general meetings. On every October, Goguryeo kings themselves gave sacrificial rites to all of the gods including Ryongseong, Ilsin, Kahansin, Kijasin and Susin. Chinese people considered that there were lots of Eumsa(sacrificial services given by those who did not have right to serve) in Goguryeo because the Goguryeo kings gave sacrificial rites to the subjects of sacrificial rites that were not seen as the same ancestors to them. In particular, Sonobu, a previous royal power, established an independent royal ancestor’s shrine in the middle 3th century to give a sacrificial service to their founders. It means that the Gyerubu sovereignty did not secure its exclusive initiative even at that period.
      Then in the 4th and 5th centuries, Jian Goguryeo Tablet and King Gwanggaeto Tablet as official records of Goguryeo and even personal inscriptions declared the sacred idea that Goguryeo’s founder is the son of Habaek, the son of Lord of Heaven. King Gwanggaeto kept tomb keepers from being traded, which means that influential parties’ acquisition of tomb keepers was strictly limited. At the time when Goguryeo sovereignty was strengthened, the sacred lineage idea of Goguryeo royal family was also emphasized. In conclusion, it was suggested that the sacred lineage idea reflected the situation of the period when Goguryeo sovereignty was expanding its exclusive initiative over influential parties and achieved its absolute superio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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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고구려의 왕실 존숭 관념은 시조에 대한 신성한 출자 인식에서 출발한다. 4~5세기 무렵 작성된 「집안고구려비」, 「광개토왕비」, 「모두루묘지명」에는 고구려의 시조가 하늘[天神]의 자...

      고구려의 왕실 존숭 관념은 시조에 대한 신성한 출자 인식에서 출발한다. 4~5세기 무렵 작성된 「집안고구려비」, 「광개토왕비」, 「모두루묘지명」에는 고구려의 시조가 하늘[天神]의 자손이며 물[水神]의 외손이라는 신성한 출자 인식을 담고 있다. 중요한 것은 4~5세기의 모든 기록물에서 고구려 왕실에 대한 존숭 관념은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안악3호분과 덕흥리고분 묘지명에서는 개인의 행적을 위주로 묘지명을 작성하였다. 또한 5세기 경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충주고구려비」 역시도 고구려의 공식적인 기록물이지만 고구려 시조의 신성한 출자 정보는 없다.
      고구려 시조 추모는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와서 비류수가에 정착하였다. 그 과정에서 시조 추모로 대표되는 계루부는 졸본을 중심으로 토착해 온 선주민의 지배세력 소노부[=연노부=비류부]를 누르고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계루부가 주도권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연맹체의 대표[왕]로서 정통성 확보와 민에 대한 효율적인 지배를 고심하였을 것이다. 이는 연맹체와의 통합을 위해 각 연맹체의 시조신에 대한 제사를 國中大會 기간에 고구려 왕이 직접 지내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고구려 왕은 매년 10월이면 靈星, 日神, 可汗神, 箕子神 등과 隧神에 대한 제사를 모두 그리고 몸소 제사지냈다. 중국인들의 눈에 동일한 조상으로 볼 수 없는 제사 대상을 더군다나 고구려의 왕이 직접 제사지내는 것을 두고 고구려에는 淫祀가 많다고 하였다. 특히 前 왕실세력인 소노부는 3세기 중엽에도 여전히 독자적인 종묘를 세우고 자신들의 시조에 대한 제의를 유지하고 있었다. 해당 시기까지도 계루부 왕권이 배타적인 지배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음을 반영한다.
      그러다가 4~5세기 무렵 고구려의 공식적 기록물인 「집안고구려비」, 「광개토왕비」와 개인의 묘지명에까지 고구려의 시조가 ‘天帝之子 河伯之孫’이라는 왕실에 대한 신성 관념을 천명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은 왕릉의 수묘인에 대한 매매 금지를 발령함으로써 유력세력의 수묘인 취득을 강력하게 제한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고구려 왕권이 강화된 시기 고구려 왕실의 신성한 출자 관념 역시도 강조되고 있는 양상이다. 결과적으로 고구려 왕실의 신성한 출자 관념은 고구려 왕권이 유력세력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력을 확보해 나가던 그래서 왕실의 절대적 우위를 설정했던 시대상의 반영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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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이지영, "한국신화의 신격 유래에 관한 연구" 태학사 1995

      2 김두진, "한국고대의 건국신화와 祭儀" 일조각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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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耿鐵華, "염모묘지와 중원고구려비" 10 : 2000

      6 강진원, "신발견 <集安高句麗碑>의 판독과 연구 현황-약간의 陋見을 덧붙여" 11 : 2013

      7 이복규, "부여・고구려 건국신화 연구" 집문당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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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조법종, "고조선 고구려사 연구" 신서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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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18 1.18 1.0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6 0.97 2.484 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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