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발발 후 9월 16일에 있었던 명량대첩은 전쟁 전체의 승패를 가른 중요한 전투였다. 이에 명량대첩은 당대부터 널리 알려져 왔지만, 명량대첩은 결코 하루의 전 투로 승패가 결정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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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발발 후 9월 16일에 있었던 명량대첩은 전쟁 전체의 승패를 가른 중요한 전투였다. 이에 명량대첩은 당대부터 널리 알려져 왔지만, 명량대첩은 결코 하루의 전 투로 승패가 결정되...
정유재란 발발 후 9월 16일에 있었던 명량대첩은 전쟁 전체의 승패를 가른 중요한 전투였다. 이에 명량대첩은 당대부터 널리 알려져 왔지만, 명량대첩은 결코 하루의 전 투로 승패가 결정되었다고 볼 수 없다. 일본 수군에 비해 수적으로 부족하였던 조선 수군은 한 차례의 최후 결전을 위해서 철저한 준비와 대응이 절실했다. 이런 점에서 진도의 벽파진은 명량대첩을 위한 조선 수군의 전초 기지이자 작전 수립처로서 큰 역 할을 했다. 이에 명량대첩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벽파진의 역할을 적극 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명량해협이라는 수로에서 진행되었던 군사 적 활동을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실제 명량대첩 직전에 17일 동안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벽파진에 주둔하면서 진도 주민들과의 유대를 통한 군사와 군수 조달, 탐방, 추격, 전투, 이동을 계획하고 실행 하였다. 하지만 마지막에 명량을 결전지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수적으로 비교되 지 않는 조선 수군으로 일본 수군에 맞서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것은 울돌목이라는 협소한 해안 지형을 이용하고, 해류의 흐름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흐름에서 보 면 명량대첩은 벽파진에서 준비되고, 명량에서 실행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 에서 명량대첩에서 벽파진의 역할을 찾을 수 있다.
명량대첩에 대한 후대의 기록은 크게 벽파진을 중심으로 서술한 경우와 명량을 중 심으로 서술한 기록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임진왜란 직후부터 최근까지 대부분 기록 에서 명량대첩의 현장을 벽파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이순신 자신이 기록한 『난중 일기』에 분명하게 벽파진에서의 주둔, 우수영으로 이동, 울돌목에서의 전투를 연속적 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명량대첩에서 벽파진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다음으로 명량대첩을 명량으로 기록한 경우는 전투 현장 명량만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전투에서 활약한 인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편 명량대첩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 에서는 대부분 벽파진에서 이순신의 활동을 중시하여 서술하고 있다. 명량대첩에서 벽 파진의 역할과 위상은 명량대첩의 승전 결과와 함께 준비 과정 및 사전 대응했던 벽파진에서의 역할을 주목해야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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