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에 시작된 근대적 의미에서의 미술교육은 광복 후 미군정기를 지나 본 논문이 다루는 시기인 1955년경부터 비로소 한국 정부에 의하여 주체적으로 실시되었다. 본 논문은 1955년부터 ...
일제시대에 시작된 근대적 의미에서의 미술교육은 광복 후 미군정기를 지나 본 논문이 다루는 시기인 1955년경부터 비로소 한국 정부에 의하여 주체적으로 실시되었다. 본 논문은 1955년부터 1963년에 이르는 시기의 미술 교과서, 즉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실시된 최초의 교육 개혁기인 1차 교육과정의 중ㆍ고등 미술 검정교과서의 체재와 내용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1차 교육과정기 미술교과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술 교육의 근간을 이룬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제시대와 미군정기 미술교육의 연계와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의 중요한 텍스트가 된다.
1차 교육과정기의 미술교육은 미군정기에 정립된 교수요목을 전수하여 미국식 진보주의 교육이념과 서구식 미술 교수법을 교과서에 도입하였다.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이념은 자유민주주의와 학생중심 교육을 표방하여 미술교육에 있어서 표현ㆍ창작활동을 강조하였다. 실용적이고 목적론적 성격이 강했던 일제시대 미술교육에서 탈피하여 자유로운 창의성 발현에 가치를 둔 미술교육이 실시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 미술교육의 혁신적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그러나 미술에 특별한 재능이 없는 일반 학생들에게 표현활동 중심의 미술교육은 미술 자체를 어렵고 부담스러운 과목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서양식 미술교수법을 따른 우리나라 1차 교육과정의 미술교과서는 미술사 교육에서도 서양 미술사에 편중되는 결과를 빚었다. 서양미술사의 서술에 있어서는 각 시기별 미술의 양식적 특징이 대표작을 중심으로 설명되었지만 한국미술사와 동양미술사의 경우에는 주요 작품 몇 개만을 나열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로써 한국 미술이나 동양의 미술 보다 서양의 미술에 대해 더 상세한 정보와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고 감성적으로도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1차 교육과정 미술교과서를 편찬한 저자들이 거의 모두 일제시대에 미술교육을 받은 미술인이었다는 점은 이 시기 미술교과서의 근본적인 한계로 작용하였다. 일본인이 가장 애호하는 작가인 세잔, 반 고흐, 마티스의 작품이 1차 교육과정의 미술교과서에서도 가장 빈번하게 수록되었다는 점, 일제시대 교과서에서 특별히 강조되었던 색채 이론 교육이 광복 후의 미술교과서에서도 그대로 지속되었던 점 등에서 일제시대 미술교육의 잔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일제 식민지 교육의 잔재는 네 종류의 고등학교 미술교과서 중 두 종류의 미술교과서가 우리나라 미술의 시발점을 낙랑시대로 잡아 서술했다는 점에서 명확히 입증된다. 일제가 편찬한 모든 한국사 책에는 낙랑으로 대표되는 평양 대동강 유역의 한사군이 한국사의 시작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는 한사군 이전의 고조선과 단군 신화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으로 조선 민족의 독립적 기원을 부정하는 타율성론을 대표한다. 일제는 근대적 학문인 고고학을 동원시켜서 낙랑 고분을 발굴, 유물을 제시함으로써 한국사의 낙랑 기원설을 실증적, 과학적으로 입증하고자 하였다. 일제시대 식민사관을 보좌하는 관변학문으로서의 조선사와 조선미술사의 구성과 내용이 광복 후 1차 교육과정 미술교과서에 그대로 전수된 것은 미술교과서 저자들이 일제 식민시기에 교육을 받은 미술인이라는 점, 그리고 그들이 참고했던 도서가 일제시대에 출간된 서적이었기 때문에 비롯된 현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식민사관에 대한 비판적 검증을 행하지 못한 당대 지성계의 한계를 1차적 원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에서의 미술 교육은 정부에 의해 승인된 미술 교과서를 기본 지침으로 시행된다. 따라서 국민의 미술 인식 형성과 미술 활동 및 감상에 미치는 미술교과서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할 수밖에 없다. 미술 교과서는 단순한 텍스트로서의 기능을 넘어서 미술의 개념과 정전(正典, Canon)을 규정하고 유포시키는 막강한 권위의 실체이며, 정부의 시책과 문화정책을 반영하는 매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전쟁으로 피폐화된 사회의 재건을 당면 과제로 내세웠던 정부는 1차교육과정 미술교과서에 산업정책을 적극적으로 반영시켰다. 콘크리트, 시멘트와 같은 산업 재료의 활용과 공예를 비롯한 일상 생활용품의 간단한 제작법을 수록하여 산업 현장에 응용 가능한 미술로서 권장한 점은 미술 교과서가 정부시책의 매체로 이용된 대표적 예가 된다.
1차 교육과정 미술교과서는 교과서 저자들의 사적 이익을 반영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봉상, 이항성, 유경채, 이종우, 장발 등 교과서 저자들은 당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으로 약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진 작가들로서 국전 수상작 다수를 교과서의 참고도판으로 수록하였다. 국전 수상작과 국전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교과서에 개제하여 미의 전당으로서의 국전의 권위를 확고한 반석 위에 올렸고, 이로써 국전 수상작가들의 작품에 ‘고전’에 상당하는 위상을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울대학교 학장을 역임했던 장발이 집필한 미술교과서에 서울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들의 작품들만이 참고작품으로 선정, 수록된 경우를 대표적인 예로 지적할 수 있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기준을 준수하지 않고 지나치게 편파적인 기준을 적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정을 거쳐 공인되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 검정제도의 허술한 일면을 드러내준다.
본 논문은 일제시기와 미군정기를 거쳐 1차 교육과정기에 간행된 미술교과서의 체재와 내용이 당대 미술계의 현황과 정부 시책을 어떻게 반영하였는가를 분석하고 그것의 의의와 문제점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 결과 일제 식민지 시대 미술교육의 잔재, 서양식 미술교수법 위주의 구성, 정부 시책과 교과서 저자 간의 상호보완적 관계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1차교육과정 미술 교과서에서 제시된 미술교육의 방향성과 수록된 작품들은 현대미술 교육의 근간이 되었으며 국민의 미의식에 침투하여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학술적 연구의 관심 영역에 들지 못하였다. 따라서 향후 미술교육의 올바른 방향성을 수립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교과서의 분석 작업이 보다 치밀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