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

      인천 문학산성의 연구성과와 역사적 가치 = The Research Achievement of Incheon Munhak Fortress and Historical Value

      한글로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article reviewed the literature records and academic research on Munhak Fortress from the perspective of research history. It is the result of examining the historical value of Munhak Fortress. First, it has academic significance in that it is Korea s first report on mountain fortress after the liberation. In 1949, the report was conducted by Lee Gyeongseong, the director of the Incheon Prefectural Museum at the time, and was prepared under the title of『Research Report on Historical Remains in Incheon(仁川古蹟調査報告書)』. The report estimated that the scale of outer wall was about 130 meters and of the inner wall was 600 spaces. It was identified as the double wall structure with the stone outer wall and the earthen inner wall. For the gate of the fortress, the east gate and the west gate were estimated, and the facilities in the fortress were introduced such as beacon fire station at the top, well, and building sites. Second, the exact state of Munhak Fortress is identified through academic research so far. The circumference of fortress was 587 meters, and it was double wall structure which had inner and outer walls. The inner wall was an earthen wall, and the outer wall was stone wall, but when the US Army was stationed in 1959, some of the inner and outer walls were destroyed. The facilities in the fortress include the east gate, west gate, beacon fire station, well, and the building site, but all of them are now damaged. As a result of the investigation so far, relics from the Three Kingdoms Period to the Joseon Dynasty have been excavated, and the main period is estimated from the end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to the Unified Silla Period. Third is the historical value of Munhak Fortress. As a historical space that provides a specific background for the birth myth of Baekje, Munhak Fortress has become a repository of archaeology encompassing prehistoric and historical periods. In addition, Mountain Munhak and Munhak Fortress were “the historical site” and “the space of protection” that kept us by silently watching representative events that penetrated the historical era of Korea. The transition process of fortress of Korea is summarized in this fortress, including the formation of a defense system for each period, and the identical operation of the fortress and border beacon fire. Research so far has only tried to find the “historical value” of the past. Munhak Fortress has outstanding value; however, there have been too few attempts to create its future value as well as to make concrete historical value. There should be a policy for Munhak Fortress to revive as our cultural identity.
      번역하기

      This article reviewed the literature records and academic research on Munhak Fortress from the perspective of research history. It is the result of examining the historical value of Munhak Fortress. First, it has academic significance in that it is Ko...

      This article reviewed the literature records and academic research on Munhak Fortress from the perspective of research history. It is the result of examining the historical value of Munhak Fortress. First, it has academic significance in that it is Korea s first report on mountain fortress after the liberation. In 1949, the report was conducted by Lee Gyeongseong, the director of the Incheon Prefectural Museum at the time, and was prepared under the title of『Research Report on Historical Remains in Incheon(仁川古蹟調査報告書)』. The report estimated that the scale of outer wall was about 130 meters and of the inner wall was 600 spaces. It was identified as the double wall structure with the stone outer wall and the earthen inner wall. For the gate of the fortress, the east gate and the west gate were estimated, and the facilities in the fortress were introduced such as beacon fire station at the top, well, and building sites. Second, the exact state of Munhak Fortress is identified through academic research so far. The circumference of fortress was 587 meters, and it was double wall structure which had inner and outer walls. The inner wall was an earthen wall, and the outer wall was stone wall, but when the US Army was stationed in 1959, some of the inner and outer walls were destroyed. The facilities in the fortress include the east gate, west gate, beacon fire station, well, and the building site, but all of them are now damaged. As a result of the investigation so far, relics from the Three Kingdoms Period to the Joseon Dynasty have been excavated, and the main period is estimated from the end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to the Unified Silla Period. Third is the historical value of Munhak Fortress. As a historical space that provides a specific background for the birth myth of Baekje, Munhak Fortress has become a repository of archaeology encompassing prehistoric and historical periods. In addition, Mountain Munhak and Munhak Fortress were “the historical site” and “the space of protection” that kept us by silently watching representative events that penetrated the historical era of Korea. The transition process of fortress of Korea is summarized in this fortress, including the formation of a defense system for each period, and the identical operation of the fortress and border beacon fire. Research so far has only tried to find the “historical value” of the past. Munhak Fortress has outstanding value; however, there have been too few attempts to create its future value as well as to make concrete historical value. There should be a policy for Munhak Fortress to revive as our cultural identity.

      더보기

      국문 초록 (Abstract)

      이글에서는문학산성의 문헌기록과 학술조사에 대한 연구사를 검토를통해 문학산성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를 추출해 본 것이다. 첫째, 해방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산성 보고서라는데 학사적 의미가 있다. 1949년 당시 인천시립박물관장인 이경성에 의해 진행되어 『인천고적조사보고서』로 작성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규모는 외성 430척, 내성 600칸으로 보았으며 석축의 외성과 토벽의 내성을 갖춘 복곽 구조로 파악하였다. 성문은 동문과 서문지를 추정하였고 성내 시설은 정상부의 봉수대와 우물, 건물지 등을 소개하였다. 둘째, 그간의 학술조사를 통해 문학산성의 정확한 현상이 파악되었다. 성 둘레는 587m로 내성과 외성의 복곽식 구조이다. 내성은 토축, 외성은 석축이었으나 1959년 미군 주둔시 내성과 외성 일부가 삭평 또는 멸실되었다. 성내 시설은 동문과 서문, 봉수대, 우물, 건물지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모두 훼손된 상태이다. 그간의 조사 결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중심 시기는 삼국시대 말부터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셋째, 문학산성의 역사적 가치이다. 백제 건국 신화의 구체적 배경을 제공하는 역사 공간으로 풍부한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아우르는 고고학의 보고로 거듭나고 있다.아울러 우리나라의 역사시대를 관통하는 대표적인 사건들을 문학산과 문학산성은 묵묵히 지켜보며 우리를 지켜준 ‘역사의 현장’이자 ‘수호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한국성곽사의 변천과정이 집약되었으며 시대별 방어체계 형성, 산성과 연변봉수의 동일체 운영 등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가치”를 찾으려고만 한다. 문학산성의 경우 그 가치가 뛰어나다. 그런데 그 역사적 가치의 구체화는 물론 앞으로 그 가치를 창출하는데는 너무 인색하다. 문학산성이 우리모두의 문화적정체성으로 되살아날수 있는 정책을 기대한다.
      번역하기

      이글에서는문학산성의 문헌기록과 학술조사에 대한 연구사를 검토를통해 문학산성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를 추출해 본 것이다. 첫째, 해방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산성 보고서라는데 학사적 ...

      이글에서는문학산성의 문헌기록과 학술조사에 대한 연구사를 검토를통해 문학산성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를 추출해 본 것이다. 첫째, 해방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산성 보고서라는데 학사적 의미가 있다. 1949년 당시 인천시립박물관장인 이경성에 의해 진행되어 『인천고적조사보고서』로 작성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규모는 외성 430척, 내성 600칸으로 보았으며 석축의 외성과 토벽의 내성을 갖춘 복곽 구조로 파악하였다. 성문은 동문과 서문지를 추정하였고 성내 시설은 정상부의 봉수대와 우물, 건물지 등을 소개하였다. 둘째, 그간의 학술조사를 통해 문학산성의 정확한 현상이 파악되었다. 성 둘레는 587m로 내성과 외성의 복곽식 구조이다. 내성은 토축, 외성은 석축이었으나 1959년 미군 주둔시 내성과 외성 일부가 삭평 또는 멸실되었다. 성내 시설은 동문과 서문, 봉수대, 우물, 건물지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모두 훼손된 상태이다. 그간의 조사 결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중심 시기는 삼국시대 말부터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셋째, 문학산성의 역사적 가치이다. 백제 건국 신화의 구체적 배경을 제공하는 역사 공간으로 풍부한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아우르는 고고학의 보고로 거듭나고 있다.아울러 우리나라의 역사시대를 관통하는 대표적인 사건들을 문학산과 문학산성은 묵묵히 지켜보며 우리를 지켜준 ‘역사의 현장’이자 ‘수호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한국성곽사의 변천과정이 집약되었으며 시대별 방어체계 형성, 산성과 연변봉수의 동일체 운영 등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가치”를 찾으려고만 한다. 문학산성의 경우 그 가치가 뛰어나다. 그런데 그 역사적 가치의 구체화는 물론 앞으로 그 가치를 창출하는데는 너무 인색하다. 문학산성이 우리모두의 문화적정체성으로 되살아날수 있는 정책을 기대한다.

      더보기

      목차 (Table of Contents)

      • Ⅰ. 머리말 Ⅱ. 문학산성의 조사성과 Ⅲ. 문학산성의 구조와 운영에 관한 검토 Ⅳ. 문학산성의 역사적 가치 Ⅴ. 맺는말
      • Ⅰ. 머리말 Ⅱ. 문학산성의 조사성과 Ⅲ. 문학산성의 구조와 운영에 관한 검토 Ⅳ. 문학산성의 역사적 가치 Ⅴ. 맺는말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한양대학교 박물관, "金浦 文殊山城·守安山城 試掘調査報告書" 2003

      2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백종오, "한국 성곽 문화재 보존 관리의 방안과 과제 - 인천 문학산성, 국가 사적 및 지방 기념물의 비교를 중심으로 -" 역사문화연구소 (60) : 291-328, 2016

      5 이희인, "토층에 담긴 인천의 시간 : 유적으로 보는 인천 이야기" 보고사 2018

      6 박진한, "조감도를 통해 살펴본 1920∼30년대 인천의 심상지리와 시가지 계획" 도시사학회 (17) : 7-39, 2017

      7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전국유적목록"

      8 서동천, "일제강점기 요시다 하츠사부로(吉田初三郞) 조감도의 성격과 확산 배경에 관한 연구-조선, 만주, 대만 등 일본 식민 지역을 대상으로 그린 도시조감도를 중심으로-" 한국동양예술학회 (38) : 95-115, 2018

      9 이종화, "인천향토사료-문학산-" 흥신문화사 1965

      10 박성우, "인천지역 청동기시대 주거지의 현황과 성격" 수선사학회 (34) : 317-352, 2009

      1 한양대학교 박물관, "金浦 文殊山城·守安山城 試掘調査報告書" 2003

      2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백종오, "한국 성곽 문화재 보존 관리의 방안과 과제 - 인천 문학산성, 국가 사적 및 지방 기념물의 비교를 중심으로 -" 역사문화연구소 (60) : 291-328, 2016

      5 이희인, "토층에 담긴 인천의 시간 : 유적으로 보는 인천 이야기" 보고사 2018

      6 박진한, "조감도를 통해 살펴본 1920∼30년대 인천의 심상지리와 시가지 계획" 도시사학회 (17) : 7-39, 2017

      7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전국유적목록"

      8 서동천, "일제강점기 요시다 하츠사부로(吉田初三郞) 조감도의 성격과 확산 배경에 관한 연구-조선, 만주, 대만 등 일본 식민 지역을 대상으로 그린 도시조감도를 중심으로-" 한국동양예술학회 (38) : 95-115, 2018

      9 이종화, "인천향토사료-문학산-" 흥신문화사 1965

      10 박성우, "인천지역 청동기시대 주거지의 현황과 성격" 수선사학회 (34) : 317-352, 2009

      11 서영대, "인천의 읍격 변화와 그 원인 연구" 인천학연구원 1 (1): 89-131, 2010

      12 인천시역사자료관, "인천의 산성의 문화적 가치" 2016

      13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인천연안의 고고학" 2007

      14 김상열, "인천역사 1"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2004

      15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인천북부 종합학술조사" 2004

      16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인천남부 종합학술조사" 2003

      17 이종묵, "인천권역의 문화전통과 한문학" 한국한문학회 1998

      18 이경성, "인천고적조사보고서" 인천문화재단 2012

      19 인천광역시, "인천 문학산성의 가치와 정비 방향" 2020

      20 인천시역사자료관, "인천 문학산성복원과 보존방향" 2016

      21 국토문화재연구원, "인천 문학산성 성벽 추정지 내발굴(시굴)조사 약식보고서" 2019

      22 한국고고인류연구소, "인천 문학산 제사유적" 2018

      23 한국고고인류연구소, "인천 문학산 숲 복원 및 이용활성화 사업부지내 발굴(시굴)조사 약식보고서" 2016

      24 한국성곽학회, "삼년산성" 충청북도 2008

      25 심정보, "백제산성의 이해" 주류성 2004

      26 차용걸, "백제 지역의 고대산성" 주류성 2005

      27 인하대학교 박물관, "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2002

      28 이희환, "문학산의 문화지리와 심상지리" 인하대학교박물관 13 : 2010

      29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문학산성 정밀지표조사 보고서" 2017

      30 인하대학교 박물관, "문학산 일대의 역사와 문화" 2010

      31 인하대학교 박물관, "문학산 일대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1999

      32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시마을생활사 관교동·문학동" 2019

      33 경기도박물관, "도서해안지역 종합학술조사 Ⅲ" 2003

      34 한성문화재연구원, "단양 적성 북문일원 보수공사 서벽구간 시굴조사보고서" 2017

      35 국립문화재연구소, "군사보호구역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 2000

      36 이희인, "고려 강화도성" 혜안 2016

      37 정원철, "고구려 산성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7

      38 배성수, "개항장 인천연안의 방비강화" 인천광역시립박물관 (創刊) : 2003

      39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2000

      40 盧泰敦, "高句麗의 漢水流域 喪失의 原因에 대하여" 13 : 1976

      41 백종오, "高句麗 城郭 築城術의 擴散에 대한 豫備的 檢討" 고구려발해학회 59 : 205-244, 2017

      42 한국보이스카웃연맹, "韓國의 城郭과 烽燧" 1990

      43 白種伍, "韓國城郭硏究論著總攬" 서경문화사 2004

      44 白種伍, "韓國 城郭遺蹟의 文化資源 活用方案 硏究" 14 : 2007

      45 "邵城陣中日誌"

      46 "輿地圖書"

      47 朱甫暾, "西巖趙恒來敎授華甲記念韓國史論叢" 1992

      48 千寬宇, "目支國攷" 24 : 1979

      49 沈正輔, "百濟歷史再現團地造成 調査硏究報告書-고고미술분야Ⅰ" 忠淸南道 1996

      50 沈正輔, "百濟 石築山城의 築造技法과 性格에 대하여" 35 : 2001

      51 李基白, "百濟 王位繼承考" 11 : 1959

      52 白種伍, "百濟 漢城期 山城의 現況과 特徵" 69 : 2004

      53 윤용구, "永宗鎭 月尾島行宮에 대하여" 9 : 2002

      54 "東史綱目"

      55 朝鮮總督府,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1942

      56 "新增東國輿地勝覽"

      57 李慶成, "文鶴山方面古蹟傳說調査報告書" 仁川市立博物館 1949

      58 인천시립박물관, "文鶴山方面古蹟傳說調査報告書" 1949

      59 白種伍, "文鶴山城의 現況과 變遷" 仁荷大學校 博物館 13 : 2011

      60 仁川廣域市, "文鶴山城 地表調査報告書" 1997

      61 文化公報國 文化財管理局, "文化遺蹟總攬" 1977

      62 김기섭, "彌鄒忽의 位置에 대하여" 13 : 1998

      63 白種伍, "安城川流域 方形土城의 性格" 8 : 2004

      64 "大東地志"

      65 윤용구, "仇台의 백제건국기사에 대한 재검토" 백제연구소 (39) : 1-15, 2004

      66 李慶成, "仁川의 先史遺蹟物 調査槪要" 1 : 1959

      67 史料收集委員會, "仁川鄕土史料" 1956

      68 岡田貢, "仁川近郊の史蹟と史話" 1929

      69 백종오, "仁川沿岸의 古代城郭에 대하여" 한국문화사학회 (27) : 149-182, 2007

      70 仁川直轄市, "仁川市史" 1993

      71 김주홍, "仁川地域의 烽燧(Ⅰ)" 인천광역시립박물관 (創刊) : 2003

      72 인하대학교 박물관·기전문화재연구원, "仁川 文鶴洞 先史遺蹟" 2000

      73 윤용구, "仁川 凌虛臺와 中國使行路" 10 : 2003

      74 陸軍士官學校 陸軍博物館, "京畿道 金浦市 軍事遺蹟 地表調査報告書" 1998

      75 "京畿誌"

      76 白種伍, "京畿·서울·仁川地域 國防遺蹟의 硏究現況" 8 : 2001

      77 백종오, "中國內 高句麗山城의 發掘 現況과 主要 遺構·遺物의 檢討 -2005年∼2016年 發掘調査를 중심으로-" 한국고대학회 (53) : 5-48, 2017

      78 "世宗實錄地理志"

      79 千寬宇, "三國의 國家形成(下)" 一志社 3 : 1976

      80 "三國遺事"

      81 "三國史記"

      82 경기도박물관, "『한강』 경기3대 하천유역 종합학술조사Ⅱ" 2001

      83 백종오, "6세기 중반 신라 丹陽 赤城의 景觀" 한국고대학회 (61) : 5-27, 2019

      84 정붓샘, "1929년 조선박람회와 요시다 하츠사부로의 조선 조감도" 미술사연구회 (37) : 33-66, 2019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동일학술지 더보기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5-31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외대사학 -> 역사문화연구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2-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5 0.75 0.64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6 0.49 1.216 0.28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