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들어 경학원이 담당하던 석전 의례는 조선 지배를 위한 선전도구로 전락해가고 있었고, 지방의 향교에서는 부족한 재정과 교육내용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하여 근대적 유교교육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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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동 (한양대학교)
2020
Korean
명륜학원 ; 명륜전문학원 ; 경학원 ; 유교 ; 종교 ; 세속 ; 본과 ; 연구과 ; 황도유학 ; 조선유도연합회 ; 성균관대학교 ; Myeongryunhagwon(明倫學院) ; Myeongryun Professional School(明倫專門學校) ; Kyonghagwon(經學院) ; Confucianism ; religion ; secular world ; regular course(本科) ; research course(硏究科) ; Japanese Imperial Confucianism(皇道儒學) ; Joseon Federation of Confucianism(朝鮮儒道聯合會) ; Sungkyunkwan University(成均館大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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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들어 경학원이 담당하던 석전 의례는 조선 지배를 위한 선전도구로 전락해가고 있었고, 지방의 향교에서는 부족한 재정과 교육내용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하여 근대적 유교교육 기관을 설치할 여력을 갖지 못했다. 이에 반해 일본에서는 斯文會를 중심으로 湯島聖堂(유시마성당)의 釋奠 의례를 부활하고 새로 유교 고등교육기관인 大東文化學院을 설립하는 등, 유교 부흥의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학 보급과 유교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明倫學院이 설립되었다. 1930년 ‘전문정도 관립 각종학교’ 수준으로 설립된 명륜학원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전문적인 유교 교육기관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正科(2년)와 補習科(1년)로 구성되었으나, 1936년 本科(3년)와 硏究科 체제로 개편되었다. 한문학이 교육내용의 중심을 이루었던 二松學舍나 대동문화학원 등 일본의 유교교육기관과 달리, 명륜학원은 經學 곧 유학이 교육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학교행정과 관련해서는, 경학원의 행정직원이 학교 사무를 담당하였고 조선총독부의 담당과장이 이를 감독하였다. 강사는 전임직과 비전임직으로 나뉘는데, 전임직 강사는 모두 6명의 명단이 확인된다. 비전임직 강사는 3부류로 나뉘는데, 경성제대 교수 혹은 조교, 경학원 혹은 중추원에서 근무하던 조선인 한학자, 편수관이나 시학관 등 조선총독부 관료 등이었다. 그런데 강의를 전체적으로 이끌어간 사람은 두 명의 경성제대 교수들이었다.
학교의 경상 비용은 거의 대부분 지방 향교의 기부금으로 충당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향교에서는 명륜학원 입학생을 추천할 수 있었다. 초기의 입학생은 중등학교 졸업자가 반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대체로 학생들의 연령이 많고 졸업 후 취업에 어려움이 있었다. 면 서기나 군의 주사로 취업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주로 중등학교를 거친 졸업자에게만 주어지는 특전이었다. 1936년 입학자격을 중등학교 졸업자로 높였지만, 취업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교 전문 고등교육기관 설치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었는데, 이런 움직임에 불을 붙인 것은 皇道儒學의 대두와 전시체제 구축이라는 체제적 요구였다. 1942년 승격된 명륜전문학교는 유학, 법률, 경제의 3개 고등학과(3년제)로 편성되었다. 전쟁이 깊어감에 따라 1944년 학교는 폐교되었고, 새로 明倫鍊成所가 설치되었다. 이로써 졸업생 한 명 내지 못한 채 식민지의 유교 전문학교는 짧은 운명을 마감하고 말았다.
해방 후 성균관대학교 설립과 정체성 형성과정에서는 식민지기의 경학원-문묘, 명륜학원-명륜전문학교 그리고 향교가 안고 있던 문제들이 그대로 이전되어 갈등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the 1920s, the Confucian ancestral rites undertaken by Kyonghagwon(經學院) were on their way to becoming a propaganda tool for Japan’s colonial rule of Korea, and the Hyanggyo(鄕校) or Confucian schools(明倫學院), of rural provinces foun...
In the 1920s, the Confucian ancestral rites undertaken by Kyonghagwon(經學院) were on their way to becoming a propaganda tool for Japan’s colonial rule of Korea, and the Hyanggyo(鄕校) or Confucian schools(明倫學院), of rural provinces found themselves ill equipped to build modern institutions of Confucian education due to lacking finances and conflicts surrounding the course of study. On the other hand, there were growing signs of a revival of Confucianism in Japan, most notably led by the Shibunkai(斯文會), as in the restoration of Confucian ancestral rites at Yushima Seido(湯道聖堂) and the establishment of Daito Bunka Gakuin(大東文化學院), an institution for Confucian higher education. It was against this background that Myeongryunhagwon(明倫學院) was opened in colonial Korea, with the purpose of promoting Confucianism and fostering Confucian officers. Established in 1930 as a higher education level miscellaneous school(專門程度 各種學校), Myeongryunhagwon(明倫學院) was the first specialized institution of Confucian education in colonial Korea.
In the beginning, the curriculum of Myeongryunhagwon(明倫學院) was made up of a two-year regular course(正科) and one-year supplementary course(補習科), but was restructured in 1936 into a three-year main course(本科) and a research course(硏究科). Contrary to Japan’s educational institutions of Confucianism such as Nishogakusha(二松學舍) or Daito Bunka Gakuin in which Chinese letters were the core subject of study, Confucian scriptures were the main focus of study at Myeongryunhagwon. Kyonghagwon(經學院)’s administrative staff took care of the school’s administrative affairs, overseen by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朝鮮總督府)‘s officer in charge. There were full time and part time lecturers, and the names of six full time lecturers are shown in existing data. There were three types of part time lecturers: professors or assistant instructors of Keijo Imperial University(京城帝國大學), Korean scholars of Chinese classics working at Kyonghagwon(經學院) or Jungchuwon(中樞院), and bureaucrats of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such as editorial or guidance officers. However, there were actually two Keijo Imperial University professors who played a key role in teaching the courses.
Most of the routine expenses of Myeongryunhagwon(明倫學院) were covered through donations from the Hyanggyo(鄕校) in rural areas. Accordingly, the Hyanggyo held the right to nominate new students to Myeongryunhagwon. In the initial phase, only about half of the students enrolled were middle school graduates. Many of them were older in age and had difficulty finding employment after graduating from Myeongryunhagwon. There were openings for town clerks(郡主事) and officers of the county(面書記), but they were reserved for the ones with a middle school diploma. In 1936, qualifications for entering Myeongryunhagwon were reinforced to include middle school graduation, but it did little to solve the problem of unemployment after Myeongryunhagwon.
At this point, demands for a specialized Confucian higher education institution were growing, fueled by the emergence of Japanese Imperial Confucianism(皇道儒學) and the need to establish a state of war. In 1942, Myeongryunhagwon was elevated to a higher status(Myeongryun Professional School, 明倫專門學校) and reorganized to offer three year advanced courses in three disciplines: Confucianism, law, and economy. But with the war intensifying, the school ended up being closed down in 1944, to be replaced by Myeongryun Training Center(明倫鍊成所). As such, Myeongryun Professional School finished its short run as a Confucian higher education institution of colonial Korea without turning out even one graduate.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the unresolved problems from the colonial period regarding the Kyonghagwon(經學院) and Munmyo(文廟, Confuc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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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배당 임시은사금의 지방비 전환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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