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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 항쟁기 강원지역 재지세력의 동향 = Trends of Indigenous Force in the Gangwon Region During the Three Kingdom's War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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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digenous force in the Gangwon region appear under the name 'Malgal(靺鞨)' from the early article Samkuksagi(三國史記). Malgal is a broad name for a plural and unspecified group of people in outside the borders of Goguryeo. Malgal was a semi-in...

      Indigenous force in the Gangwon region appear under the name 'Malgal(靺鞨)' from the early article Samkuksagi(三國史記). Malgal is a broad name for a plural and unspecified group of people in outside the borders of Goguryeo. Malgal was a semi-independent force that did not form a political body in the Ancient-States politics.
      In the 4th century, when the Three Kingdom's War began, Baekje dominated the area around a particular base in the Bukhangang River Basin. In the second half of the 4th century, Silla began to take over the territory of Yeongdong.
      In the 5th century, Goguryeo entered the Gangwon region. Focusing on the traffic route used by King Gwanggaeto in the south in 400, Goguryeo indirectly controlled the Indigenous force. Since then, Malgal was used as an auxiliary force of Goguryeo in the battle between Baekje and Silla.
      Indigenous force in the Gangwon area were treated differently from the residents of Goguryeo, and this way of governance was the reason why Silla could easily advance to the north of Sobaeksanbaek area around the 6th century. In 551, Baekje and Silla formed an alliance, and they were able to drive Goguryeo out of the Hangang River without major military clashes.
      Silla, which occupies the Gangwon region, absorbs local forces more strongly as Indigenous people, unlike Baekje and Goguryeo. Eventually, by 637, when the Wusuju(牛首州) was established, an attempt was made to organize the reinforcement of the Gangwon region as local residents. And the Indigenous forces in northern Gangwon-do and Hamgyeong-do, which Silla did not subordinate, were incorporated as part of the Balhae.
      Although the indigenous forces of reinstatement in Gangwon-do disappeared through the process of the the three Kingdom's struggles, it can be seen that their activities were not merely a force of change but an important variable in the three Kingdom's strugg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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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강원지역의 재지세력은 『三國史記』 초기기사에서부터 ‘靺鞨’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말갈’은 고구려를 기준으로 변경의 다원적인 불특정 집단인 피지배민에 대한 汎稱으로 생...

      강원지역의 재지세력은 『三國史記』 초기기사에서부터 ‘靺鞨’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말갈’은 고구려를 기준으로 변경의 다원적인 불특정 집단인 피지배민에 대한 汎稱으로 생각되는데, 강원지역의 재지세력인 ‘말갈’은 小國이나 古代國家 단계의 정치체를 형성하지 못한 반독립적인 세력이었다.
      삼국간의 항쟁이 본격화되는 4세기경에 백제가 북한강 유역으로 먼저 진출하여 특정한 거점을 중심으로 지배를 시작하였고, 4세기 후반에는 신라가 영동 지역의 재지세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는 400년 광개토왕의 남정에 사용된 교통로를 중심으로 강원지역의 재지세력을 간접지배하면서, 부용세력으로 백제와 신라의 전투에 투입하였다. 간접지배 하에서 강원지역의 재지세력은 고구려의 주민과는 차별적인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느슨한 지배는 6세기를 전후하여 소백산백 이북의 남한강 상류를 통하여 신라가 진출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또한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을 결성하고 고구려를 임진강-한탄강-추가령구조곡 일대까지 큰 군사적인 충돌 없이 밀어 올릴 수 있었다.
      강원지역을 차지한 신라는 기왕의 백제나 고구려와 다르게 재지세력을 보다 강력하게 지방민으로 흡수하였다. 결국 한강 유역의 牛首州가 설치되는 637년경에는 강원지역의 재지세력을 지방민으로 편제하는 시도가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신라가 복속하지 못한 강원도 북부와 함경도 일대의 재지세력은 발해가 건국되면서 발해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본고를 통하여 강원지역의 재지세력은 삼국간의 항쟁의 과정을 거치면 소멸된 단순한 변경 세력이 아니라, 삼국의 항쟁과정에서 중요한 변수가 되는 존재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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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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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윤성호, "신라의 道薩城·錦峴城 전투와 國原 진출" 한국고대사학회 (87) : 221-25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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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김창석, "맥족의 분포와 『삼국사기』 소전 ‘맥국’에 관한 고찰" 한국고대사학회 (91) : 125-161, 2018

      10 김창석, "고대 강원의 정치체와 물질문화" 국립춘천박물관・강원연구원 강원학연구센터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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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김창석, "고대 강원의 정치체와 물질문화" 국립춘천박물관・강원연구원 강원학연구센터 2018

      11 한지선, "고대 강원의 정치체와 물질문화" 국립춘천박물관・강원연구원 강원학 연구센터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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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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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0.5 0.5 0.4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1 0.58 0.981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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