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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복진의 무대미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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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정관 김복진은 1920년에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조각을 전공했다. 그는 조각 외에도 문학과 연극에 관심이 많아서 유학 온 유학생들과 토월회를 결성했다. 문예서클로 시작된 토월회는 1923년 여름방학을 맞아 경성에서 연극 한편을 올리기로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신극운동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BR/> 1923년 7월에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조선극장에서 토월회 창립공연이 있었다. 창립공연이 끝나고 곧바로 뒤이어 제2회 공연이 이어졌다. 김복진은 두 공연에서 무대장치부를 총괄했다. 창립공연이 끝나고는 안석주와 토월미술연구회도 결성했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창립공연과 제2회 공연의 무대장치는 극찬 일색이다.<BR/> 김복진은 무대장치부에서 연극의 무대를 설계하고 직접 짓고 꾸몄다. 조명도 함께 한 듯한데, 언론은 ‘광선의 응용과 배경 색채의 조화가 매우 볼만하다’고 하였고 또 ‘무대장치가 황홀하다’고도 했다. 무엇보다 김복진의 무대장치는 무대조직법에 있어서 성공한 것이고, 조선에 무대가 생기(生起)한 이래 최초로서 건축적 구성적 요소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극히 참신하였으며, 그의 담려하고 신선미 있는 무대면(舞臺面)은 가히 대중의 이목을 끌만한 매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BR/> 1922년에서 25년에 이르는 4년 여의 시간은 청년 김복진이 걸어갈 사상의 길을 다지는 시간이었다. 토월회에서 신극 무대의 전형을 실험했고, 토월미술연구회, 그리고 정측강습원을 열고 연구생들을 지도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을 조직적으로 펼치기 위해 파스큘라에 참여하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의 배경에는 토월회가 있었다. 그는 늘 현실의 문제를 고민했고, 그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예술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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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관 김복진은 1920년에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조각을 전공했다. 그는 조각 외에도 문학과 연극에 관심이 많아서 유학 온 유학생들과 토월회를 결성했다. 문예서클로 시작된 토월회는 1923...

      정관 김복진은 1920년에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조각을 전공했다. 그는 조각 외에도 문학과 연극에 관심이 많아서 유학 온 유학생들과 토월회를 결성했다. 문예서클로 시작된 토월회는 1923년 여름방학을 맞아 경성에서 연극 한편을 올리기로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신극운동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BR/> 1923년 7월에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조선극장에서 토월회 창립공연이 있었다. 창립공연이 끝나고 곧바로 뒤이어 제2회 공연이 이어졌다. 김복진은 두 공연에서 무대장치부를 총괄했다. 창립공연이 끝나고는 안석주와 토월미술연구회도 결성했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창립공연과 제2회 공연의 무대장치는 극찬 일색이다.<BR/> 김복진은 무대장치부에서 연극의 무대를 설계하고 직접 짓고 꾸몄다. 조명도 함께 한 듯한데, 언론은 ‘광선의 응용과 배경 색채의 조화가 매우 볼만하다’고 하였고 또 ‘무대장치가 황홀하다’고도 했다. 무엇보다 김복진의 무대장치는 무대조직법에 있어서 성공한 것이고, 조선에 무대가 생기(生起)한 이래 최초로서 건축적 구성적 요소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극히 참신하였으며, 그의 담려하고 신선미 있는 무대면(舞臺面)은 가히 대중의 이목을 끌만한 매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BR/> 1922년에서 25년에 이르는 4년 여의 시간은 청년 김복진이 걸어갈 사상의 길을 다지는 시간이었다. 토월회에서 신극 무대의 전형을 실험했고, 토월미술연구회, 그리고 정측강습원을 열고 연구생들을 지도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을 조직적으로 펼치기 위해 파스큘라에 참여하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의 배경에는 토월회가 있었다. 그는 늘 현실의 문제를 고민했고, 그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예술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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