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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성왕의 국호 개칭과 정치적 지향 = Renaming of the State of King Seong in Baekjae and His political Int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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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4748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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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글은 백제 성왕이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개칭한 사건을 통해, 그가 추구했던 정치적 지향을 살펴본 것이다. 논의는 크게 세 단계로 진행하였다. 먼저 국호 개칭의 배경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백제의 역대 국호의 연원을 분석하고, ‘南扶餘’에 담긴 부여 계승의 의미를 파악하였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국호를 통해 지향했던 성왕의 정치적 목적을 시조묘 제사와 지방통치제도의 개편을 중심으로 추론하였다.
      475년에 이루어진 웅진 천도로 인하여 백제의 내부 사정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동성왕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즉위하였고, 권력의 안정화를 위해 재지세력과의 타협을 도모했다. 그러나 동성왕의 계속된 군사 활동으로 재지세력들이 반발하였고, 동성왕은 위사좌평 백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시해되었다. 무령왕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재지세력에 대한 통제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졌다. 무령왕은 국가를 재정비하기 위해 국내외 백성들의 동향을 관리하였고, 遊食者들을 활용하여 제방사업과 농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아울러 무령왕은 512년에 이른바 ‘任那 四縣’을, 513년에는 己汶을 영역화하였다. 뒤이어 성왕이 529년 帶沙(多沙津)를 병합하여 섬진강 수계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성왕은 섬진강 수계를 장악한 뒤, 영산강 유역에 대한 병합작업에 돌입하였다. 성왕은 영산강 유역에 대하여, 주변 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서서히 장악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는 무령왕 대 유리하게 전개되던 대 고구려전 양상이 악화되어 영산강유역에서 군사 활동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이다. 성왕은 신흥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복암리 고분군 축조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반남 고분군 세력을 압박하였고, 마침내 사비 천도에 즈음하여 영산강 유역 마한 세력에 대한 병합작업을 완료하였다. 즉 성왕이 국호를 개칭하였던 요인에는 영산강유역의 마한세력을 병합함으로써 국가의 전반적인 상황이 크게 변화한 배경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 개칭된 남부여라는 국호에는 백제의 새로운 지향점이 내재되어 있었다. 백제의 역대 국호가 개칭된 배경에는 정치 단계의 발전과 영토의 확장이라는 요인이 있었다. 백제 건국 이후에는 十濟, 伯濟, 百濟, 尉禮國, 鷹準, 羅鬪, 南扶餘의 국호를 사용했는데, 특히 十濟-伯濟-百濟-南扶餘의 변천과정은 백제가 마한을 병합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十濟-伯濟-百濟의 국호에는 마한과의 연관성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성왕은 마한과의 연관성을 해소하고, 왕실의 출자 인식인 ‘扶餘’를 드러내고자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한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가 ‘南扶餘’의 국호를 사용한 데에는 ‘북쪽의 부여’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백제가 상정한 ‘북쪽의 부여’는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사서에 기록된 북부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이는 사서의 찬자들이 상정한 북부여가 고구려의 시각에서 호명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백제가 상정한 ‘북쪽의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를 포함하여 북방계통 국가들의 원류로서, 기원전 2-3세기경에 존속했던 ‘原扶餘’를 의미한다. 즉 성왕이 개칭한 남부여에는 왕실의 부여 계승 의식을 드러냄과 동시에 原扶餘를 재건하고자 한 의지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성왕은 原扶餘 계승에 대한 실현으로써 새롭게 仇台廟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분주에 구태와 함께 優台가 기록되고 있는 점과, 우태가 『삼국지』와 『후한서』 동이전에서 왕 아래의 고위 관직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볼 때, 구태가 특정 인명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온조가 비류집단을 아우르고 국호를 백제로 개칭한 것과 마한을 병합한 행적은, 성왕이 마지막 마한 세력을 병합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했던 행적과 유사하다. 이에 성왕이 구태묘 제사를 시행한 것은 백제의 실질적 건국주인 온조를 구태로 설정하여 추앙하고자 한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성왕은 구태묘 제사를 실시함과 동시에 담로제를 방ㆍ군ㆍ성제로 개편하였다. 이 가운데 5방제는 음양오행에 입각하여, 국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실시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특히 남방은 무령왕 대부터 성왕 대에 확보한 섬진강 수계와 영산강 유역을 통치하기 위한 행정구역으로 설정되었다. 남방의 치소는 무진주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진주는 동성왕 대 탐라 공략을 위해 진출한 지역으로, 백제의 영향권 안에 있던 지역이었다. 또한 『삼국사기』 지리 백제조에서는 무진주에 15군이 소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37군 체제에서 22담로가 22군으로 개편되고, 새롭게 편입된 마지막 마한 소국들을 15군으로 개편하여 통치하고자 했음을 가늠하게 한다.
      요컨대, 성왕의 남부여 국호 개칭은 마지막 마한 세력을 병합한 이후, 왕실의 출자 인식인 ‘扶餘’로서 마한 세력을 통치하고자 한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왕실의 부여 계승 의식을 국호에 드러냄으로써 왕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 정치적 지향점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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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백제 성왕이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개칭한 사건을 통해, 그가 추구했던 정치적 지향을 살펴본 것이다. 논의는 크게 세 단계로 진행하였다. 먼저 국호 개칭의 배경을 살펴보았다....

      이 글은 백제 성왕이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개칭한 사건을 통해, 그가 추구했던 정치적 지향을 살펴본 것이다. 논의는 크게 세 단계로 진행하였다. 먼저 국호 개칭의 배경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백제의 역대 국호의 연원을 분석하고, ‘南扶餘’에 담긴 부여 계승의 의미를 파악하였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국호를 통해 지향했던 성왕의 정치적 목적을 시조묘 제사와 지방통치제도의 개편을 중심으로 추론하였다.
      475년에 이루어진 웅진 천도로 인하여 백제의 내부 사정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동성왕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즉위하였고, 권력의 안정화를 위해 재지세력과의 타협을 도모했다. 그러나 동성왕의 계속된 군사 활동으로 재지세력들이 반발하였고, 동성왕은 위사좌평 백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시해되었다. 무령왕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재지세력에 대한 통제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졌다. 무령왕은 국가를 재정비하기 위해 국내외 백성들의 동향을 관리하였고, 遊食者들을 활용하여 제방사업과 농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아울러 무령왕은 512년에 이른바 ‘任那 四縣’을, 513년에는 己汶을 영역화하였다. 뒤이어 성왕이 529년 帶沙(多沙津)를 병합하여 섬진강 수계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성왕은 섬진강 수계를 장악한 뒤, 영산강 유역에 대한 병합작업에 돌입하였다. 성왕은 영산강 유역에 대하여, 주변 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서서히 장악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는 무령왕 대 유리하게 전개되던 대 고구려전 양상이 악화되어 영산강유역에서 군사 활동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이다. 성왕은 신흥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복암리 고분군 축조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반남 고분군 세력을 압박하였고, 마침내 사비 천도에 즈음하여 영산강 유역 마한 세력에 대한 병합작업을 완료하였다. 즉 성왕이 국호를 개칭하였던 요인에는 영산강유역의 마한세력을 병합함으로써 국가의 전반적인 상황이 크게 변화한 배경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 개칭된 남부여라는 국호에는 백제의 새로운 지향점이 내재되어 있었다. 백제의 역대 국호가 개칭된 배경에는 정치 단계의 발전과 영토의 확장이라는 요인이 있었다. 백제 건국 이후에는 十濟, 伯濟, 百濟, 尉禮國, 鷹準, 羅鬪, 南扶餘의 국호를 사용했는데, 특히 十濟-伯濟-百濟-南扶餘의 변천과정은 백제가 마한을 병합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十濟-伯濟-百濟의 국호에는 마한과의 연관성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성왕은 마한과의 연관성을 해소하고, 왕실의 출자 인식인 ‘扶餘’를 드러내고자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한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가 ‘南扶餘’의 국호를 사용한 데에는 ‘북쪽의 부여’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백제가 상정한 ‘북쪽의 부여’는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사서에 기록된 북부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이는 사서의 찬자들이 상정한 북부여가 고구려의 시각에서 호명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백제가 상정한 ‘북쪽의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를 포함하여 북방계통 국가들의 원류로서, 기원전 2-3세기경에 존속했던 ‘原扶餘’를 의미한다. 즉 성왕이 개칭한 남부여에는 왕실의 부여 계승 의식을 드러냄과 동시에 原扶餘를 재건하고자 한 의지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성왕은 原扶餘 계승에 대한 실현으로써 새롭게 仇台廟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분주에 구태와 함께 優台가 기록되고 있는 점과, 우태가 『삼국지』와 『후한서』 동이전에서 왕 아래의 고위 관직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볼 때, 구태가 특정 인명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온조가 비류집단을 아우르고 국호를 백제로 개칭한 것과 마한을 병합한 행적은, 성왕이 마지막 마한 세력을 병합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했던 행적과 유사하다. 이에 성왕이 구태묘 제사를 시행한 것은 백제의 실질적 건국주인 온조를 구태로 설정하여 추앙하고자 한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성왕은 구태묘 제사를 실시함과 동시에 담로제를 방ㆍ군ㆍ성제로 개편하였다. 이 가운데 5방제는 음양오행에 입각하여, 국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실시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특히 남방은 무령왕 대부터 성왕 대에 확보한 섬진강 수계와 영산강 유역을 통치하기 위한 행정구역으로 설정되었다. 남방의 치소는 무진주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진주는 동성왕 대 탐라 공략을 위해 진출한 지역으로, 백제의 영향권 안에 있던 지역이었다. 또한 『삼국사기』 지리 백제조에서는 무진주에 15군이 소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37군 체제에서 22담로가 22군으로 개편되고, 새롭게 편입된 마지막 마한 소국들을 15군으로 개편하여 통치하고자 했음을 가늠하게 한다.
      요컨대, 성왕의 남부여 국호 개칭은 마지막 마한 세력을 병합한 이후, 왕실의 출자 인식인 ‘扶餘’로서 마한 세력을 통치하고자 한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왕실의 부여 계승 의식을 국호에 드러냄으로써 왕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 정치적 지향점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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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ⅰ
      • Ⅰ. 머리말 - 1
      • Ⅱ. 국호 개칭의 토대와 배경
      • 국문초록 - ⅰ
      • Ⅰ. 머리말 - 1
      • Ⅱ. 국호 개칭의 토대와 배경
      • 1. 웅진 도읍기의 정치 상황 - 5
      • 2. 국호 개칭의 영토적 기반 - 11
      • Ⅲ. 국호 '남부여'의 연원과 맥락
      • 1. 왕조의 국호 연원과 추이 - 18
      • 2. 왕실의 출자 인식과 '남부여' - 23
      • Ⅳ. 국토의 재편과 정치적 지향
      • 1. 국가 제의의 확립과 구태묘 - 29
      • 2. 국토와 지배체제의 개편 - 35
      • Ⅴ. 맺음말 - 40
      • 참고문헌 - 42
      • Abstract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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