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빌립보 공동체에 자신을 소개하기를 종이라 소개하였고, 그리스도 예수를 소개하기를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라고 소개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
바울은 빌립보 공동체에 자신을 소개하기를 종이라 소개하였고, 그리스도 예수를 소개하기를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라고 소개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과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권면한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처럼 살기를 발버둥 쳤고, 그리스도인들 또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처럼 살기를 권면한다. 역으로 말한다면,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바울의 권면의 말들은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그들에게 말한 것이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존재 양식 안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에 속한 존재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됨이란 하나님의 은혜이다.
빌립보 서신을 통해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이 결국 그리스도 죽음의 사건이 현실화 되었다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바울은 희생과 고난 없이 부활만을 기대하는 자들에 대해서 거부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의 고난을 잊고 스스로 구원받은 자라고 생각하고 구원의 축복의 특권을 누리고 싶은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오히려 불신자라고 선언한다.
빌리보 서신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뻐해야 하는 존재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기뻐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의 핵심은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이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물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그 종의 모습은 결국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며 동시에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인간은 사랑하면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신약성서 내에서 예수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이웃 사랑을 구현했고, 그것을 사도바울은 구약의 완성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는 데”에서 다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의 끝(완성)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사랑의 실현은 그리스도의 삶 자체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사랑(아가페)이 세상의 물존(물질)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존재는 늘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를 흔들어 놓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내 삶의 자리를 흔들어 놓기 때문에 내가 몸 담고 있는 이곳의 질서가 달라 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라는 고백은 나의 삶의 자리가 그리스도의 존재로 인해 나에게 척도의 변이(삶의 질서 바뀌는 것을)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서의 질서는, 물존(물질)을 추구하는 삶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는 이 질서를 거부하는 존재이다. 예수와 바울 역시 이런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는 자들이었다. 우리가 이런 존재인식 속에 살아가면, 우리가 어떤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는지가 나타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그리스도가 우리 삶 속에서 새로운 피로물로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