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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고구려왕과 왕족의 성씨 사용례의 분석 = An Analysis of Examples of Surname Usage by Royals and the Monarch of Kogur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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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8565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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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Among the names of kings of Koguryeo, Koryeon(Jangsu-wang) is the first name to use a surname. After Koryeon, the names of kings(hwi) take on a different style from the names resembling the traditional Koguryeo language such as Jumong and Yi-ryeon(Eojiji). From Keoryeon(Jangsu- wang) to Bojang(Bojang-wang), their first names were usually composed of two letters. They took one letter and added the surname to make a surname and first name. This kind of composition lets one assume that after Jangsu-wang, the names weren’t made as surname-first name to begin with and rather that they made the first name(hwi) first and adapted it to the surname-first name structure. If we take into account the fact that relations with China began under Jangsu-wang and that the surname-first name structure of royals originates from Chinese records, we can determine that surnames weren’t used daily from birth and had a limited usage in specific situations such as exchanges with China.
      It is noticeable that those who identify themselves as Koguryeo royals usually do not use a surname, while those who do with the surname Ko are usually military officials or have a military characteristic. The fact that the users of surnames lean toward a certain demographic in occupations can mean these users are not originally royals. Like the example of Mil, the ancestor of Koja, it is likely the result of bestowing names to those who provided military services according to the national need. Yomyo, Yeonsu and Hyejin, while not having surnames in Koguryeo, seem to have taken on the surname Ko out of necessity when moving to Tang according to their places of birth.
      An analysis of royals and users of the surname Ko shows that since not all royals used surnames in everyday and general circumstances, the surname failed to be an identification of royalty. Also, since it was used in a limited capacity for specific objectives, only personally, the surname failed to be shared among the entirety of the patrilineal group. The usage of surnames increased in the 7th century, but the impending downfall of the country meant the surname could never achieve its intended use in society, and that Chinese surname-first name structures could not overpower the tradition of Koguryeo’s indigenous naming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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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mong the names of kings of Koguryeo, Koryeon(Jangsu-wang) is the first name to use a surname. After Koryeon, the names of kings(hwi) take on a different style from the names resembling the traditional Koguryeo language such as Jumong and Yi-ryeon(Eoj...

      Among the names of kings of Koguryeo, Koryeon(Jangsu-wang) is the first name to use a surname. After Koryeon, the names of kings(hwi) take on a different style from the names resembling the traditional Koguryeo language such as Jumong and Yi-ryeon(Eojiji). From Keoryeon(Jangsu- wang) to Bojang(Bojang-wang), their first names were usually composed of two letters. They took one letter and added the surname to make a surname and first name. This kind of composition lets one assume that after Jangsu-wang, the names weren’t made as surname-first name to begin with and rather that they made the first name(hwi) first and adapted it to the surname-first name structure. If we take into account the fact that relations with China began under Jangsu-wang and that the surname-first name structure of royals originates from Chinese records, we can determine that surnames weren’t used daily from birth and had a limited usage in specific situations such as exchanges with China.
      It is noticeable that those who identify themselves as Koguryeo royals usually do not use a surname, while those who do with the surname Ko are usually military officials or have a military characteristic. The fact that the users of surnames lean toward a certain demographic in occupations can mean these users are not originally royals. Like the example of Mil, the ancestor of Koja, it is likely the result of bestowing names to those who provided military services according to the national need. Yomyo, Yeonsu and Hyejin, while not having surnames in Koguryeo, seem to have taken on the surname Ko out of necessity when moving to Tang according to their places of birth.
      An analysis of royals and users of the surname Ko shows that since not all royals used surnames in everyday and general circumstances, the surname failed to be an identification of royalty. Also, since it was used in a limited capacity for specific objectives, only personally, the surname failed to be shared among the entirety of the patrilineal group. The usage of surnames increased in the 7th century, but the impending downfall of the country meant the surname could never achieve its intended use in society, and that Chinese surname-first name structures could not overpower the tradition of Koguryeo’s indigenous naming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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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고구려의 왕명 가운데 고련(장수왕)이 성명식 왕명의 가장 이른 예이다. 고련 이후 고구려왕들의 이름(휘)은 주몽부터 伊連(於只支)까지의 전통적인 고구려 언어로 만들어진 듯한 이름과 다른 분위기를 가진다. 巨璉(장수왕)~ 寶臧(보장왕)까지의 이름은 대체로 두 글자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한 글자를 선택하여 성씨를 붙이는 방식으로 성명을 만들었다. 이러한 성명 제작방식은, 장수왕 이후 왕의 이름이, 처음부터 성명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름(휘)이 먼저 만들어지고, 후에 성명식 이름을 만들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장수왕대 본격적으로 중국과 통교하였고, 姓稱 왕명의 원전이 중국사서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성씨가 태어날 때부터 일상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중국과의 교류 등 특정 목적상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
      고구려 왕족임을 밝히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칭하지 않는 가운데, 왕성인 고씨 성칭자들은 대다수가 무장이거나 무장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렇듯 고씨 성칭자들이 특정 직책에 치우친 현상은 이들 성칭자들이 본래는 왕족이 아니었음을 반증한다고 생각한다. 고자의 선조인 밀의 사례와 같이 국가적 필요에 의해 무공을 세운 이들에게 사성이 집중되다 보니 나타나게 된 결과일 것이다. 또한 요묘, 연수와 혜진 등은 고구려에서는 성씨가 없다가 당나라로 옮겨 가 살게 되면서 필요에 의하여 출신지명을 따라 성씨를 자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족과 고씨 성칭자들의 이름을 분석한 결과, 왕족들 모두가 성씨를 일상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특정 목적에 한정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성씨가 부계 혈연집단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이름이 되지 못하고 있다. 성씨는 왕족의 표식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7세기 들어서 이전에 비해 성씨의 사용이 늘고 있으나, 곧 국가가 멸망함으로써 고구려 사회에서 성씨는 그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고, 중국식 성씨문화는 고구려 고유의 이름 문화가 가진 전통성을 압도하지 못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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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왕명 가운데 고련(장수왕)이 성명식 왕명의 가장 이른 예이다. 고련 이후 고구려왕들의 이름(휘)은 주몽부터 伊連(於只支)까지의 전통적인 고구려 언어로 만들어진 듯한 이름과 다...

      고구려의 왕명 가운데 고련(장수왕)이 성명식 왕명의 가장 이른 예이다. 고련 이후 고구려왕들의 이름(휘)은 주몽부터 伊連(於只支)까지의 전통적인 고구려 언어로 만들어진 듯한 이름과 다른 분위기를 가진다. 巨璉(장수왕)~ 寶臧(보장왕)까지의 이름은 대체로 두 글자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한 글자를 선택하여 성씨를 붙이는 방식으로 성명을 만들었다. 이러한 성명 제작방식은, 장수왕 이후 왕의 이름이, 처음부터 성명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름(휘)이 먼저 만들어지고, 후에 성명식 이름을 만들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장수왕대 본격적으로 중국과 통교하였고, 姓稱 왕명의 원전이 중국사서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성씨가 태어날 때부터 일상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중국과의 교류 등 특정 목적상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
      고구려 왕족임을 밝히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칭하지 않는 가운데, 왕성인 고씨 성칭자들은 대다수가 무장이거나 무장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렇듯 고씨 성칭자들이 특정 직책에 치우친 현상은 이들 성칭자들이 본래는 왕족이 아니었음을 반증한다고 생각한다. 고자의 선조인 밀의 사례와 같이 국가적 필요에 의해 무공을 세운 이들에게 사성이 집중되다 보니 나타나게 된 결과일 것이다. 또한 요묘, 연수와 혜진 등은 고구려에서는 성씨가 없다가 당나라로 옮겨 가 살게 되면서 필요에 의하여 출신지명을 따라 성씨를 자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족과 고씨 성칭자들의 이름을 분석한 결과, 왕족들 모두가 성씨를 일상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특정 목적에 한정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성씨가 부계 혈연집단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이름이 되지 못하고 있다. 성씨는 왕족의 표식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7세기 들어서 이전에 비해 성씨의 사용이 늘고 있으나, 곧 국가가 멸망함으로써 고구려 사회에서 성씨는 그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고, 중국식 성씨문화는 고구려 고유의 이름 문화가 가진 전통성을 압도하지 못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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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李鍾書, "羅末麗初 姓氏 사용의 擴大와 그 背景" 37 : 1997

      2 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3 송준호, "한국의 씨성제에 있어서 본관 및 시조의 문제-한중 양국의 전통사회를 비교하는 입장에서" 109 : 1986

      4 李樹健, "한국의 성씨와 족보" 서울대출판부 2003

      5 이기동, "한국사강좌-고대편 1" 일조각 1982

      6 도수희, "한국 성명의 생성 발달" 9 (9): 1999

      7 여호규,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학회 (98) : 97-140, 2020

      8 동북아역사재단 ; 한국고대사학회, "충주고구려비 공동 판독안" 한국고대사학회 (98) : 5-8, 2020

      9 김광수, "중국정사 동이전 역주(一)" 국사편찬위원회 1987

      10 李成茂, "조선시대 사상사연구 2" 지식산업사 2009

      1 李鍾書, "羅末麗初 姓氏 사용의 擴大와 그 背景" 37 : 1997

      2 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3 송준호, "한국의 씨성제에 있어서 본관 및 시조의 문제-한중 양국의 전통사회를 비교하는 입장에서" 109 : 1986

      4 李樹健, "한국의 성씨와 족보" 서울대출판부 2003

      5 이기동, "한국사강좌-고대편 1" 일조각 1982

      6 도수희, "한국 성명의 생성 발달" 9 (9): 1999

      7 여호규,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학회 (98) : 97-140, 2020

      8 동북아역사재단 ; 한국고대사학회, "충주고구려비 공동 판독안" 한국고대사학회 (98) : 5-8, 2020

      9 김광수, "중국정사 동이전 역주(一)" 국사편찬위원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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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손영종, "조선단대사 2(고구려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7

      12 이종욱, "전해종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一潮閣 1979

      13 권덕영, "재당 한인 묘지명 연구(역주편)"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1

      14 임기환, "온달・서동설화와 6세기 사회" 22 : 1993

      15 이기백, "온달전의 검토-고구려 귀족사회의 신분질서에 대한 별견" 3 : 1967

      16 안정준, "새로 발견된 高句麗 遺民 「高延福墓志銘」"

      17 趙法鍾, "삼국시대 신분제 연구 : 피지배층의 신분양상을 중심으로" 高麗大學校 大學院 1995

      18 전덕재, "삼국사기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2018

      19 박윤선, "백제의 중국식 이름문화 수용 과정의 고찰- 백제왕과 왕족의 이름을 중심으로 -" 백제학회 (25) : 127-157, 2018

      20 박윤선, "백제 인명의 이해 시론 - 막고와 해를 중심으로" 백제학회 (21) : 97-118, 2017

      21 금경숙, "고구려전기 정치사 연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04

      22 여호규, "고구려와 모용연의 조공・책봉관계 연구, 한국 고대국가와 중국왕조의 조공・책봉관계 연구" 고구려연구재단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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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여호규,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2014

      26 임기환,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2004

      27 박윤선, "고구려 왕명과 왕호의 분석— 고구려 성씨문화 이해의 토대작업으로서 —" 수선사학회 (80) : 101-134, 2022

      28 노중국, "고구려 국상고(하)" 17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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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魏書"

      32 金光洙, "高句麗-古代-集權國家의 成立에 관한 硏究" 연세대학교 대학원 1984

      33 김영관, "高句麗 遺民 高鐃苗 墓誌 檢討" 한국고대사학회 (56) : 367-39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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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金賢淑, "高句麗 初期 那部의 分化와 貴族의 姓氏" 16 :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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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隋書"

      38 김효정, "金文을 통해본 주대 여성상 연구" 경성대학교 2014

      39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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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舊唐書"

      42 羅振玉, "石刻史料新編 2-15" 新文豐出版公司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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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井上秀雄,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974

      50 "新唐書"

      51 "擇里志"

      52 "後漢書"

      53 "左傳"

      54 "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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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周書"

      57 井上秀雄, "古代東アジア史論集(末松保和博士古稀記念)上" 吉川弘文館 1978

      58 坂元義種, "古代東アジア世界の日本と朝鮮" 吉川弘文館 1978

      59 "南齊書"

      60 "南史"

      61 "北齊書"

      62 "北史"

      63 "冊府元龜"

      64 "全唐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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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김창호, "中原高句麗碑의 재검토" 47 : 1987

      67 박진석, "中原高句麗碑의 建立年代 考証" 10 : 2000

      68 金英夏, "中原高句麗碑의 建碑 年代" 25 : 1983

      69 임기환, "中原高句麗碑를 통해 본 高句麗와 新羅의 關係" 10 : 2000

      70 "三國遺事"

      71 "三國志"

      72 申東河, "三國史記의 原典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5

      73 井上秀雄, "三國史記の原典をもとめて" 48 : 1968

      74 "三國史記"

      75 高寬敏, "“三国史記”原典的硏究" 雄山閣 1996

      76 장창은,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高句麗의 南進과 對新羅 領域向方" 55 : 2013

      77 김현숙, "4~6세기경 소백산맥 이동지역의 영역 향방" 한국고대사학회 26 : 75-114, 2002

      78 田中俊明, ""三国史記"撰進と"旧三国史"" 83 : 1977

      79 田中俊明, ""三国史記"中国史書引用記事の再檢討" 104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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