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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초기 開城 厚陵 건립의 정치사적 의미 = 태종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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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는 태종-세종대 개성에 건설된 定宗과 그의 비 定安王后의 무덤인 厚陵의 조성에 내포된 정치적 의미를 태종대 정안왕후의 상례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2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본고는 태종-세종대 개성에 건설된 定宗과 그의 비 定安王后의 무덤인 厚陵의 조성에 내포된 정치적 의미를 태종대 정안왕후의 상례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2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한 靖安君(태종)은 “동생을 아들로 삼겠다”는 정종의 입론에 따라 世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태종은 정종을 상왕으로, 정종비를 大妃로 추봉하였는데, 상왕과 부자관계가 수립됨에 따라 대비와는 의례적으로 母子관계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상왕과 대비가 전면적인 권한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權知國事에 머물렀던 정종의 위상은 대명관계에서 현저히 약화되었으며, 태조의 후궁이 誠妃로 책봉되어 왕비의 위상이 부여됨으로써 유일한 대비로서의 위상도 약화되었다.
      정종비는 사망 후 ‘定安王后’로 시호가 정해지고 ‘厚陵’이 개성에 건설되었다. 상례에서 ‘兄妻’나 ‘母’라 칭하는 것을 문제로 삼아 명나라에 대비의 사망을 알리지 않은 것은 嫡妃로서 태종의 母后라는 명분을 명나라에 그대로 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종은 사망 당일부터 제사를 모두 섭행하는 등 상례의 전 과정에서 상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안왕후의 위상은 태조의 嫡長子로서 즉위하고 嫡長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에게 자신의 왕위정통성과도 관련되는 중요한 요소였다. 후릉의 건설 역시 정종의 뜻이 반영된 것이다.
      정안왕후의 졸기에 “上王의 嫡妃”임을 명시되어 있는데, 태종의 왕위 계승이 이로부터 연원하기 때문이었다. 태종 4년에 세워진 齊陵碑에는 태조와 神懿王后의 적장자인 정종의 위상과 정종과 대비 사이에 적자가 없어 태종을 세자로 삼았다는 태종의 즉위 명분을 충실히 정리하였다. 또한 신의왕후가 正嫡으로 응당 왕비가 되었어야 하는데, 개국에 앞서 사망함으로써 그러지 못한 아쉬움을 표현하여 1차 왕자의 난을 정당화하였다. 태종이 즉위한 후에도 端午와 秋夕의 제사를 정종이 직접 지낸 것은 신의왕후의 장자라는 위상에 따른 것이었다.
      결국 태종과 정종이 후릉을 한양이 아니라 개성에 조성한 것은 이곳에 있는 제릉과 여러 의례를 연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의왕후와 정안왕후의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신의왕후의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정종의 즉위 명분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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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article centers on the political meaning connoted in construction of Hurung Royal tomb which was the tomb of King Jeongjong(定宗) and his wife Queen Jeongan Whang hu(定安王后), built through King Taejong-Saejong(世宗) period, and the next...

      This article centers on the political meaning connoted in construction of Hurung Royal tomb which was the tomb of King Jeongjong(定宗) and his wife Queen Jeongan Whang hu(定安王后), built through King Taejong-Saejong(世宗) period, and the next paragraph is abstract of the discussed contents.
      Jeongangun who came to power through the Second Strife of Princes was proclaimed the crown prince of King Jeongjong who was his older brother, and ascended to the throne. As he proclaimed King Jeongjong as the abdicated king and the queen as queen dowager(大妃) after his ascending the throne, blood relationship with sister-in-law turned to the ritualistic mother-son relationship. Justifying that the queen of King Jeongjong didn’t have the son as the cause, King Jeongjong made his older brother as his son. This cause is intactly extension of the logic that King Jeongjong who denied the successor selection of his father, King Taejo(太祖) through the First Strife of the Princes justly succeeded to the throne as his primogeniture.
      Going through this political course, status of the queen mother was embossed as important element in regard to the throne legitimacy of the heir. Because of that, when Queen Jengan Whang hu died in the 12th year of King Taejong’s reign, he built Hurung Royal tomb, tomb of Queen Jeongan Whang hu in Gaeseong even though he made Geonwolleung Royal tomb(建元陵), tomb of King Taejo close by Hanyang(漢陽) after he returned to Hanyang. As building Hurung Royal tomb close by Jeleung Royal tomb(齊陵), tomb of Queen Sinyi Whang hu(神懿王后) who was the mother of King Jeongjong and Taejong, he emphasized status of the queen and tried to rationalize the legitimacy of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with King Taejo, Jeongjong and Tae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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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Ⅰ. 머리말
      • Ⅱ. 태종 즉위와 定宗·定安王后의 위상 변화
      • Ⅲ. 厚陵 건설의 배경과 의미
      • Ⅳ. 맺음말
      • 참고문헌
      • Ⅰ. 머리말
      • Ⅱ. 태종 즉위와 定宗·定安王后의 위상 변화
      • Ⅲ. 厚陵 건설의 배경과 의미
      • Ⅳ. 맺음말
      • 참고문헌
      • 국문초록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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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박홍규,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의 권력정치: '양권'(揚權)의 정치술(政治術)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29 (29): 3-31, 2006

      2 윤정, "태종 18년 開城 移御와 한양 還都의 정치사적 의미- 讓寧大君 세자 폐립과 세종 즉위과정에 대한 공간적 이해-" 서울학연구소 (50) : 109-144, 2013

      3 趙南旭, "조선조 太宗의 政治哲學 연구" 27 : 1997

      4 윤정, "조선시대 魂殿 운영에 대한 기초적 정리" 28 : 2005

      5 남지대, "조선 태종의 즉위과정과 내세운 명분" 호서사학회 (69) : 39-70, 2014

      6 남지대, "조선 태종의 왕위와 왕통의 정당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63) : 247-276, 2013

      7 남지대, "조선 태종의 왕권 확립" 역사문화연구소 (53) : 159-192, 2015

      8 남지대, "조선 태종의 권위 확충" 규장각한국학연구원 (45) : 39-67, 2014

      9 윤정, "정종대 상왕 태조의 임어와 개성 덕수궁" 서울학연구소 (58) : 167-208, 2015

      10 윤정, "세종 초 上王(太宗)의 궁궐경영과 그 정치적 의미 - 壽康宮·豊壤離宮을 중심으로 -" 서울학연구소 (41) : 99-137, 2010

      1 박홍규,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의 권력정치: '양권'(揚權)의 정치술(政治術)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29 (29): 3-31, 2006

      2 윤정, "태종 18년 開城 移御와 한양 還都의 정치사적 의미- 讓寧大君 세자 폐립과 세종 즉위과정에 대한 공간적 이해-" 서울학연구소 (50) : 109-144, 2013

      3 趙南旭, "조선조 太宗의 政治哲學 연구" 27 : 1997

      4 윤정, "조선시대 魂殿 운영에 대한 기초적 정리" 28 : 2005

      5 남지대, "조선 태종의 즉위과정과 내세운 명분" 호서사학회 (69) : 39-70, 2014

      6 남지대, "조선 태종의 왕위와 왕통의 정당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63) : 247-276, 2013

      7 남지대, "조선 태종의 왕권 확립" 역사문화연구소 (53) : 159-192, 2015

      8 남지대, "조선 태종의 권위 확충" 규장각한국학연구원 (45) : 39-67, 2014

      9 윤정, "정종대 상왕 태조의 임어와 개성 덕수궁" 서울학연구소 (58) : 167-208, 2015

      10 윤정, "세종 초 上王(太宗)의 궁궐경영과 그 정치적 의미 - 壽康宮·豊壤離宮을 중심으로 -" 서울학연구소 (41) : 99-137, 2010

      11 윤정, "세종 3년 上王 太宗의 漢陽都城 改築의 정치사적 의미" 서울역사편찬원 (83) : 5-40, 2013

      12 장지연, "고려후기 개경 궁궐 건설 및 운용방식" 한국역사연구회 (60) : 207-243, 2006

      13 김지희, "고려 우왕대 이인임 세력의 혼인이 인적관계에 미치는 영향" 인문학연구원 (30) : 7-44, 2016

      14 崔淑, "韓國史의 構造와 展開 : 河炫綱敎授定年紀念論叢" 2000

      15 李亨雨, "禑王 初期의 政治狀況과 池奫 : 禑王 3년 3월 이전을 중심으로" 94 : 1996

      16 "東國輿地備考"

      17 姜芝嫣, "李仁任 執權期 政治勢力과 政局 動向" 22 : 1995

      18 崔承熙, "朝鮮初期政治史硏究" 2002

      19 安俊姬, "朝鮮 初期 太宗의 執權過程과 趙思義의 亂" 5 : 1993

      20 朴元豪, "明初 朝鮮의 遼東征伐計劃과 表箋問題" 19 : 1975

      21 朴元豪, "明初 文字獄과 朝鮮表箋問題" 2 : 1975

      22 "敦寧寶牒"

      23 윤정, "定宗의 즉위 과정과 즉위 명분 - 1차 왕자의 난과 神懿王后 추존 -" 진단학회 (119) : 81-112, 2013

      24 "定宗實錄"

      25 "太祖實錄"

      26 윤정, "太祖代貞陵건설의 정치사적 의미" 서울학연구소 (37) : 155-191, 2009

      27 李明洙, "太祖 李成桂의 逍遙山 別宮 生活의 考" 6 : 2001

      28 金成俊, "太宗의 外戚除去에 대하여 : 閔氏兄弟의 獄" 17·18 : 1962

      29 "太宗實錄"

      30 "中宗實錄"

      31 "世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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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20-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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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10-02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서울학연구 -> 서울학연구 KCI등재
      200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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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0.63 0.63 0.6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1 0.62 1.483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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