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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영남 선비일기를 통해 본 가족결속양상 — 『운암일기』를 중심으로 = The Aspects of Family Solidarity from the Diary of the Yeongnam Scholar in the 16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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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887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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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논문은 운암雲巖 김명일⾦明⼀(1534~1570)이 32세 때인 1565년 음력 2월 1일부터 37세의 1570년 3월 10일까지 약 5년간의 일상을 기록해둔 『운암일기』를 통해 16세기 선비가의 가족결속양상을 ...

      이 논문은 운암雲巖 김명일⾦明⼀(1534~1570)이 32세 때인 1565년 음력 2월 1일부터 37세의 1570년 3월 10일까지 약 5년간의 일상을 기록해둔 『운암일기』를 통해 16세기 선비가의 가족결속양상을 살펴본 연구이다. 김명일은 안동 내앞마을에서 아버지 청계 김진과 어머니 여흥민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위로는 약봉 김극일(1522~1585)과 귀봉 김수일(1528~1583)이 있고 아래로는 학봉 김성일(1538~1593)과 남악 김복일(1541~1591)이 있다.
      당시 김명일의 집안은 조부 김예범이 차남인 까닭에 가문으로서의 정체성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이유로 청계 김진은 명문가로서 위상을 구축하기 위해 청기와 납실 등에 토지를 개간해 경작지를 조성하는가 하면, 가풍을 수립하고 가족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해갔다. 특히 그는 숭조崇祖 관념을 강조하면서 이를 가문의 정신적 자산으로 삼고자 했는데, 이러한 그의 계획은 제례 수행과 효행 실천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로 응축되어 나타나고 있다. 『운암일기』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부모님과 아내의 묘소가 자리한 경출산과 이들의 신위神位가 봉안된 가묘에서 아들 5형제를 데리고 제례를 충실히 수행하고, 내앞마을 건너편에 서당을 지어 머물고 있을 때 아침저녁마다 강을 건너 본가의 부모님께 문안을 드리는 등 솔선수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그의 원대한 계획은 아들 5형제에게 그대로 체화되어 이들 역시 내앞마을을 벗어난 어느 장소이든 아버지를 찾아가서 안부를 여쭙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부자간에 깊은 교감을 주고받으며 가문의 정체성 수립에 필요한 혈통적 결속력을 구축해갔다.
      이처럼 아버지 청계 김진이 가문의 정체성과 위상 수립을 위해 토지를 개간하는 등의 물적 기반을 구축하고 가풍을 수립해 정신적 자산을 조성했다면, 아들 5형제는 아버지의 원대한 계획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한 실천적 삶을 살았다. 즉 집안의 정신적 구심장소로서 기능하는 경출산과 가묘에서 아버지를 중심으로 의례를 수행하면서 혈통적 연대관계를 재확인하고, 청기와 납실 등에 거처하고 계신 아버지를 찾아 뵙고 일상을 함께 하면서 혈연공동체적 결속을 다져갔던 것이다. 또 형제간에 학업을 서로 독려하며 함께 공부하고 시험에 응시하는 등 사회적 성취를 이루기 위해 협력하면서 수평적 유대관계를 강화해갔다. 특히 일기의 저자 운암 김명일이 병석에 있을 때 매일같이 문병을 오고 심지어 병간호를 위해 하룻밤 묵어가는 등 깊은 가족애를 표출하면서 정서적 유대관계를 구축하기도 했다.
      청계 김진은 내앞 의성김문의 중흥조 혹은 창시자로 불린다. 사실 그의 아버지 김예범은 차남이었던 까닭에 당대에는 명문가로서의 위상과 정체성이 미비했지만, 김진의 원대한 계획에 의해 자신의 호號를 내세운 ‘종가’와 ‘문중’ 을 창시했고 이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김진의 남다른 삶의 경영방식과 뛰어난 전략을 기반으로 내앞 의성김씨는 명문가로서 자리잡을 수 있었는데, 이러한 가문의 역사가 그의 아들 운암 김명일이 쓴 『운암일기』 에 생생하게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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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paper investigates various aspects of family solidarity in a scholar family from the 16th century through Unam Ilgi in which Unam (雲巖) Kim Myeong-il (⾦明一, 1534 to 1570) recorded his daily life for around five years from February 1st, 15...

      This paper investigates various aspects of family solidarity in a scholar family from the 16th century through Unam Ilgi in which Unam (雲巖) Kim Myeong-il (⾦明一, 1534 to 1570) recorded his daily life for around five years from February 1st, 1565, when he was 32, to March 10th, 1570, when he was 37, in the lunar calendar. Kim Myeong-il was born as the third son to Cheonggye Kim Jin and his mother Yeo Heung-min in Naeap Village, Andong. His older brothers are Yakbong Kim Geuk-il (1522 to 1585) and Guibong Kim Su-il (1528 to 1583) and his younger brothers are Hakbong Kim Seong-il (1538 to 1593) and Namak Kim Bok-il (1541 to 1591). As the grandfather of Kim Myeong-il, Kim Ye-beom, was not the oldest son, his family had not yet built its identify at the moment. For this reason, Cheonggye Kim Jin cultivated land in Cheonggi and Napsi to create farmland, established family cultures, and strengthened family solidarity to build the status as a prestigious family. He especially highlighted the concept of Sungjo (崇祖) and wished to value this as the family’s spiritual asset; his plan was well reflected in specific behaviors such as performing rites and practicing filial piety. According to Unam Ilgi, he faithfully held rites with his five sons at Gyeongchulsan Mountain where the tombs of his parents and wife were located, and at the family shrine where their tablets (神位) were placed. When he built a school across from Naeap Village and stayed there, he crossed the river every morning and evening to see his parents. He literally set himself as a standard through these behaviors. His grand plan was learned by his five sons, and they visited everywhere to see his father and check his well-being and built strong connections and attachments, creating family solidarity required to establish the family’s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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