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한국전쟁 직후 대한민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미국에서 발족된 한미재단의 여러 프로젝트 중 보건 의료 부문에 있어 한미재단의 활동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이러한 활동이 한국의 ...
본 연구는 한국전쟁 직후 대한민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미국에서 발족된 한미재단의 여러 프로젝트 중 보건 의료 부문에 있어 한미재단의 활동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이러한 활동이 한국의 보건의료 부문에 미친 영향을 재조명 하고 그 의미를 고찰하고자 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한미재단은 비영리 민간재단으로 1952년 설립되어 1953년부터 1955년까지 보건의료, 교육, 사회복지 분야를 중심으로 대한원조활동을 펼쳤다. 민간 원조단체임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당시 미 대통령이던 아이젠하워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에 방대한 원조활동을 펼친 국가 차원의 공식적 원조기관의 성격도 지녔었다.
이러한 이중적 지위를 양면적으로 적절하게 활용한 한미재단은 민간 원조단체 측면에서 사업구상과 실행에 있어 신속성을 지닐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미국 의료계가 한국 의료계를 주목하고 지원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반면, 미 정부의 전폭적 지원 하에서는 미전역에서 일어난 대한 원조를 위한 기금 캠페인을 가능하게 하여, 대규모의 기금을 형성할 수 있었다. 또한, 공식원조기관인 유엔한국재건단(UNKRA), 대외활동본부(FOA : ICA의 전신) 등과의 협력으로 필요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이러한 활동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한미재단의 활동이 한국전쟁으로 붕괴된 공적 보건의료체제의 기반을 재건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한미재단의 하워드 러스크 사절단은 1953년 3월과 8월에 두 차례 방한하여 한국 보건의료실태를 파악하였고,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미국전역에서 모금활동을 통해 마련한 기금으로 국립재활원 설립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포괄적인 재활의학의 서비스 제공, 의사 보건인력 양성을 위한 공중보건원 설립, 간호인력 양성 위한 중앙간호연구원 설립, 결핵 관리를 위한 국립중앙결핵원의 설립과 대한결핵협회 지원, 한센병 관리를 위한 코크레인 박사 초빙, 나이동순회진료반 운영 등의 활동을 지원했다.
한미재단은 한국에 현대적 개념의 재활의학을 도입했다. 1953년 한미재단은 전쟁으로 급증한 사지 절단자들을 치료하고자 동래 국립재활원의 조속한 설립을 이끌어냈고, 재활의학 분야의 의사, 기술자, 행정직들의 미국 연수를 지원하였다. 그 결과 한국 의료계에서는 신필수, 오정희, 서광윤, 이강목 등이 미국에서 재활의학 연수 및 레지던트 수련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재활의학의 기초를 세우는 1세대를 형성하였다.
공중보건 분야에서는 해방 이후 1953년까지 미국에서 연수한 사람이 채 30명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미재단은 의사, 간호사 등 보건의료 인력의 양성을 위해 1953년 공중보건원의 설립을 이끌었다. 공중보건원은 보건대학원을 목표로 설립되면서 당시 턱없이 부족한 한국의 공중보건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의사를 양성할 수 있었다. 당대 최고수준의 한국 보건의료 전문가들은 소속에 관계없이 이곳에서 강의했고, 또한 미8군, 한국민사처 등 미군인 의료진들과 해외 저명한 의학자들도 강의를 맡았다. 이후, 공중보건원에 강사나 학생으로 참여했던 많은 의사들이 한국의 보건의료 영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미재단은 1954년에는 중앙간호연구원의 설립도 지원했다. 중앙간호연구원은 고등간호교육을 제공했고, 이곳의 강사와 학생들은 한국 간호계의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한미재단의 공중보건의료 부문의 원조는 특히 결핵과 한센병 같은 만성병 관리에 중점을 두었는데, 1954년 국립중앙결핵원이 한미재단의 후원으로 개원하면서 인력 양성, 통원환자 무료 진료, 예방접종 등의 활동을 펼쳐나갔다. 또한, 1953년 창립한 대한결핵협회는 한미재단이 제공한 지원금을 유일한 자본금으로 삼아 교육, 사업 발전, 학술적 연구 등의 활동을 개시했다. 한미재단의 초빙으로 1955년 방한한 코크레인은 한국 한센병 관리의 핵심인 한센병 실태를 파악하고 권고안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추후 한국 한센병 관리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또한 보건부는 코크레인의 권고에 따라 한미재단의 후원으로 1956년 나이동진료반을 운영함으로써 기존의 격리 위주였던 소극적인 한센병 관리에서 벗어나, 직접 환자를 찾아 나섰으며 그들의 거주지에서 치료를 시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