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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論文) : 여(麗),몽(蒙) 전쟁의 성격과 몽골의 태도 변화 = The Character of Koryo-Mongolia War and Changes of the Attitudes of Mongo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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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082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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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麗·蒙 관계는 1219년 형제맹약으로 출발했지만 저고여 살해 사건을 계기로 30년의 장기전을 치러야 했다. 결국 양국은 혼인동맹을 맺음으로써 안정적인 평화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양국 관계의 시작을 보여주는 1219년 몽골의 주도로 이루어진 형제맹약은 몽골제국의 과다한 공물 요구의 결과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옷치긴이 감국하게 된 몽골 국내 사정의 변화와 대외 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전쟁자금은 고려에 대한 몽골의 공물 요구를 한층 강화시켜 고려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고려는 몽골의 과다한 공물 요구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고 주변국의 동조 등의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켜 저고여 살해사건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양국의 형제 맹약은 파탄되었다. 아울러 여몽 양국의 30여년 전쟁을 통해 최씨 무신정권은 고려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장기 집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몽골의 계속되는 국왕의 출륙친조 요구를 무신정권이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은 고려 국왕이 대몽 대화 창구가 되기를 희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최씨 무신 권력의 누수현상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최선의 선택은 和戰兩面策을 통해 전쟁의 장기화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결국 고려의 끈질긴 저항이 몽골의 내부 사정과 맞물려 장기전쟁 양상으로 이어졌고, 지연정책을 구사하던 고려가 일정 부분성공을 거둔 형태였다고 평가해 볼 수 있다. 한편, 고려와 몽골의 30여년 장기전쟁은 몽골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몽골제국 사상 초유의 사태였던 30여년의 장기전쟁은 고려뿐만아니라 몽골에게도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몽골은 고려국왕의 출륙친조를 포기하고 국왕의 출륙과 태자의 친조로 양보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이를 통해 몽골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서 쉽게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각인하게 되었다. 이것은 후일 고려가 대몽 강화 정책을 추진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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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麗·蒙 관계는 1219년 형제맹약으로 출발했지만 저고여 살해 사건을 계기로 30년의 장기전을 치러야 했다. 결국 양국은 혼인동맹을 맺음으로써 안정적인 평화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양국 ...

      麗·蒙 관계는 1219년 형제맹약으로 출발했지만 저고여 살해 사건을 계기로 30년의 장기전을 치러야 했다. 결국 양국은 혼인동맹을 맺음으로써 안정적인 평화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양국 관계의 시작을 보여주는 1219년 몽골의 주도로 이루어진 형제맹약은 몽골제국의 과다한 공물 요구의 결과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옷치긴이 감국하게 된 몽골 국내 사정의 변화와 대외 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전쟁자금은 고려에 대한 몽골의 공물 요구를 한층 강화시켜 고려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고려는 몽골의 과다한 공물 요구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고 주변국의 동조 등의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켜 저고여 살해사건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양국의 형제 맹약은 파탄되었다. 아울러 여몽 양국의 30여년 전쟁을 통해 최씨 무신정권은 고려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장기 집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몽골의 계속되는 국왕의 출륙친조 요구를 무신정권이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은 고려 국왕이 대몽 대화 창구가 되기를 희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최씨 무신 권력의 누수현상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최선의 선택은 和戰兩面策을 통해 전쟁의 장기화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결국 고려의 끈질긴 저항이 몽골의 내부 사정과 맞물려 장기전쟁 양상으로 이어졌고, 지연정책을 구사하던 고려가 일정 부분성공을 거둔 형태였다고 평가해 볼 수 있다. 한편, 고려와 몽골의 30여년 장기전쟁은 몽골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몽골제국 사상 초유의 사태였던 30여년의 장기전쟁은 고려뿐만아니라 몽골에게도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몽골은 고려국왕의 출륙친조를 포기하고 국왕의 출륙과 태자의 친조로 양보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이를 통해 몽골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서 쉽게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각인하게 되었다. 이것은 후일 고려가 대몽 강화 정책을 추진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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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study examined the character of Koryo-Mongolia war and changes of the attitudes of Mongolia. The findings were as follow: Firstly, brothership alliance between Koryo Kingdom and Mongolia that was made under the leadership of Mongolia in 1219 came to a rupture because of Mongol Empire``s excessive request of tribute. Since 1221, Mongol Empire``s request of the tribute was more strengthened to have considerable burden on Koryo. Koryo strongly complained against Mongol Empire``s excessive request of tribute to produce neighboring countries`` synergy effects of sympathy and to kill Jeogoyeo(著古與) and to break off the alliance between both countries at last. Secondly, Koryo``s resistance against Mongolia was used to let Choi regime keep power. Choi regime could not accept Mongol Empire``s continuous demand on Koryo Kingdom king``s Chulyukchinjo(出陸親朝) because the regime did not want that the king would be a window of communication between both countries. Choi regime could lose power because of the king``s Chulyukchinjo so that the best option was to produce long-term war through both policies of war and peace. Long-term war continued because of Koryo``s consistent resistance and Mongol``s internal situation, and Koryo that adopted delay policy was thought to be partially successful. Thirdly, more than 30-years war between both countries was enough to make Mongolia make change of its attitudes. The long-term war that was an unprecedented event at Mongol Empire made not only Koryo but also Mongol Empire suffer from great difficulties. At last, Mongol Empire gave up Koryo king``s Chulyukchinjo, and made concession that the king left island to leave for main land and the prince would visit the empire``s palace. And, the Mongol Empire found that Koryo that inherited Koguryo was difficult to surrender by the empire. Such an event gave base that Koryo could take an advantage to promote Koryo``s policy struggling against Mongol Empire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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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study examined the character of Koryo-Mongolia war and changes of the attitudes of Mongolia. The findings were as follow: Firstly, brothership alliance between Koryo Kingdom and Mongolia that was made under the leadership of Mongolia in 1219 came...

      This study examined the character of Koryo-Mongolia war and changes of the attitudes of Mongolia. The findings were as follow: Firstly, brothership alliance between Koryo Kingdom and Mongolia that was made under the leadership of Mongolia in 1219 came to a rupture because of Mongol Empire``s excessive request of tribute. Since 1221, Mongol Empire``s request of the tribute was more strengthened to have considerable burden on Koryo. Koryo strongly complained against Mongol Empire``s excessive request of tribute to produce neighboring countries`` synergy effects of sympathy and to kill Jeogoyeo(著古與) and to break off the alliance between both countries at last. Secondly, Koryo``s resistance against Mongolia was used to let Choi regime keep power. Choi regime could not accept Mongol Empire``s continuous demand on Koryo Kingdom king``s Chulyukchinjo(出陸親朝) because the regime did not want that the king would be a window of communication between both countries. Choi regime could lose power because of the king``s Chulyukchinjo so that the best option was to produce long-term war through both policies of war and peace. Long-term war continued because of Koryo``s consistent resistance and Mongol``s internal situation, and Koryo that adopted delay policy was thought to be partially successful. Thirdly, more than 30-years war between both countries was enough to make Mongolia make change of its attitudes. The long-term war that was an unprecedented event at Mongol Empire made not only Koryo but also Mongol Empire suffer from great difficulties. At last, Mongol Empire gave up Koryo king``s Chulyukchinjo, and made concession that the king left island to leave for main land and the prince would visit the empire``s palace. And, the Mongol Empire found that Koryo that inherited Koguryo was difficult to surrender by the empire. Such an event gave base that Koryo could take an advantage to promote Koryo``s policy struggling against Mongol Empire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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