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udies of the Donghak Peasant War in 1894 are based on historical narratives called “Pioneering of the Modern People’s Liberation Movement” leading to the March 1st Movement in 1919 as a people-led anti-feudal and anti-imperialist reform 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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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동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0
Korean
동학농민전쟁 ; 3.1운동 ; 척왜창의 ; 천도교청년회 ; 개벽 ; 전봉준 ; 문명론 ; Donghak Peasant War ; the March 1st Movement ; 斥倭倡義 ; Cheondogyo Youth Association ; Gaebyeok ; Jeon Bong-Joon ; Civilization
KCI등재
학술저널
79-110(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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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udies of the Donghak Peasant War in 1894 are based on historical narratives called “Pioneering of the Modern People’s Liberation Movement” leading to the March 1st Movement in 1919 as a people-led anti-feudal and anti-imperialist reform mo...
The studies of the Donghak Peasant War in 1894 are based on historical narratives called “Pioneering of the Modern People’s Liberation Movement” leading to the March 1st Movement in 1919 as a people-led anti-feudal and anti-imperialist reform movement. These narratives were formed around the March 1st Movement in 1919, and could be spread in conjunction with popular culture. The purpose of this paper was to examine the conversion of intellectuals’ perceptions of the peasant war and the process of spreading such perceptions to the public, and to identify the position of the Donghak peasant war in the national movement process since 1919 along with the meaning of it.
First of all, immediately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the memory of the Donghak peasant war was summoned in earnest and began to be recognized again, which was due to the intellectuals’ expectations of the people’s capabilities demonstrated in the March 1st movement. In addition,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the Cheondogyo Youth Association actively summoned the Donghak Peasant War in the process of political empowerment of the Cheondogyo groups centered on them. To this end, ‘Gaebyeok’, a publication of the Cheondogyo Youth Association, actively summoned the memory of the Donghak Peasant War, and sought to secure their political status and legitimacy within the nationalist forces.
In the process, the Donghak Peasant War was reinterpreted as a people’s movement, and could be spread in combination with various popular cultures. In particular, with the spread of “待望論,” looking forward to the emergence of heroes since the mid-1920s, Jeon Bong-Joon could emerge as the leader of the people. Jeon Bong-Joon’s biography, which was published at the time, was commercialized based on such popularity, and Lim Sun-gyu, the greatest star of the time, also gained considerable popularity by performing the drama “Donghakdang”.
However, the perception of the Donghak peasant war formed during this period was still limited, and did not escape the framework of civilization in the 1900s. Although evaluated as a people’s movement, the Donghak peasant war was led by the people who were converted (enlightened) by Donghak, and was a political reform movement developed by the guidance of the pioneers such as Jeon Bong-Joon and Choi Si Hyung. This recognition did not deviate greatly from the logic that civilization rehabilitationists in the 1900s attempted to embrace the Donghak Peasant War as part of the political reform movement for the civilization of Joseon.
Therefore, ‘斥倭倡義’ that was raised during the Donghak Peasant War was still out of their view. Rather, “斥倭” is nothing but outdated anti-foreignism and was evaluated not only as the lack of political consciousness of the people, but also as a cause of the failure of the Donghak Peasant War. However, this limitation of the perception seems to have acted as a factor in which various attempts of the Cheondogyo forces who tried to consolidate the national movement forces through the Donghak Peasant War were frustrated.
국문 초록 (Abstract)
1894년 동학농민전쟁 연구는 민중 주도의 반봉건·반제국주의 변혁운동으로서 1919년 3.1운동으로까지 이어지는 ‘근대민족해방운동사의 선구’라는 운동사적 서사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
1894년 동학농민전쟁 연구는 민중 주도의 반봉건·반제국주의 변혁운동으로서 1919년 3.1운동으로까지 이어지는 ‘근대민족해방운동사의 선구’라는 운동사적 서사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서사는 1919년 3.1운동을 전후로 형성되었으며, 대중문화와 결합되어 확산될 수 있었다. 본 논문에서는 인식의 전환과 확산 과정을 살펴보고 그것이 갖는 의미와 함께 1919년 이후 민족운동 과정에서 동학농민전쟁이 차지하는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우선 3.1운동 직후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기억이 본격적으로 소환되어 재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3.1운동에서 보여준 민중적 역량에 대한 지식인들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또한 3.1운동 이후 천도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세력의 정치세력화 과정에서 이들은 동학농민전쟁을 적극적으로 소환하였다. 이를 위해 천도교청년회 기관지인 『개벽』은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기억을 적극적으로 소환하였으며, 민족주의 세력 내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과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동학농민전쟁은 민중운동으로서 재해석되었으며, 다양한 대중문화와 결합되어 확산될 수 있었다. 특히 1920년대 중반 이후 영웅의 출현을 고대하는 ‘待望論’이 확산되는 가운데 전봉준은 민중의 지도자로 부각될 수 있었다. 당시 출간 되었던 전봉준위인전은 이러한 대중적 인기를 기반으로 상업성을 띄고 있었으며, 당대 최고 스타였던 임선규는 연극 「동학당」을 공연하여 상당한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이시기 형성된 동학농민전쟁 인식은 여전히 제한적이었으며, 1900년대 문명론적 인식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민중운동으로서 평가되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동학에 의해서 개조(계몽)된 민중이 주도한 것이었으며, 전봉준이나 최시형과 같은 선각자의 지도에 의해 전개된 정치개혁운동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1900년대 문명개화론자들이 조선의 문명화를 위한 정치개혁운동의 일부로 동학농민전쟁을 포섭하고자 했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시야에서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제기되었던 ‘斥倭倡義’는 여전히 벗어나 있었다. 오히려 ‘척왜’는 시대에 뒤쳐진 배외주의에 불과한 것으로, 민중의 정치의식 부재로 평가받았뿐 아니라 동학농민전쟁의 실패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한계는 오히려 동학농민전쟁을 매개로 민족운동 세력을 결집하고자 했던 천도교 세력들의 다양한 시도들이 좌절되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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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코드와 경주의 콘텐츠 ━김동리와 박목월의 작품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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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투쟁으로서 제주 4.3과 천도교 3.1재현운동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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