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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廣開土王陵碑>에 나타난 高句麗天下의 공간범위와 주변 族屬에 대한 인식 = Koguryo People's Perception of Surrounding Ethnic Groups and Extent of the Koguryo World as Reflected in the King Gwanggaeto's St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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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종래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고구려는 5세기에 중국대륙의 분열상황을 활용하여 중국의 여러 왕조와 대등한 외교관계를 펼치며 독자세력권을 구축했다. 아울러 독자세력권을 설정...

      종래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고구려는 5세기에 중국대륙의 분열상황을 활용하여 중국의 여러 왕조와 대등한 외교관계를 펼치며 독자세력권을 구축했다. 아울러 독자세력권을 설정하고 운영하기 위해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확립한 사실도 밝혀졌다. 이 논문은 고구려 천하관의 실체를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고구려 천하의 공간범위, 주변 족속과 자신의 族源에 대한 인식 등을 고찰했다.먼저 능비의 영락5년조를 검토한 결과, 5세기 초반 고구려인들이 중국대륙 방면과 명확히 구별되는 遼河의 동방지역에 독자적인 천하를 설정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능비에 나오는 國名과 族名을 검토할 결과, 능비의 찬자들이《魏略》이나 《三國志》東夷傳을 참조하여 자신의 천하를 여러 족속이 거주하는 세계로 인식한 사실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에 대해서는 《魏略》이나 《三國志》동이전을 적용하지 않고 시조 추모왕의 신성한 혈통을 계승한 성스러운 존재로 상정한 다음, 자신보다 後進的인 穢族이나 夷狄的인 肅愼등 주변의 여러 족속을 아우르는 국가적 위상을 추구했다고 파악했다.주변 족속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대외 정복활동의 명분과 원동력을 제공했다.이에 따라 주변 지역이나 국가를 정복한 직후에는 이들을 자신보다 後進的이거나 夷狄的인 존재로 인식하는 관념이 강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정복지역에 대한 지방통치가 진전됨에 따라 이러한 인식은 점차 불식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고구려 영역 전체를 동질적인 공간으로 인식하는 국토관이 성립되었을 텐데, <中原高句麗碑>의 ‘太王國土’라는 명문은 이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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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As previous studies have pointed out, Koguryo was able to make use of China's internal divisions during the 5th century to carve out an independent sphere of influence and pursue egalitarian-based diplomatic relations with many of the Chinese dynastie...

      As previous studies have pointed out, Koguryo was able to make use of China's internal divisions during the 5th century to carve out an independent sphere of influence and pursue egalitarian-based diplomatic relations with many of the Chinese dynasties of the day. Furthermore, these studies have revealed that as part of the efforts
      to establish and control this independent sphere of influence, a Koguryo-centered perception of the world was developed. This thesis attempts to further expound on the actual nature of Koguryo's perception of the world. To this end, the researcher examined the King Kwanggaet'o Stele in order to gain insight into the territorial
      scope of Koguryo's sphere of influence and its perception of surrounding ethnic groups. Examination of an entry on the stele revealed that by the 5th year of Yongnak( ) in the early 5th century the 永樂people of Koguryo had
      carved out an independent sphere of influence along the eastern reaches of the Liao River that was clearly distinct from the kingdoms of inland China. Analysis of the names of states and tribes listed on the stele indicates that those who erected the monument, based on their reading of the Dongyi Chapter(東夷傳) of the <Weilue (魏略: Records of the Chaowei Dynasty)> or the <Sanguo Zhi (三國志: Records of the Chinese Three Kingdoms)>, perceived this Koguryo world as a place in which various ethnic groups resided. In addition, while holding on to its identity as a scared being that had succeeded to the sacred nature of the blood of its Founder, the leaders of Koguryo sought to enhance national prestige by also including other ethnic groups such as the Ye Tribe(穢族), which were regarded as being less developed than Proto-Koguryo's own itself, and the
      Sushen(肅愼) treated as a barbarian tribe, within the national territory. This type of perception of surrounding ethnic groups provided Koguryo with the legitimacy and motivation it needed for its wars of
      conquest. All of this lent itself to the development of a strong sense of superiority vis-a-vis conquered ethnic groups, who were regarded as less developed tribes or barbarians. Nevertheless, the gradual establishment and expansion of a local ruling structure in conquered areas had the effect of slowly but surely mitigating this sense of innate superiority. Over time, this resulted in the establishment of the entire territory under the control of Koguryo becoming a homogenous space. In this regard, the inclusion of the term 太王國土 (Land of the Great King) in the Jungwon Koguryo Stele (中原高句麗) can be perceived as proof that such a notion was in fact 碑esta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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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1. 머리말
      • 2. 永樂5년조에 설정된 高句麗天下의 공간범위
      • 3. 周邊國과 住民集團의 族屬계통에 대한 인식
      • 4. 原高句麗人과 주변 族屬의 관계에 대한 인식
      • 5. 맺음말
      • 1. 머리말
      • 2. 永樂5년조에 설정된 高句麗天下의 공간범위
      • 3. 周邊國과 住民集團의 族屬계통에 대한 인식
      • 4. 原高句麗人과 주변 族屬의 관계에 대한 인식
      •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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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劉俊勇, "遼東沓水縣文縣縣治考證" 3 : 1993

      2 梁志龍, "梁貊略說"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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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論衡"

      6 리순진, "부조예군 무덤에 대하여" (4) : 1964

      7 여호규, "백제의 요서진출설 재검토" (91) :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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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박대재, "마한의 기원과 韓王 문제 in : 고대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경인문화사 2006

      10 林起煥, "남북조기 한중 조공책봉관계의 성격" 32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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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梁志龍, "梁貊略說" 1993

      3 李鎔賢, "梁職貢圖百濟國使條の旁小國" 37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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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리순진, "부조예군 무덤에 대하여" (4) :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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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박대재, "마한의 기원과 韓王 문제 in : 고대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경인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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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5-31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외대사학 -> 역사문화연구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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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5 0.75 0.64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6 0.49 1.216 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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