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래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고구려는 5세기에 중국대륙의 분열상황을 활용하여 중국의 여러 왕조와 대등한 외교관계를 펼치며 독자세력권을 구축했다. 아울러 독자세력권을 설정...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https://www.riss.kr/link?id=A82447049
2009
-
900
KCI등재
학술저널
3-48(46쪽)
24
0
상세조회0
다운로드국문 초록 (Abstract)
종래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고구려는 5세기에 중국대륙의 분열상황을 활용하여 중국의 여러 왕조와 대등한 외교관계를 펼치며 독자세력권을 구축했다. 아울러 독자세력권을 설정...
종래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고구려는 5세기에 중국대륙의 분열상황을 활용하여 중국의 여러 왕조와 대등한 외교관계를 펼치며 독자세력권을 구축했다. 아울러 독자세력권을 설정하고 운영하기 위해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확립한 사실도 밝혀졌다. 이 논문은 고구려 천하관의 실체를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고구려 천하의 공간범위, 주변 족속과 자신의 族源에 대한 인식 등을 고찰했다.먼저 능비의 영락5년조를 검토한 결과, 5세기 초반 고구려인들이 중국대륙 방면과 명확히 구별되는 遼河의 동방지역에 독자적인 천하를 설정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능비에 나오는 國名과 族名을 검토할 결과, 능비의 찬자들이《魏略》이나 《三國志》東夷傳을 참조하여 자신의 천하를 여러 족속이 거주하는 세계로 인식한 사실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에 대해서는 《魏略》이나 《三國志》동이전을 적용하지 않고 시조 추모왕의 신성한 혈통을 계승한 성스러운 존재로 상정한 다음, 자신보다 後進的인 穢族이나 夷狄的인 肅愼등 주변의 여러 족속을 아우르는 국가적 위상을 추구했다고 파악했다.주변 족속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대외 정복활동의 명분과 원동력을 제공했다.이에 따라 주변 지역이나 국가를 정복한 직후에는 이들을 자신보다 後進的이거나 夷狄的인 존재로 인식하는 관념이 강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정복지역에 대한 지방통치가 진전됨에 따라 이러한 인식은 점차 불식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고구려 영역 전체를 동질적인 공간으로 인식하는 국토관이 성립되었을 텐데, <中原高句麗碑>의 ‘太王國土’라는 명문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As previous studies have pointed out, Koguryo was able to make use of China's internal divisions during the 5th century to carve out an independent sphere of influence and pursue egalitarian-based diplomatic relations with many of the Chinese dynastie...
As previous studies have pointed out, Koguryo was able to make use of China's internal divisions during the 5th century to carve out an independent sphere of influence and pursue egalitarian-based diplomatic relations with many of the Chinese dynasties of the day. Furthermore, these studies have revealed that as part of the efforts
to establish and control this independent sphere of influence, a Koguryo-centered perception of the world was developed. This thesis attempts to further expound on the actual nature of Koguryo's perception of the world. To this end, the researcher examined the King Kwanggaet'o Stele in order to gain insight into the territorial
scope of Koguryo's sphere of influence and its perception of surrounding ethnic groups. Examination of an entry on the stele revealed that by the 5th year of Yongnak( ) in the early 5th century the 永樂people of Koguryo had
carved out an independent sphere of influence along the eastern reaches of the Liao River that was clearly distinct from the kingdoms of inland China. Analysis of the names of states and tribes listed on the stele indicates that those who erected the monument, based on their reading of the Dongyi Chapter(東夷傳) of the <Weilue (魏略: Records of the Chaowei Dynasty)> or the <Sanguo Zhi (三國志: Records of the Chinese Three Kingdoms)>, perceived this Koguryo world as a place in which various ethnic groups resided. In addition, while holding on to its identity as a scared being that had succeeded to the sacred nature of the blood of its Founder, the leaders of Koguryo sought to enhance national prestige by also including other ethnic groups such as the Ye Tribe(穢族), which were regarded as being less developed than Proto-Koguryo's own itself, and the
Sushen(肅愼) treated as a barbarian tribe, within the national territory. This type of perception of surrounding ethnic groups provided Koguryo with the legitimacy and motivation it needed for its wars of
conquest. All of this lent itself to the development of a strong sense of superiority vis-a-vis conquered ethnic groups, who were regarded as less developed tribes or barbarians. Nevertheless, the gradual establishment and expansion of a local ruling structure in conquered areas had the effect of slowly but surely mitigating this sense of innate superiority. Over time, this resulted in the establishment of the entire territory under the control of Koguryo becoming a homogenous space. In this regard, the inclusion of the term 太王國土 (Land of the Great King) in the Jungwon Koguryo Stele (中原高句麗) can be perceived as proof that such a notion was in fact 碑established.
목차 (Table of Contents)
참고문헌 (Reference)
1 劉俊勇, "遼東沓水縣文縣縣治考證" 3 : 1993
2 梁志龍, "梁貊略說" 1993
3 李鎔賢, "梁職貢圖百濟國使條の旁小國" 37 : 1999
4 "梁書"
5 "論衡"
6 리순진, "부조예군 무덤에 대하여" (4) : 1964
7 여호규, "백제의 요서진출설 재검토" (91) : 2002
8 문안식, "백제의 영역확장과 지방통치" 신서원 2002
9 박대재, "마한의 기원과 韓王 문제 in : 고대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경인문화사 2006
10 林起煥, "남북조기 한중 조공책봉관계의 성격" 32 : 2003
1 劉俊勇, "遼東沓水縣文縣縣治考證" 3 : 1993
2 梁志龍, "梁貊略說" 1993
3 李鎔賢, "梁職貢圖百濟國使條の旁小國" 37 : 1999
4 "梁書"
5 "論衡"
6 리순진, "부조예군 무덤에 대하여" (4) : 1964
7 여호규, "백제의 요서진출설 재검토" (91) : 2002
8 문안식, "백제의 영역확장과 지방통치" 신서원 2002
9 박대재, "마한의 기원과 韓王 문제 in : 고대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경인문화사 2006
10 林起煥, "남북조기 한중 조공책봉관계의 성격" 32 : 2003
11 林起煥, "낙랑 인장 in : 역주 한국고대금석문(I)" 304-, 1992
12 李仁哲, "광개토호태왕비를 통해 본 고구려의 남방경영" 2 : 1996
13 朴性鳳, "광개토호태왕기 고구려 남진의 성격" 27 : 1979
14 조법종,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수묘제 연구" 8 : 1995
15 李基東,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백제관계 기사의 검토" 17 : 1986
16 林起煥,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民'의 성격" 2 : 1996
17 손영종, "광개토왕릉비>를 통하여본 고구려의 령역" 1986
18 박시형,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 출판사 1966
19 徐榮洙,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정복기사 재검토(중)" (119) : 1988
20 徐榮洙,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정복기사 재검토(상)" (96) : 1982
21 임기환, "광개왕릉비의 국연과 간연" 13 : 1994
22 여호규, "고구려의 기원과 문화기반 in :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 동북아역사재단 2007
23 余昊奎, "고구려 초기의 병력동원체계" 36 : 1998
24 여호규, "고구려 초기 對中戰爭의 전개과정과 그 성격" 동북아역사재단 (15) : 7-56, 2007
25 "黃草嶺眞興王巡狩碑"
26 "魏略輯本"
27 "魏書"
28 "高慈墓誌銘"
29 金瑛河, "高句麗의 巡狩制" (106) : 1985
30 여호규, "高句麗와 慕容燕의 朝貢冊封關係 연구 in : 한국고대국가와 중국왕조의 조공책봉관계" 고구려연구재단 2006
31 篠原啓方, "高句麗的 國際秩序認識의 成立과 展開" 고려대 2005
32 濱田耕策, "高句麗廣開土王陵碑文の硏究" 11 : 1974
33 武田幸男, "高句麗史と東アジア史" 岩波書店 1989
34 盧泰敦, "高句麗⋅渤海人과 內陸아시아 주민과의 교섭에 관한 일고찰" 23 : 1989
35 徐永大, "高句麗 貴族家門의 族祖傳承" 8 : 1995
36 金賢淑, "高句麗 王의 對民觀의 변화와 그 의미" (58) : 1999
37 林起煥, "高句麗 初期의 地方統治體制" 14 : 1987
38 金庠基, "韓穢貊移動考 in : 동방사논총" 서울대 출판부 1984
39 李弘稙, "韓國古代史의 硏究" 신구문화사 1971
40 "隋書"
41 "逸周書"
42 "通志"
43 "資治通鑑"
44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I-II" 한국고대사회연구소 1992
45 水野祐, "評釋 魏志倭人傳" 雄山閣 1988
46 "舊唐書"
47 池內宏, "肅愼考 in : 滿鮮史硏究 上世篇1" 吉川弘文館 1951
48 "翰苑"
49 "續後漢書"
50 "磨雲嶺眞興王巡狩碑"
51 尹善泰, "百濟 泗沘都城과 '嵎夷'-木簡으로 본 泗沘都城의 안과 밖-" 2 : 2006
52 "男生墓誌銘"
53 "牟頭婁墓誌"
54 "爾雅"
55 "漢書"
56 朴淳發, "漢城百濟의 誕生" 서경문화사 2001
57 權五重, "滄海郡과 遼東東部都尉" (168) : 2000
58 "淮南子"
59 "泉獻誠墓誌銘"
60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 一潮閣 1993
61 孫進己, "東北歷史地理(제2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62 "晋書"
63 "春秋左傳"
64 "日本書紀"
65 "新唐書"
66 "後漢書"
67 李丙燾, "廣開土王의 雄略 in :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68 여호규, "廣開土王陵碑에 나타난 對中認識과 對外政策" (55) : 2005
69 金賢淑, "廣開土王陵碑를 통해본 高句麗 守墓人의 사회적 성격" (65) : 1989
70 千寬宇, "廣開土王陵碑再論 in : 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79
71 今西龍, "廣開土王陵碑に就て" 1940
72 "廣開土王陵碑"
73 "山海經"
74 "尙書"
75 "宋書"
76 王健群,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1984
77 津田左右吉, "好太王征服地域考" 1 : 1913
78 "太平御覽"
79 "國語"
80 "周書"
81 "呂氏春秋"
82 "同文通考"
83 "史記"
84 武居綾藏, "古本三國志" 1931
85 김창석, "古代 嶺西地域의 種族과 文化變遷" 한국고대사학회 (51) : 5-49, 2008
86 金翰奎, "古代 中國的 世界秩序 硏究" 일조각 1982
87 "十六國春秋輯補"
88 余昊奎, "初期의 梁貊과 小水貊" 25 : 2002
89 井上秀雄, "五世紀までの中國朝鮮の古典に現われた倭" 1 : 1974
90 掘敏一, "中華思想と天下觀念 in : 中國と古代東アジア世界-中華的世界と諸民族" 岩波書店 1993
91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 in : 東亞交涉史의 연구" 서울대 출판부 1970
92 全海宗, "中國人의 天下觀과 그 名實 in : 중국의 천하사상" 민음사 1988
93 井上秀雄, "中國の歷史書に現れた二三世紀の韓國と倭國" 61 : 1989
94 池培善, "中世東北亞史硏究" 일조각 1986
95 千寬宇, "三韓의 성립과정" 261 : 1975
96 坂田隆, "三韓に關する一考察>" 59 : 1989
97 "三國志集解"
98 "三國志注補"
99 "三國志"
100 "三國史記"
101 大川富士夫, "“古本三國志”をめぐて" 62 : 1979
102 손영종, "<광개토왕릉비>연구" 사회과학원 2001
103 노태돈, "5세기 고구려인의 천하관 in : 한국사시민강좌 3" 일조각 1988
104 盧泰敦, "5세기 金石文에 보이는 高句麗人의 天下觀" 19 : 1988
105 여호규, "4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 36 : 2000
106 여호규, "4세기 동북아 국제정세와 고구려 고국원왕의 생애" 역사문화연구소 (20) : 1-37, 2004
107 梁起錫, "4-5c 高句麗 王者의 天下觀에 대하여" 11 : 1983
108 尹龍九, "3세기 이전 중국사서에 나타난 한국고대사상" 14 : 1998
연변조선족 전통문화의 브랜드화 추진과 ‘정암촌’의 장소자산 활용
미국 및 일본에서 ‘傳統中國의 世界秩序’에 관한 연구사와 그 특징 비교
학술지 이력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2005-05-31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외대사학 -> 역사문화연구 |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75 | 0.75 | 0.64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6 | 0.49 | 1.216 | 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