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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창극사를 통해서 본 해방공간 창극 연구 = Research on the ‘Liberation Period Changgeuk (해방공간 창극)’ by the Changgeuk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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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1902년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만들어짐으로써 판소리를 잇는 근대적 공연물로서의 창극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창극은 배역을 나눠서 판소리를 부르는 것과 같은 판소리 입체창과 비슷하였다. 당시는 앞과장, 뒷과장이라 해서 앞과장에서는 종래 하여 왔던 무용, 노래, 기악연주(器樂演奏), 땅재주 등을 하고, 뒷과장에서 창극을 했다. 그래서 <춘향전>이면 그것을 3일에 걸쳐 나눠서 했다. 창극은 그런 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1934년 ‘조선성악연구회’가 만들어지고, 이 단체에 의해 비로소 1936년부터 <춘향전>, <흥부전>, <배비장전>, <유충렬전> 등과 같은 작품을 한 번 공연에 모두 공연하는 이른바 ‘전편(全篇) 창극’이 이뤄졌다. 이때는 김창환을 이어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등 근대의 5명창들이 창극을 주도했다. 1919년 3・1운동 뒤의 일제의 이른바 문화정치와 그 뒤를 이은 1930년대의 전통문화 운동이 일어나던 때였다. 창극이 나름대로 일정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당시는 일제강점기였고,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일제는 전시(戰時) 체제로 들어갔다. 창극은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해방 후 창극은 비로소 재도약 시기를 갖게 된다. 좌우익의 대립이란 사회적 갈등과 경제적 침체란 기본적 사회적 문제가 있었지만, 당시 고조된 민족주의와 함께 국악인들이 ‘대한국악원’을 중심으로 모였고, 국악인들은 창극을 그들의 가장 주요한 공연 방식으로 내세웠다. 그래서 대한국악원 직속의 ‘국극사’와 개별단체들인 ‘조선창극단’, ‘국극협단’, ‘김연수창극단’ 등이 기존에 해 왔던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장화홍련전> 등의 작품들도 제대로 다듬고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작품들도 경쟁적으로 내놓았다. 그래서 <청산도 절노, 사람도 절로>, <선화공주>, <왕자호동>, <예도성(濊都城)의 삼경(三更)>, <단종과 사육신>, <만리장성> 등 수준 높으면서도 흥행력을 지닌 작품들을 단체마다 이른바 3개월에 한 편 꼴로 내놓았다. 서울에서의 공연 후 지방의 30개 도시를 도는 데 3개월 정도가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국산영화가 초기 단계였고, 외국영화의 수입도 제한되어 있어 서울을 비롯한 전국 도시들의 극장들은 악극(樂劇), 창극, 신파극, 신극(新劇), 버라이어티 쇼 등 이른바 무대공연 시대였다. 창극은 수준 높은 민족예술적 면이 있는 동시에 대중적 흥행력도 지니고 있어 상층의 문화인사들이나 일반 대중들이 모두 일정한 관심을 가졌기에, 광복을 맞은 새로운 조국에서 실로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적 공연물이 될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창극 현장에 오랫동안 있었던 박황(1917년생)은 해방공간을 창극의 ‘최고 융성기’라고도 했다.
      그러나 6․25동란이 일어나므로 이 모든 것이 일시에 중단되었다. 또 당시 창극 활동을 주도해 왔던 박동실, 정남희, 조상선, 임소향(여) 등이 월북하므로 창극계의 공백은 컸다. 여기에다 1948년에 성립되어 전쟁 전부터도 극장가의 관객을 독점하고 있던 여성국극 공연들은 더욱 넘쳐나 이른바 남녀 혼성 창극단들의 설자리마저 없게 했다. 그 결과 1955년부터 창극단들이 없어지기 시작하여, 1958년에는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창극 부재의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북한으로 넘어간 창극인들은 이후 북한 가극의 기반이 되는 음악극을 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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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2년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만들어짐으로써 판소리를 잇는 근대적 공연물로서의 창극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창극은 배역을 나눠서 판소리를...

      1902년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만들어짐으로써 판소리를 잇는 근대적 공연물로서의 창극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창극은 배역을 나눠서 판소리를 부르는 것과 같은 판소리 입체창과 비슷하였다. 당시는 앞과장, 뒷과장이라 해서 앞과장에서는 종래 하여 왔던 무용, 노래, 기악연주(器樂演奏), 땅재주 등을 하고, 뒷과장에서 창극을 했다. 그래서 <춘향전>이면 그것을 3일에 걸쳐 나눠서 했다. 창극은 그런 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1934년 ‘조선성악연구회’가 만들어지고, 이 단체에 의해 비로소 1936년부터 <춘향전>, <흥부전>, <배비장전>, <유충렬전> 등과 같은 작품을 한 번 공연에 모두 공연하는 이른바 ‘전편(全篇) 창극’이 이뤄졌다. 이때는 김창환을 이어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등 근대의 5명창들이 창극을 주도했다. 1919년 3・1운동 뒤의 일제의 이른바 문화정치와 그 뒤를 이은 1930년대의 전통문화 운동이 일어나던 때였다. 창극이 나름대로 일정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당시는 일제강점기였고,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일제는 전시(戰時) 체제로 들어갔다. 창극은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해방 후 창극은 비로소 재도약 시기를 갖게 된다. 좌우익의 대립이란 사회적 갈등과 경제적 침체란 기본적 사회적 문제가 있었지만, 당시 고조된 민족주의와 함께 국악인들이 ‘대한국악원’을 중심으로 모였고, 국악인들은 창극을 그들의 가장 주요한 공연 방식으로 내세웠다. 그래서 대한국악원 직속의 ‘국극사’와 개별단체들인 ‘조선창극단’, ‘국극협단’, ‘김연수창극단’ 등이 기존에 해 왔던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장화홍련전> 등의 작품들도 제대로 다듬고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작품들도 경쟁적으로 내놓았다. 그래서 <청산도 절노, 사람도 절로>, <선화공주>, <왕자호동>, <예도성(濊都城)의 삼경(三更)>, <단종과 사육신>, <만리장성> 등 수준 높으면서도 흥행력을 지닌 작품들을 단체마다 이른바 3개월에 한 편 꼴로 내놓았다. 서울에서의 공연 후 지방의 30개 도시를 도는 데 3개월 정도가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국산영화가 초기 단계였고, 외국영화의 수입도 제한되어 있어 서울을 비롯한 전국 도시들의 극장들은 악극(樂劇), 창극, 신파극, 신극(新劇), 버라이어티 쇼 등 이른바 무대공연 시대였다. 창극은 수준 높은 민족예술적 면이 있는 동시에 대중적 흥행력도 지니고 있어 상층의 문화인사들이나 일반 대중들이 모두 일정한 관심을 가졌기에, 광복을 맞은 새로운 조국에서 실로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적 공연물이 될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창극 현장에 오랫동안 있었던 박황(1917년생)은 해방공간을 창극의 ‘최고 융성기’라고도 했다.
      그러나 6․25동란이 일어나므로 이 모든 것이 일시에 중단되었다. 또 당시 창극 활동을 주도해 왔던 박동실, 정남희, 조상선, 임소향(여) 등이 월북하므로 창극계의 공백은 컸다. 여기에다 1948년에 성립되어 전쟁 전부터도 극장가의 관객을 독점하고 있던 여성국극 공연들은 더욱 넘쳐나 이른바 남녀 혼성 창극단들의 설자리마저 없게 했다. 그 결과 1955년부터 창극단들이 없어지기 시작하여, 1958년에는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창극 부재의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북한으로 넘어간 창극인들은 이후 북한 가극의 기반이 되는 음악극을 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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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Hyopyulsa (협률사, 協律社)’, the first modern theater, was built in 1902. Changgeuk (창극, 唱劇), modern performing art derived from Pansori, began in that theater. However that Changgeuk was similar to singing Pansori in divided characters style. There were former stage and later stage. Conventional dances, songs, instrumental music plays, and acrobats were performed at the former stage and Changgeuk was performed at later stage. So Changgeuk <Chunhyang-jeon (춘향전)> was performed in 3 days. Changgeuk was started in that way.
      ‘Society for Joseon Vocal Art (조선성악연구회)’ was made in 1934. The Society made possible to show all the work at once, the works like <Chunhyang-jeon>, <Heungbu-jeon (흥부전)>, <Baebijang-jeon (배비장전)>, <Yuchungryeol-jeon (유충렬전> etc. So to speak, a entire work performance period began. After Kim Chang-hwan, Song Man-gap, Yi Dong-baek, Kim Chang-ryong, Jeong Jeong-ryeol, 5 great singers in early modern time, led that Changgeuk. Japan’s Cultural Policy and the movement of traditional Joseon culture in 1930’s began after March 1th Claiming Movement in 1919. But it was in the time of Japanese colony and Japan went into the war mode at the Japan to China War in 1937, and the Pacific War in 1941. Changgeuk could no longer be developed.
      After the liberation, Changgeuk could have re-jumping time. There were the conflict between leftists and rightists and the basic economic poverty problem. But Korean traditional music artists gathered around ‘Korean Traditional Music Institute (대한국악원)’ in heightened nationalism and presented Changgeuk as their most important performing art. So ‘Gukgeuksa (국극사)’, the Changgeuk Troupe of the Korean Traditional Music Institute, and independent Changgeuk Troupe like ‘Joseon Changgeuk Troupe’, ‘Changgeuk Association’ and ‘Kim Yeon-su Changgeuk Troupe’ re-made <Chunhyang-jeon>, <Simcheong-jeon (심청전)>, <Heungbu-jeon (흥부전)>, <Janghwahongryeon-jeon (장화홍련전> etc., that were handed down, and made new works competitively. So every Changgeuk Troupe should make a new one in every 3 months like <Cheongsando Jeolno, Saramdo Jeolno (청산도 절노, 사람도 절노>, <Princess Seonhwa>, <Prince Hodong>, <Midnight of Ye (예, 濊) Castle)> (예도성의 삼경), <King Danjong and Sayuksin (사육신, 死六臣>, <Great Wall> (만리장성) etc. that were high level in art and popular in ordinary people. Because it was 3 months for performing a new work from the theaters of Seoul to the ones of 30 big cities.
      At that time domestic movies was an initial step, and ths imports of foreign film was limited, so it was theater performing era for Operetta (악극, 樂劇), Changgeuk, Sinpageuk (신파극, 新派劇), Singeuk (신극, 新劇), and Variety Show. Both high level cultural figures and ordinary people all had concern for Changgeuk, because Changgeuk had the aspects of ethnic art and popular entertaining. As a result, there was a room that Changgeuk became to be the most important performing art in the liberated father land. So Park Hwang (born in 1917) who placed the field of Changgeuk for a long time, said the liberation period was the most prosperous time in the whole history of Changgeuk.
      But the Korean War taken place on Jun 25th in 1950 stopped all these processes. Also there was a big blank, because Park Dong-sil, Jeong Nam-hui, Jo Sang-seon, and Im So-hyang (woman), all were very important persons in Changgeuk, went to North Korea after the War. Futhermore the ‘Woman Gukgeuk (여성국극)’ oversupplying took all chances of so-called man and woman co-ed Changgeuk Troupes. The ‘Woman Gukgeuk’ was made in 1948 and already started to monopolize the audiences of theaters before the War. As a result, Changgeuk Troupes doomed out since 1955, and there was no Changgeuk Troupe by 1958. It became the time of no Changgeuk Troupe.
      The people of Changgeuk that went to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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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yopyulsa (협률사, 協律社)’, the first modern theater, was built in 1902. Changgeuk (창극, 唱劇), modern performing art derived from Pansori, began in that theater. However that Changgeuk was similar to singing Pansori in divided charac...

      ‘Hyopyulsa (협률사, 協律社)’, the first modern theater, was built in 1902. Changgeuk (창극, 唱劇), modern performing art derived from Pansori, began in that theater. However that Changgeuk was similar to singing Pansori in divided characters style. There were former stage and later stage. Conventional dances, songs, instrumental music plays, and acrobats were performed at the former stage and Changgeuk was performed at later stage. So Changgeuk <Chunhyang-jeon (춘향전)> was performed in 3 days. Changgeuk was started in that way.
      ‘Society for Joseon Vocal Art (조선성악연구회)’ was made in 1934. The Society made possible to show all the work at once, the works like <Chunhyang-jeon>, <Heungbu-jeon (흥부전)>, <Baebijang-jeon (배비장전)>, <Yuchungryeol-jeon (유충렬전> etc. So to speak, a entire work performance period began. After Kim Chang-hwan, Song Man-gap, Yi Dong-baek, Kim Chang-ryong, Jeong Jeong-ryeol, 5 great singers in early modern time, led that Changgeuk. Japan’s Cultural Policy and the movement of traditional Joseon culture in 1930’s began after March 1th Claiming Movement in 1919. But it was in the time of Japanese colony and Japan went into the war mode at the Japan to China War in 1937, and the Pacific War in 1941. Changgeuk could no longer be developed.
      After the liberation, Changgeuk could have re-jumping time. There were the conflict between leftists and rightists and the basic economic poverty problem. But Korean traditional music artists gathered around ‘Korean Traditional Music Institute (대한국악원)’ in heightened nationalism and presented Changgeuk as their most important performing art. So ‘Gukgeuksa (국극사)’, the Changgeuk Troupe of the Korean Traditional Music Institute, and independent Changgeuk Troupe like ‘Joseon Changgeuk Troupe’, ‘Changgeuk Association’ and ‘Kim Yeon-su Changgeuk Troupe’ re-made <Chunhyang-jeon>, <Simcheong-jeon (심청전)>, <Heungbu-jeon (흥부전)>, <Janghwahongryeon-jeon (장화홍련전> etc., that were handed down, and made new works competitively. So every Changgeuk Troupe should make a new one in every 3 months like <Cheongsando Jeolno, Saramdo Jeolno (청산도 절노, 사람도 절노>, <Princess Seonhwa>, <Prince Hodong>, <Midnight of Ye (예, 濊) Castle)> (예도성의 삼경), <King Danjong and Sayuksin (사육신, 死六臣>, <Great Wall> (만리장성) etc. that were high level in art and popular in ordinary people. Because it was 3 months for performing a new work from the theaters of Seoul to the ones of 30 big cities.
      At that time domestic movies was an initial step, and ths imports of foreign film was limited, so it was theater performing era for Operetta (악극, 樂劇), Changgeuk, Sinpageuk (신파극, 新派劇), Singeuk (신극, 新劇), and Variety Show. Both high level cultural figures and ordinary people all had concern for Changgeuk, because Changgeuk had the aspects of ethnic art and popular entertaining. As a result, there was a room that Changgeuk became to be the most important performing art in the liberated father land. So Park Hwang (born in 1917) who placed the field of Changgeuk for a long time, said the liberation period was the most prosperous time in the whole history of Changgeuk.
      But the Korean War taken place on Jun 25th in 1950 stopped all these processes. Also there was a big blank, because Park Dong-sil, Jeong Nam-hui, Jo Sang-seon, and Im So-hyang (woman), all were very important persons in Changgeuk, went to North Korea after the War. Futhermore the ‘Woman Gukgeuk (여성국극)’ oversupplying took all chances of so-called man and woman co-ed Changgeuk Troupes. The ‘Woman Gukgeuk’ was made in 1948 and already started to monopolize the audiences of theaters before the War. As a result, Changgeuk Troupes doomed out since 1955, and there was no Changgeuk Troupe by 1958. It became the time of no Changgeuk Troupe.
      The people of Changgeuk that went to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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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윤수연, "해방 이후의 여성국극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06

      2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연극이면사 대담 : 이두현" 도서출판 피아 2006

      3 金炳喆, "한국여성국극사 연구" 東國大學校 文化藝術大學院 1998

      4 백현미, "한국 창극사 연구" 태학사 1997

      5 임진택, "한국 문학의 현단계Ⅱ" 창작과비평사 1982

      6 김기형, "판소리의 전승력 회복을 위한 재창조 작업과 과제" 판소리학회 14 : 23-40, 2002

      7 김대행, "판소리의 발전 전망과 구도" 판소리학회 (18) : 25-41, 2004

      8 손태도, "판소리 계통 공연 예술들을 통해 본 오늘날 판소리의 나아갈 길" 판소리학회 (24) : 171-210, 2007

      9 이규호, "창작판소리의 음악 짜임새 -2001년~2003년에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판소리학회 (17) : 239-259, 2004

      10 김기형, "창작판소리 사설의 표현특질과 주제의식" 판소리학회 5 : 101-122, 1994

      1 윤수연, "해방 이후의 여성국극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06

      2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연극이면사 대담 : 이두현" 도서출판 피아 2006

      3 金炳喆, "한국여성국극사 연구" 東國大學校 文化藝術大學院 1998

      4 백현미, "한국 창극사 연구" 태학사 1997

      5 임진택, "한국 문학의 현단계Ⅱ" 창작과비평사 1982

      6 김기형, "판소리의 전승력 회복을 위한 재창조 작업과 과제" 판소리학회 14 : 23-40, 2002

      7 김대행, "판소리의 발전 전망과 구도" 판소리학회 (18) : 25-41, 2004

      8 손태도, "판소리 계통 공연 예술들을 통해 본 오늘날 판소리의 나아갈 길" 판소리학회 (24) : 171-210, 2007

      9 이규호, "창작판소리의 음악 짜임새 -2001년~2003년에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판소리학회 (17) : 239-259, 2004

      10 김기형, "창작판소리 사설의 표현특질과 주제의식" 판소리학회 5 : 101-122, 1994

      11 서연호, "창극의 현단계와 독자적인 음악극으로서의 거듭나기" 판소리학회 5 : 7-17, 1994

      12 백현미, "창극의 역사 위에서 창극의 미래를 기획하자-창극 100년, 국립창극단40년을 뒤돌아보며" 국립극장 2002

      13 김대행, "창극의 미래를 위한 조건들" 판소리학회 4 : 7-28, 1993

      14 박황, "창극사 연구" 백록출판사 1976

      15 서연호, "창극발전의 새로운 방향과 방법 제고" 판소리학회 2 : 7-23, 1991

      16 "조선일보"

      17 정병헌, "정현석의 삶과 판소리의 미래" 판소리학회 11 : 47-57, 2000

      18 서대석, "전통 구비문학과 근대 공연예술Ⅲ 자료편 : 면담․작품․사진 자료" 서울대출판부 2006

      19 유민영, "우리나라 연극운동사" 단대출판부 1990

      20 송송이, "여성국극 발전을 위한 교육방안"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2001

      21 김기형, "여성국극 60년사" 문화체육관광부 2009

      22 서종문, "신재효의 인식과 실천에서 본 판소리 전망" 판소리학회 11 : 25-45, 2000

      23 김홍승, "세계화시대의 창극" 연극과 인간 155-164, 2002

      24 임진택, "세계화 시대의 창극" 연극과인간 165-177, 2002

      25 유민영, "세계화 시대의 창극" 연극과 인간 238-244, 2002

      26 전황, "세계화 시대의 창극" 연극과 인간 55-62, 2002

      27 손태도, "세계 예술사에서 새로운 예술 세계를 연 판소리" 판소리학회 14 : 2002

      28 "서울신문"

      29 이진원, "박동실 증언 “창극이 걸어온 길을 더듬어”를 통해본 창극의 초기 양상" 판소리학회 (18) : 169-195, 2004

      30 손태도, "민족의 음악극으로서의 여성국극에 대한 오늘날 우리들의 과제" 한국전통공연예술학회 (창간) : 329-367, 2012

      31 "매일신문"

      32 "동아일보"

      33 김진진, "나의 젊음, 나의 사랑-여성국극인 김진진 ⑦"

      34 박녹주, "나의 이력서 -(27) 공산 치하"

      35 성경린, "국립극장 30년" 중앙국립극장 335-366, 1980

      36 "경향신문"

      37 최동현, "21세기의 판소리 <춘향가>" 판소리학회 11 : 59-78, 2000

      38 김대행, "21세기 사회 변화와 판소리 문화" 판소리학회 11 : 7-23, 2000

      39 배인교, "1950~60년대 북한 전통 음악인들의 활동 양상 검토" 판소리학회 (28) : 137-170, 2009

      40 김민수, "1940년대 판소리와 창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13

      41 성기련, "1940~1950년대의 판소리 음악문화 연구" 판소리학회 (22) : 229-278, 2006

      42 성기련, "1930년대 판소리 음악문화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3

      43 박귀희, "(인간문화재 박귀희 자서전)순풍에 돛 달아라 갈 길 바빠 돌아간다" 새소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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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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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3 0.73 0.62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6 0.55 1.52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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