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후보

      훈련도감 설치 및 운영의 동아시아적 특성 = A Study on the East-Asian Characteristic of Establishment and Managing System of Hunryondogam (訓鍊都監)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100515160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국문 초록 (Abstract)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 초전에 조총의 위력을 목격하면서 포수 양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양성된 포수를 정규직 군인으로 전환하는 가운데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훈련도감에서는 임...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 초전에 조총의 위력을 목격하면서 포수 양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양성된 포수를 정규직 군인으로 전환하는 가운데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훈련도감에서는 임진왜란 중 도입된 『기효신서』를 군사 편제와 전법의 지침서로 채택하려 하였다. 그런데 『기효신서』의 전법은 당시 조선의 상황에 적합하지 않았다. 냉병기의 운영을 강조하는 원앙진은 조총과 같은 화기 앞에서 무력하였고, 살수 기법 역시 조선의 현실에 맞지 않았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기효신서』의 전법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조선 정부는 군제 개편과 관련해서는 『기효신서』의 속오법을 적극 수용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군제 개편 논의는 兵農一致 군제를 兵農分離 군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과 將卒分離 군제를 將卒一致 군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동시에 제기되었다. 병농분리 군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훈련도감은 급료병제를 채택하였다. 한편 장졸일치 군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기효신서』의 속오법을 수용하였다. 조선 전기의 장졸분리는 군사정변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군사력을 취약하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장수의 지휘 의도를 알기 어려웠고, 장수는 병사들의 전투 능력을 알 수 없었다. 임진왜란 초전의 참패를 통해 조선 정부는 명확한 지휘편제와 연대책임으로 군대를 운영하는 장졸일치 군제, 즉 『기효신서』의 속오법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훈련도감 군인들이 포수 중심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훈련도감에서는 조총과 화약을 대량 생산하였고, 아울러 신무기 개발에도 주력하였다. 17~18세기에 훈련도감의 조총 생산량은 계속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조총 가격도 계속 인하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 조총 가격의 인하는 훈련도감 등 국가 기관의 조총 생산량 증가뿐만 아니라, 민간 조총 제조업자들이 출현하여 조총 생산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다. 조선 후기에는 “곳곳에서 조총을 私造하고 있다”라고 할 만큼 조총의 민간 제작이 성행하였다. 1814년(순조 14) 영의정 김재찬이 총기의 私造ㆍ私賣를 엄단할 것을 요구할 때까지 민간에서의 조총 제작과 판매가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조선의 화기 개발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중국에서는 18세기 이후 화기 개발이 정부에 의해 철저히 억제된 상태에 있었다. 청 정부는 정예 기병인 팔기병을 통치의 무력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데, 화기의 확산은 이 무력적 기반이 손쉽게 붕괴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에 청 정부는 화기에 대한 연구ㆍ개발을 금지시키고 민간에서 조총과 화약을 보유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한 이후 1853년 페리제독이 내항할 때까지 200여 년간 평화시대가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한때 호황을 누리던 조총 제작도 급격히 쇠퇴하였다. 에도시대에 조총은 하위계급이나 사악한 자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막부에서도 지방에서의 조총 제조를 금지시켰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 근세시기에 조총의 연구ㆍ개발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청의 재침 위협과 북벌론의 등장에 따라 화기를 끊임없이 연구ㆍ발전시켰고, 한때 조총 제조 기술은 청과 일본을 능가하기도 하였다. 이에 숙종 대에 윤휴는 우리나라의 무기가 중국보다 우수하다고 하였고, 영ㆍ정조 대 실학자 우하영도 “우리나라의 무기가 청과 일본보다 훨씬 뛰어나 이들과 싸워도 백전백승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세도정권 하에서 민간의 조총과 화약의 보유는 금지되었고, 화기의 연구ㆍ개발도 중단되었다. 이후 조선의 화기 수준도 내리막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더보기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Witnessing the power of firelocks at the beginning of Imjin war (壬辰倭亂), Joseon government strived to cultivate its gunners. And in the midst of converting gunners trained in that way into regular soldiers, Hunryeondogam came to be installed. I...

      Witnessing the power of firelocks at the beginning of Imjin war (壬辰倭亂), Joseon government strived to cultivate its gunners. And in the midst of converting gunners trained in that way into regular soldiers, Hunryeondogam came to be installed. In Hunryeondogam, they tried to adopt Gihyosinseo (紀效新書) written by Ming’s general Q? Jig?ang (戚繼光) as its guideline for military organization and tactics. The tactics contained in Gihyosinseo, however, did not fit into the situation of Joseon at that time. Its emphasis on the operation of the sword was meaningless before weapons such as firelocks, and the salsu (殺手) tactics did not suit the reality of Joseon then, either. Therefore, Joseon government did not adopt the tactics in Gihyosinseo as it was.
      In the meantime, Joseon government accepted sogobeop (束伍法) in Gihyosinseo positively regarding its military organization. During Imjin war, about their discussion to revise the military system, they insisted that it was needed to convert the byeongnongilchi (兵農一致) military system into the byeongnongbunri (兵農分離) military system and also the jangjolbunri (將卒分離) military system into the jangjolilchi (將卒一致) military system at the same time. In the process to pursue the byeongnongbunri military system, Hunryeondogam adopted salaried army , and in the process to establish the jangjolilchi military system, it accepted sogobeop in Gihyosinseo.
      As Hunryeondogam’s soldiers were mostly gunners, Hunryeondogam massproduced firelocks and gunpowder and also made efforts to develop new weapons. Moreover,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firelocks were produced and sold actively by ordinary people, too. On the contrary, in China, after the 18th century, developing weapons was thoroughly suppressed by Qing government. In fact, Qing government did take palgibyeong (八旗兵), the elite cavalry, as its ground of force for ruling, and spread of weapons meant that its ground of force could collapse easily. Thus, Qing government banned research and development for weapons. Meanwhile, in Japan, after Tokugaya Ieyasu unified the whole country, and then, in 1853, Commodore Perry visited it, its peaceful time continued for about 200 years. Along with this, manufacturing firelocks which was once flourishing in it declined rapidly.
      In Joseon, however, after experiencing Imjin war and Byeongja war (丙子胡亂), they again faced Qing’s threat of reinvasion and emergence of Bukbeolron (北伐論), so they were constantly involved in research and development for weapons, and its technology to make firelocks once exceeded Qing and Japan’s. This is why Woo Hayeong (禹夏永), a scholar in Yeongjo and Jeongjo’s reign once confidently said, “Joseon’s weapons are much more superior to Qing and Japan’s, so we can defeat them at any kind of war.” After the 19th century, however, under sedo (勢道) government, private possession of firelocks and gunpowder came to be banned, and research and development for weapons discontinued. After that, the level of weapons in Joseon also could not avoid going downhill.

      더보기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요약
      • Ⅰ. 머리말
      • Ⅱ. 임진왜란 중 포수 양성과 훈련도감 설치
      • Ⅲ. 군제 개편과 『기효신서』의 속오법 수용
      • Ⅳ. 조총의 보급과 그 동아시아적 특성
      • 국문요약
      • Ⅰ. 머리말
      • Ⅱ. 임진왜란 중 포수 양성과 훈련도감 설치
      • Ⅲ. 군제 개편과 『기효신서』의 속오법 수용
      • Ⅳ. 조총의 보급과 그 동아시아적 특성
      • Ⅴ.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練兵實紀"

      2 范中義, "論明朝軍制的演變" (2) : 1998

      3 이왕무, "조선후기 조총제조에 관한 연구" 2 : 1998

      4 노영구, "조선후기 병서와 전법의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2

      5 허대영, "임진왜란 전후 조선의 전술 변화와 군사훈련의 전문화" 58 : 2012

      6 "西厓集"

      7 黃仁宇, "萬曆十五年" 中華書局 2007

      8 "紀效新書"

      9 "磻溪隧錄"

      10 "朝鮮王朝實錄"

      1 "練兵實紀"

      2 范中義, "論明朝軍制的演變" (2) : 1998

      3 이왕무, "조선후기 조총제조에 관한 연구" 2 : 1998

      4 노영구, "조선후기 병서와 전법의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2

      5 허대영, "임진왜란 전후 조선의 전술 변화와 군사훈련의 전문화" 58 : 2012

      6 "西厓集"

      7 黃仁宇, "萬曆十五年" 中華書局 2007

      8 "紀效新書"

      9 "磻溪隧錄"

      10 "朝鮮王朝實錄"

      11 車文燮, "朝鮮時代軍制硏究" 檀大出版部 1973

      12 許善道, "朝鮮時代 火藥兵器史硏究" 一潮閣 1994

      13 유승주, "朝鮮後期 軍需鑛工業의 發展: 鳥銃 문제를 중심으로" 3 : 1969

      14 金鍾洙, "朝鮮後期 中央軍制硏究-訓鍊都監의 設立과 社會變動" 도서출판 혜안 2003

      15 許善道, "朝鮮前期 火藥兵器의 發達과 그 禁秘策-國防과의 關聯을 中心으로" 14 : 1984

      16 홍을표, "明後期 戚繼光의 戰法 硏究" 강원대학교 대학원 2013

      17 陳波, "日本火器發展過程中的文化視角-試論16-19世紀日本火器的發展-" 13 (13): 2011

      18 "新增東國輿地勝覽"

      19 "承政院日記"

      20 "懲毖錄"

      21 范傳南, "弓馬騎射籠罩下的淸代火器" 23 (23): 2008

      22 "千一錄"

      23 "備邊司謄錄"

      24 "三峰集"

      25 Perrin, Noel, "Giving Up the Gun: Japan’s Reversion to the Sword" David R. Godine, Publisher 1543-1879, 1979

      26 김성근, "19세기 중엽 일본의 정치적 변동과 군사기술의 변화: 내전과 소총기술의 발달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 30 (30): 441-473, 2008

      27 장정수, "17세기 전반 조선의 포수 양성과 운용"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0

      28 金鍾洙, "17세기 訓鍊都監 軍制와 都監軍의 활동" (2) : 1994

      29 노영구, "16~17세기 鳥銃의 도입과 조선의 軍事的 변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58) : 111-137, 2012

      30 박재광, "15~16세기 朝鮮의 火器 발달"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9 : 2002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동일학술지 더보기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4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20-12-01 평가 등재후보로 하락 (재인증) KCI등재후보
      2017-03-07 학회명변경 영문명 : The Academy of Korean ->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6-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5-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기타) KCI등재후보
      2011-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2011-01-01 평가 등재후보 탈락 (등재후보1차)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8-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5-15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Jangseogak -> JANGSEOGAK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86 0.86 0.7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6 0.67 1.505 0.46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