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의 한·일 관계를 전하는 기본 사료로서는 한국 측의 ≪三國史記≫와 일본 측의 ≪日本書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500년을 끝으로 왜에 관한 기사가 거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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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Abstract)
6세기의 한·일 관계를 전하는 기본 사료로서는 한국 측의 ≪三國史記≫와 일본 측의 ≪日本書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500년을 끝으로 왜에 관한 기사가 거의 나...
6세기의 한·일 관계를 전하는 기본 사료로서는 한국 측의 ≪三國史記≫와 일본 측의 ≪日本書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500년을 끝으로 왜에 관한 기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반면 ≪일본서기≫에는 당시의 양국 관계를 보여주는 다수의 기사가 보인다. 따라서 싫든 좋든 6세기의 한·일 관계는 ≪일본서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보이는 한·일 관계에 관한 기사는 상호 모순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예를 들면 神功紀 49년(359)조 木羅斤資에 의한 가야 7국 평정과 同 62년(382)조 대가야 구원, 顯宗紀 3년(487)조에 보이는 기생반숙녜의 임나 주둔, 繼體紀(507~531)에 보이는 近江毛野臣의 임나 경영, 그리고 欽明紀 23년(562)조의 신라에게 멸망된 임나를 구원하기 위한 紀男麻呂의 출병 등은 ≪일본서기≫에는 야마토 정권의 임나 경영을 보여주는 기둥들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반대로 백제의 임나 경영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존 연구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보다는 자기 편의에 따라서 인용·해석해왔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남부경영론'이 나왔는가하면, 반대로 '삼한·삼국의 일본열도내 분국론'이 나온 것이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6세기 한반도관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507년에서 562년까지 야마토 정권과 한반도 각 국과의 인적·물적 교류를 조사해보면 백제와의 교류는 왕복 39회에 이르는 반면 신라·고구려와는 각각 왕복 2회씩에 지나지 않고, 임나와도 왕복 8회에 지나지 않는 대단히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생각해 오던 것과는 달리 6세기의 야마토 정권과 한반도와의 관계는 임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백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임나와의 관계는 백제를 도와주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서기≫가 백제계 사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백제계 사료를 근거로 했다고 해서 사료에 제시되어 있는 백제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사료도 없는 임나와의 관계가 중심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서기≫를 가지고 논하는 한 6세기의 야마토 정권과 한반도와의 관계는 백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임나와의 관계는 백제를 도와주는 역할에 그치고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편 당시 야마토 정권과 백제와의 관계를 보면 백제는 일본에게 전문지식인과 선진문물을 제공하면서 군원을 요청하고 있다. 반면에 야마토 정권은 백제에게 군원을 제공하면서 전문지식인과 선진문물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3국이 경쟁적으로 야마토정권을 자국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 있었으므로 대외관계에서 선진문물의 도입문제가 지배자층을 규제하고 있었다. 따라서 야마토 정권은 남조와 가장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던 백제를 파트너로 선택했던 것이다. 여기서 백제는 야마토 정권에게 전문지식인과 선진문물을 제공하고 야마토 정권은 백제에게 군원을 제공하는 용병관계가 성립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6세기 야마토 정권과 한반도 각 국과의 관계가 과거에 생각하던 것처럼 임나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고 백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임나와의 관계도 백제를 도와주는 역할에 그쳤다면 6세기 한·일 관계의 전제로 제삼국의 임나 경영을 보여주는 神功紀 49년(369)조 木羅斤資에 의한 가야 7국 평정과 同 62(382)년조 대가야 구원, 顯宗紀 3년(487)조에 보이는 기생반숙녜의 임나 주둔, 繼體紀(507~531)에 보이는 近江毛野臣의 임나 경영, 그리고 欽明紀 23(562)년조의 신라에게 멸망된 임나를 구원하기 위한 기남마려숙녜의 출병 등도 백제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일본서기≫의 체계상에는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이들이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어떻게 해서 야마토 정권에 의한 것처럼 되어버렸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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