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화성 당성에 대한 1차와 2차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내용을 정리하고, 주변서해안 일대에 축조된 성곽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서해안 일대의 당성 및 주변 성곽의 나말...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https://www.riss.kr/link?id=A103335076
2017
Korean
당성 ; 나말여초기 ; 당항성 ; 당성진 ; 고려 ; 치소 ; 왜구 ; 화량진 ; Dangseong Fortress ; The late Unified Silla and Goryeo Dynasty Periods ; Danghangseong ; Dangseongjin ; Goryeo Dynasty ; a Ruling Place(Chiso) ; Japanese Raiders ; Hwaryangjin
KCI등재
학술저널
113-147(35쪽)
0
0
상세조회0
다운로드국문 초록 (Abstract)
본고는 화성 당성에 대한 1차와 2차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내용을 정리하고, 주변서해안 일대에 축조된 성곽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서해안 일대의 당성 및 주변 성곽의 나말...
본고는 화성 당성에 대한 1차와 2차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내용을 정리하고, 주변서해안 일대에 축조된 성곽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서해안 일대의 당성 및 주변 성곽의 나말여초기 전후의 경영 변화를 정리하였다.
나말여초기의 당성과 주변 성곽의 경영 변화는 먼저 신라 하대의 당나라 및 신라의 해적들과 연관하여 흥덕왕 4년(829)에 唐城鎭설치와 연관 지을 수 있다. 당성은 당성진 설치와 함께 2차 성곽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신라~통일신라 유물이 확인된 주변 성곽은 당성을 제외한 곳에서 청명산성(해발 144m), 백곡리 토성(해발70m)과 화량진성(해발 108m), 창고산성(해발 55m)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성곽은 당성과 연계하여 삼국시대부터 신라하대까지 지속적으로 군사 및 행정적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당성 주변 화량만 일대에 軍港 및 대당교역과 관련한 민간 항구와 포구 등 2곳으로 분리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후 궁예와 견훤, 양길 등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당성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당성은 왕건의 나주 공략과 견훤의 후백제와의 전쟁 속에서 고려의 수도 개경을 방비하는 주요 수군 군사기지로 경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성은 고려 정부가 들어서면서 당성의 경영과 이 일대 치소로서의 기능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고려는 수도를 서해와 가까운 개경에 정하였고, 개경 인근에 벽란도를 고려 해상교통의 중심지로 발전시켜 나갔으므로 당성진은 그 기능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성 일대의 치소의 위치를 현재의 남양초등학교 일대로 이동하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조치로 당성의 경영은 군사적인 부분과 제의적인 기능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내륙지역에 위치한 재양현성은 성곽의 입지조건과 성벽의 축조방식으로 보아 고려 대몽항쟁기 및 고려 말에 긴급하게 축조되거나, 왜구를 대비한 피난성으로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시기 당성 및 주변 성곽에 대한 문헌기사가 부족하지만 몽골의 침입시 강도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대부도 등 주변 도서로의 입도와 험준한 지형에 재양현성이 축성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때, 당성과 청명산성 등도 일시적인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말 왜구가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한강과 강화, 개경 입구까지 계속적으로 위협을 가하였다. 왜구의 서해안에 대한 위협이 지속된 이유 중에 하나는 평택서부해안지역의 방어시설이 붕괴되었음을 이야기 해준다. 이와 함께 당성과 그 주변 성곽도이와 같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경기 서해안 일대에 안전한 해양방어망을 구축하고자 경기수군을 우도와 좌도수군으로 분리하여 우도수군은 본영을 교동에 두었으며, 좌도수근은 남양 화량에 설치하였다. 그 후 1629년 남양부 화량진에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부로 이설한 이후, 경기지역의 수군중심지는 강화와 교동지역으로 옮겨갔다. 1698년(숙종 24)에 남양영종포가 현재의 영종도로 이설되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해양방어에 대한 전략이 바뀌면서 이전 시대까지 해양방어의 중심지였던 당성에 대한 군사적인 기능보다는 주변 백성주도로 풍어 및 재해·재난 등으로부터의 평안을 바라는 제사터로 변화해 간 것으로 생각된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paper summarizes the findings of the first and second excavations of Hwaseong Dangseong and examines the state of the castles built around it on the west coast. It also scrutinizes their functional changes around the late Unified Silla Period and...
This paper summarizes the findings of the first and second excavations of Hwaseong Dangseong and examines the state of the castles built around it on the west coast. It also scrutinizes their functional changes around the late Unified Silla Period and the early Goryeo Dynasty Period.
The operational change of Dangseong and the surrounding castles during this period is relevant to the establishment of Dangseongjin(maritime base) in the 4th year of King Heungdok(829), in connection with the Tang Dynasty and the Silla pirates in the late Silla Period. There is a possibility that the second fortress in Dangseong was constructed due to the installation of Dangseongjin. Apart from Dangseong, the castles where relics of Silla and Unified Silla were found include Cheongmyeongsanseong Fortress(144m above sea level), Baekgok-ri Earthen Fortification(70m), Hwaryangjinseong Fortress(108m), and Changgosanseong Fortress(55m). They seem to have continued their military and administrative functions by the Three Kingdom Period and the late Unified Silla Period.
With this, it is also possible to consider that the area around Dangseong may have been separated into two areas: the naval base and a civilian port related to trade with the Tang Dynasty. Since then, with the rise of powers such as Gung Ye, Gyeon Hwon and Yang Gil, it seems that Dangseong had also made a new change. At this time, Dangseong must have been used as a major naval base to defend the Goryeo`s capital city(Gaegyeong) during Wang Geon`s Naju attack and the war against Gyeon Hwon`s Post Baekje.
However, as the Goryeo government was established, there was a change in the management of Dangseong and its function as a ruling place(Chiso). Goryeo decided to set up the capital city, Gaegyeong, near the west sea and developed nearby Byeokrando as the center of maritime traffic. The reduction of functions of Dangseongjin was inevitable. In addition, it is highly probable that the ruling place in Dangseong area was moved to the present area of Namyang primary school. Dangseong`s military and ritual functions appear to have maintained.
Meanwhile, in view of the locational conditions and the construction method of walls, Jaeyanghyeonseong Fortress (located in the inland area) is likely to have been urgently built during the war against the Mongol Empire and the late Goryeo dynasty, or built as a refuge fortress prepared for a Japanese attack. Considering that Goryeo Gangdo government evacuated to Daebudo Island and surrounding islands and built Jaeyanghyeonseong in the rugged mountain to protect itself from the invasion of Mongolia, it is also possible that Dangseong and Cheongmyeongsanseong were temporarily used for this purpose as well.
Japanese raiders continued to threaten Goryeo, advancing northward along the west coast to the Han River, to Ganghwa, to the entrance of Gaegyeong. The persistent threat from Japanese raiders suggests the collapse of defense facilities on the western coast of Pyeongtaek. Dangseong and the surrounding castles were probably suffered the same fate.
Since then, the Joseon dynasty split the Gyeonggi naval force into two: the Udo naval force headquartered in Gyodong and the Jwado naval force in Namyang Hwaryang, in order to forge a more powerful marine defense network in the Gyeonggi coastal area. In 1629, Joseon moved the Gyeonggi naval camp in Namyangbu Hwaryangjin to Gyodongbu and the center of naval forces came to transfer to Ganghwa and Gyodong area. It also relocated Namyang Yeongjongpo to the present Yeongjongdo in 1698 (24th year of King Sukjong). As the strategy for maritime defense had changed in this way, Dangseong, which was the center of marine defense during the previous era, turned into a ritual site for people to pray for peace from disasters and foreign enemies.
참고문헌 (Reference)
1 한신대학교박물관, "龍仁 星福洞 統一新羅 窯址" 2004
2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靈岩鳩林里 陶器窯址 2次 發掘調査 報告書" 2001
3 화성시, "화성 당성 주변 학술조사 보고서" 2016
4 "해동지도"
5 (재)호남문화재연구원, "해남~삼산간 도로 확장구간내 해남 백야리 요지 -해날 오시골 요지-" 2004
6 이종민, "한국의 초기청자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2003
7 강진주, "한강유역 신라토기에 대한 고찰" 단국대학교 대학원 2006
8 최문환, "평택 자미산성 출토 막새 연구" 신라사학회 (24) : 193-231, 2012
9 단국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평택 서부 관방산성 시·발굴조사 보고서" 2004
10 단국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평택 농성 지표 및 발굴조사보고서" 2003
1 한신대학교박물관, "龍仁 星福洞 統一新羅 窯址" 2004
2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靈岩鳩林里 陶器窯址 2次 發掘調査 報告書" 2001
3 화성시, "화성 당성 주변 학술조사 보고서" 2016
4 "해동지도"
5 (재)호남문화재연구원, "해남~삼산간 도로 확장구간내 해남 백야리 요지 -해날 오시골 요지-" 2004
6 이종민, "한국의 초기청자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2003
7 강진주, "한강유역 신라토기에 대한 고찰" 단국대학교 대학원 2006
8 최문환, "평택 자미산성 출토 막새 연구" 신라사학회 (24) : 193-231, 2012
9 단국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평택 서부 관방산성 시·발굴조사 보고서" 2004
10 단국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평택 농성 지표 및 발굴조사보고서" 2003
11 강민식, "충주 견학리토성과 중부지역의 판축토성" 18 : 2010
12 강수호, "충남지역 읍성·진성 축성법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4
13 변영환, "주름문병에 대한 試考" (3) : 2007
14 단국대학교박물관, "안성시의 역사와 문화유산" 1999
15 서영일, "안성 비봉산성 수습 「本彼」명 기와 고찰" (11·12·13) : 1999
16 문무왕, "신라승려들의 구법경로 연구" (22) : 2005
17 하일식, "신라 왕경인의 지방 이주와 編籍地" 신라문화연구소 38 : 187-222, 2011
18 정진술, "신라 당은포의 위치" (3) : 2016
19 최희준, "신라 ‘党項城’의 연혁과 善德王代 羅唐關係" 한국고대학회 (47) : 59-88, 2016
20 해강도자미술관, "시흥 방산동 도기요지 발굴조사 보고서" 2004
21 박성남, "서울·경기지역 성곽 및 고분 출토 신라 인화문토기 연구" 경북대학교 대학원 2009
22 京畿道博物館, "도서해안지역 종합학술조사Ⅰ-화성군 해안지역-" 1999
23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당성 4차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자료집" 2017
24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당성 3차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자료집" 2016
25 경기문화재단, "당성" 2009
26 고용규, "남한지역 판축토성의 연구" 목포대학교 대학원 2001
27 김호준, "남한지역 高麗時代 城郭 築城과 年號銘 기와의 聯關性"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97) : 105-142, 2015
28 서정석, "나주 회진토성에 대한 검토" 백제문화연구소 (28) : 43-75, 1999
29 이종민, "나말여초기 청자발생의 여건과 산물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 2017
30 장일규, "나말여초 서해 항로와 평택" 신라사학회 (34) : 77-109, 2015
31 "광여도"
32 김호준, "관방유적 조사방법론 -산성 성벽을 중심으로-" 중부고고학회 2010
33 張東哲, "고려시대 화형자기 연구" 미술사연구회 12 : 1998
34 최종석, "고려시대 '치소성'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7
35 권인한, "고대 지명형태소 ‘本波/本彼’에 대하여" 2 : 2008
36 현남주, "경기 중서부지역 중세성곽 연구" 아주대학교 대학원 2003
37 公州大學校博物館, "가교리 도기요지" 2000
38 國立中央博物館, "鬱陵島" 2008
39 車勇杰, "高麗末·朝鮮前期 對倭 關防史 硏究" 忠南大學校 大學院 1988
40 "高麗史"
41 김호준, "高麗 對蒙抗爭期의 築城과 入保" 충북대학교 대학원 2013
42 강경숙, "韓國陶磁史" 예경 2012
43 "輿地圖書"
44 "萬機要覽"
45 水原大學校博物館, "華城 長安里 遺蹟" 2008
46 김호준, "美湖川 中上流의 百濟土城 現況과 特徵" 백제학회 (10) : 105-141, 2013
47 한혜선, "羅末麗初 陶器扁球甁의 변천과 특징" 2017
48 李康承, "神今城 綜合發掘報告" 忠南大學校博物館 1994
49 김호준, "東亞世亞 歷史文化論叢" 원명 장준식 교수 정년퇴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2014
50 尹武炳, "木川土城" 1984
51 林永珍, "會津土城" 百濟文化開發硏究院 1995
52 李俊善, "新羅 黨項城의 歷史地理的 考察" 관동대학교 8 (8): 1980
53 "新增東國輿地勝覽"
54 京畿道博物館, "平澤의 關防遺蹟(Ⅱ)" 2004
55 京畿道博物館, "平澤의 關防遺蹟(Ⅰ)" 1999
56 京畿道博物館, "平澤의 關防遺蹟(Ⅰ)" 1996
57 "太祖實錄"
58 "大東地志"
59 漢陽大學校博物館, "唐城-2次發掘調査報告書" 2001
60 漢陽大學校博物館, "唐城-1次發掘調査報告書" 1998
61 "南陽邑誌"
62 國立公州博物館, "公州 水村里 土城Ⅰ" 2002
63 김호준, "京畿道 平澤地域의 土城 築造方式 硏究" 한국문화사학회 (27) : 731-758, 2007
64 백종오, "京畿地域 高麗城郭 硏究" (35) : 2002
65 전북문화재연구원, "井邑 古阜舊邑城Ⅰ" 2007
66 심수정, "二聖山成 出土 新羅土器 硏究" 한양대학교 대학원 2012
67 "世宗實錄"
68 "三國史記"
69 황보경, "7세기 초 삼국의 정세와 당항성 전투 의의"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96) : 135-172, 2015
학술지 이력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7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 |
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201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 |
2005-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 |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59 | 0.59 | 0.61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9 | 0.56 | 1.438 | 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