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유타야수용소 입소자 명단을 기초 자료로 하여, 일제의 타 이 연합군 포로수용소 한국인 동원 실태와 특성을 분석한 것이다. 아유 타야수용소는 1945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
이 글은 아유타야수용소 입소자 명단을 기초 자료로 하여, 일제의 타 이 연합군 포로수용소 한국인 동원 실태와 특성을 분석한 것이다. 아유 타야수용소는 1945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설립되어, 방콕과 인 근 지역의 포로감시원과 군인, 군‘위안부’, 상인과 기자 등 천여 명을 수 용하였다. 수용소 입소자의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포로감시원들로, 이 들은 8월 19일 방콕에서 재태고려인회를 조직하고 대표를 선출하여 식 량 확보, 귀환을 위한 연합군과의 교섭에 나섰다. 포로감시원들은 일본 군의 최 저변에 위치해 차별받고 자주 폭행당한 그들의 열악한 처지를 설명했지만, 연합군은 한국인 포로감시원들이 연합군 포로를 학대하고 불필요하게 고문한 전범(용의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수용소 입소자 중 93명이 1945년 1월 1일 현재 타이포로수용소 포로 감시원으로 『유수명부』에 등재되어 있고, 그 중 28명은 한국 정부의 강제동원피해자(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입소자 명단 과 『유수명부』 기재 포로감시원들은 출생연도, 본적지, 역종 비중에 서 동일한 양상을 보였다. 출생연도로 파악한 연령은 80% 전후의 20대 와 그 나머지 30대의 이원 구성으로, 소수이지만 40,50대가 포함된 수용 소 입소 남성 전체와는 차이가 있었다. 역종은 95% 내외의 용인과 4∽ 5%의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본적지는 전남북이 1, 2위를 차지하 고, 경남북과 충남이 3-5위 안에 드는 동일한 양상을 보였다. 포로감시 원들의 본적지와 도별 남성 인구 비율, 일본어 해독률 사이에는 상호 관련성을 찾기 어려웠던 반면, 총독부가 실시한 노무조사결과 중 출가 및 전업 희망자 수와 높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간 피해자들의 구술에 근거하여 포로감시원 모집 시 지역별 할당 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왔는데, 본고에서는 도와 부의 모집 정원이 있었으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사전회의를 소집했다는 당시 신문 보도에 주목하여, 기사에 언급된 모집 정원은 총독부와 도 등이 관할 도와 부군 도에 할당한 모집 인원이며, 인원 할당의 기준은 노무조사결과의 출가 희망자 수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였다. 총독부에서 도, 부군도로 이 어지는 수직적 인원 할당은 포로감시원 동원의 강제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요소의 하나이다. 한편 수용소 배치 시 모두 용인이었던 포로감시원 중 5% 내외의 극히 소수가 1945년 2차례에 걸쳐 고원이 되었다. 고원이 되면 판임관 대우로 의 임용 가능성이 있고 급료도 증가했는데, 일본군은 이러한 일부 포로감 시원의 고원 승격으로 한국인 포로감시원들의 불만을 달래는 한편, 일제 에 대한 충성심을 유발하는 이른바 분할 통제를 도모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