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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불교계 동향과 송광사의 위상 = Songgwang Temple(松廣寺) and Buddhism in 19th Century during th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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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19세기는 조선 불교계가 가장 큰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19세기 조선 왕조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불교계로 전가되었기 때문이었다. 三政이 문란해지고 국가경제가 피폐해지면서 조선 왕조는 조세 부족분의 일부를 승역과 사찰 잡역으로 충당 하고자 하였다. 사찰에 대한 경제적 수탈이 심각해지면서 전국에 폐사하는 사찰들이 속출했고, 대형 사찰들조차 존폐 위기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같은 19세기의 위기상황에서도 불교계는 교단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전국 사찰들은 결사와 염불회를 결성해 불교 진흥을 도모했으며, 사찰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명산대찰들이 寺勢를 보전할 수 있는 가장 용이한 방법은 바로 왕실원당의 설치였다. 왕실원당으로 지정된 사찰에는 왕실의 막중한 역을 담당하고 있다는 이유로 별도의 잡역 부과가 금지되었으며, 寺位田등의 경제적 혜택이 주어졌다.
    호남을 대표하는 사찰인 송광사는 19세기 중반 고종, 민비, 순종 등 三殿의 祝願堂으로 지정된데 이어 20세기초에 고종의 기로소원당으로 선정되었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송광사의 명성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송광사 측의 적극적인 유치 노력이 있었다.
    송광사는 조선초부터 불교계를 대표하는 사찰로 국가적인 비호를 받았고, 조선후기까지 꾸준히 왕실의 원당으로 지정되는 등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말에 이르러 대화재가 발발하고 사찰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황에서도 왕실원당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데에는 송광사 승려 용운의 공로가 매우 컸다. 용운은 1842년 송광사에 화재가 발생해 대부분의 전각이 전소되었을 당시 중창불사를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용운은 순천부사 이범진을 통해 왕실원당 유치작업을 벌였고, 1886년에 고종과, 민비, 세자의 원당인 축성전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송광사에 부과되던 각종 잡역이 크게 줄어들었고 왕실로부터 불공 비용 명목으로 전답을 하사받는 등의 경제적 혜택을 얻게 되었다.
    19세기 송광사는 조선사회의 혼란, 불교계의 경제적 어려움에 더해 사찰의 대형 참화까지 발생하는 위기를 맞이했지만, 승려들의 적극적인 중창 의지와 왕실원당 유치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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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는 조선 불교계가 가장 큰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19세기 조선 왕조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불교계로 전가되었기 때문...

    19세기는 조선 불교계가 가장 큰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19세기 조선 왕조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불교계로 전가되었기 때문이었다. 三政이 문란해지고 국가경제가 피폐해지면서 조선 왕조는 조세 부족분의 일부를 승역과 사찰 잡역으로 충당 하고자 하였다. 사찰에 대한 경제적 수탈이 심각해지면서 전국에 폐사하는 사찰들이 속출했고, 대형 사찰들조차 존폐 위기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같은 19세기의 위기상황에서도 불교계는 교단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전국 사찰들은 결사와 염불회를 결성해 불교 진흥을 도모했으며, 사찰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명산대찰들이 寺勢를 보전할 수 있는 가장 용이한 방법은 바로 왕실원당의 설치였다. 왕실원당으로 지정된 사찰에는 왕실의 막중한 역을 담당하고 있다는 이유로 별도의 잡역 부과가 금지되었으며, 寺位田등의 경제적 혜택이 주어졌다.
    호남을 대표하는 사찰인 송광사는 19세기 중반 고종, 민비, 순종 등 三殿의 祝願堂으로 지정된데 이어 20세기초에 고종의 기로소원당으로 선정되었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송광사의 명성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송광사 측의 적극적인 유치 노력이 있었다.
    송광사는 조선초부터 불교계를 대표하는 사찰로 국가적인 비호를 받았고, 조선후기까지 꾸준히 왕실의 원당으로 지정되는 등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말에 이르러 대화재가 발발하고 사찰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황에서도 왕실원당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데에는 송광사 승려 용운의 공로가 매우 컸다. 용운은 1842년 송광사에 화재가 발생해 대부분의 전각이 전소되었을 당시 중창불사를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용운은 순천부사 이범진을 통해 왕실원당 유치작업을 벌였고, 1886년에 고종과, 민비, 세자의 원당인 축성전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송광사에 부과되던 각종 잡역이 크게 줄어들었고 왕실로부터 불공 비용 명목으로 전답을 하사받는 등의 경제적 혜택을 얻게 되었다.
    19세기 송광사는 조선사회의 혼란, 불교계의 경제적 어려움에 더해 사찰의 대형 참화까지 발생하는 위기를 맞이했지만, 승려들의 적극적인 중창 의지와 왕실원당 유치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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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In 18th century, when it generally grew in the area of society, economics and culture, also has grown up Buddhism during the Joseon Dynasty. Temples which had been burned out during the two great wars, were restored and bases for Buddhism were expanded.
    But Joseon Dynasty in 19th century was caught in a vicious circle that monopolization of power and commercial business caused to breakdown of civil economy and civil riot. It was in 19th century when had been the one of the most difficult time in Buddhism during the Joseon Dynasty. It was not simply caused by political suppression, social and economical absurdity in the Joseon Dynasty was transferred to Buddhism.
    In spite of those difficulties, Buddhism in 19th century exerted oneself to keep its livelihood and to promote development of temples. The simplest way to preserve power and economy of celebrated temples was appointed to the Royal Buddhist Shrines(王室願堂). The Royal Buddhist Shrines were exempted from paying taxes and financially benefited from the royal family. Also were those evaded from public service.
    Songgwang Temple(松廣寺) was one of the Royal Buddhist Shrines from the beginning of the Joseon Dynasty. It was burned down in 1842 and reconstructed by chief monk Yongun in Songgwang Temple. In 1902 at the time of King Gojong it was also appointed to the Royal Buddhist Shrines for commemoration of king's good health and longevity. Songgwang Temple had been closely connected with the royal family in the Joseon Dynasty. And it invited actively various kinds of the Royal Buddhist Shr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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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18th century, when it generally grew in the area of society, economics and culture, also has grown up Buddhism during the Joseon Dynasty. Temples which had been burned out during the two great wars, were restored and bases for Buddhism were expande...

    In 18th century, when it generally grew in the area of society, economics and culture, also has grown up Buddhism during the Joseon Dynasty. Temples which had been burned out during the two great wars, were restored and bases for Buddhism were expanded.
    But Joseon Dynasty in 19th century was caught in a vicious circle that monopolization of power and commercial business caused to breakdown of civil economy and civil riot. It was in 19th century when had been the one of the most difficult time in Buddhism during the Joseon Dynasty. It was not simply caused by political suppression, social and economical absurdity in the Joseon Dynasty was transferred to Buddhism.
    In spite of those difficulties, Buddhism in 19th century exerted oneself to keep its livelihood and to promote development of temples. The simplest way to preserve power and economy of celebrated temples was appointed to the Royal Buddhist Shrines(王室願堂). The Royal Buddhist Shrines were exempted from paying taxes and financially benefited from the royal family. Also were those evaded from public service.
    Songgwang Temple(松廣寺) was one of the Royal Buddhist Shrines from the beginning of the Joseon Dynasty. It was burned down in 1842 and reconstructed by chief monk Yongun in Songgwang Temple. In 1902 at the time of King Gojong it was also appointed to the Royal Buddhist Shrines for commemoration of king's good health and longevity. Songgwang Temple had been closely connected with the royal family in the Joseon Dynasty. And it invited actively various kinds of the Royal Buddhist Shr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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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요약
    • I. 머리말
    • Ⅱ. 19세기 조선 사회와 불교계
    • Ⅲ. 송광사의 19세기 현황과 왕실원당 설치
    • Ⅳ. 맺음말
    • 국문요약
    • I. 머리말
    • Ⅱ. 19세기 조선 사회와 불교계
    • Ⅲ. 송광사의 19세기 현황과 왕실원당 설치
    • Ⅳ.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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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2 황인규, "한국 불교계 삼보사찰의 성립과 지정" 보조사상연구원 (41) : 245-284, 2014

    3 정병삼, "추사와 그의 시대" 돌베개 2002

    4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5 이종서, "조선후기 울산 지역 불교사찰의 호구(戶口)와 사세(寺勢)의 변동" 부산경남사학회 (96) : 157-182, 2015

    6 오경후, "조선후기 승전과 사지의 편찬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2003

    7 이종수, "조선후기 불교의 수행체계 연구 : 삼문수학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2010

    8 한상길, "조선후기 불교와 사찰계" 경인문화사 2006

    9 김경집, "조선후기 불교사상의 전개-19세기를 중심으로" 한국어문학연구학회 48 : 2007

    10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 임제법통과 교학전통" 신구문화사 2010

    1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2 황인규, "한국 불교계 삼보사찰의 성립과 지정" 보조사상연구원 (41) : 245-284, 2014

    3 정병삼, "추사와 그의 시대" 돌베개 2002

    4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5 이종서, "조선후기 울산 지역 불교사찰의 호구(戶口)와 사세(寺勢)의 변동" 부산경남사학회 (96) : 157-182, 2015

    6 오경후, "조선후기 승전과 사지의 편찬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2003

    7 이종수, "조선후기 불교의 수행체계 연구 : 삼문수학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2010

    8 한상길, "조선후기 불교와 사찰계" 경인문화사 2006

    9 김경집, "조선후기 불교사상의 전개-19세기를 중심으로" 한국어문학연구학회 48 : 2007

    10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 임제법통과 교학전통" 신구문화사 2010

    11 유호선, "조선후기 경화사족의 불교인식과 불교문학" 태학사 2006

    12 탁효정, "조선시대 王室願堂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12

    13 조명제, "역주 조계산송광사사고-인물부" 혜안 2007

    14 권상로, "韓國寺刹全書" 1979

    15 김용태, "錦溟 寶鼎의 浮休系 정통론과 曹溪宗 제창" 규장각한국학연구원 (37) : 157-189, 2006

    16 "茶松文稿"

    17 "淑嬪崔氏資料集"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9

    18 임석진, "松廣寺誌" 불일출판사 1984

    19 "朝鮮王朝實錄" 국사편찬위원회 1986

    20 이기영, "朝鮮王朝 末期의 佛敎"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0) : 1976

    21 이병희, "朝鮮時期 寺刹의 數的 推移" 歷史敎育硏究會 61 : 1997

    22 박상환, "朝鮮時代 耆老政策 硏究" 혜안 2000

    23 오경후, "朝鮮後期 僧役의 類型과 弊端" 국사편찬위원회 107 : 2005

    24 "朝鮮寺刹史料" 조선총독부 1912

    25 "朝鮮佛敎通史" 신문관 1918

    26 "曹溪山松廣寺史庫" 아세아문화사 1977

    27 "昇平館集"

    28 李王職, "廟殿宮陵園墓造泡寺調"

    29 탁효정, "『廟殿宮陵園墓造泡寺調』를 통해 본 조선후기 능침사의 실태" 조선시대사학회 (61) : 195-229, 2012

    30 김용태, "‘浮休系’의 계파인식과 普照遺風" 보조사상연구원 (25) : 315-360, 2006

    31 정병삼, "19세기의 佛敎界의 사상적 추구와 佛敎藝術의 변화" 한국사상문화학회 16 : 2002

    32 김정인, "19세기-인민의 탄생" 민음사 2015

    33 김용태, "19세기 초의 의순의 사상과 호남의 불교학 전통" 한국사연구회 (160) : 113-142, 2013

    34 백은순, "19세기 佛敎界의 動向과 國家의 政策" 고려대학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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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재인증) KCI등재
    2019-12-01 등재 등재후보로 하락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6-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5-12-01 등재 등재후보로 하락 (기타) KCI등재후보
    2011-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6-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5-05-31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BOJOSASANG, Journal of Bojo Thought -> Journal of Bojo Jinul's Thought KCI등재후보
    2005-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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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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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2 0.62 0.65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7 0.53 1.608 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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