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寒岡 鄭逑(1543-1620)가 아닌 鄭煒 一家의 鄭東璞(1732-1792)이 武屹九曲을 창조했고, 정위 일가가 주관한 武屹사업의 《武屹九曲圖帖》에 무흘구곡이 시각화되었다는 것을 밝히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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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홍익대학교 대학원, 2020
2020
한국어
709.951 판사항(22)
서울
A Study of Muheulgugokdo albums by Jeong Gu Family
v, 150 p. : 천연색삽화 ; 26 cm
지도교수: 유재빈
국·영문초록수록
참고문헌 : p.105-110
I804:11064-000000024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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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寒岡 鄭逑(1543-1620)가 아닌 鄭煒 一家의 鄭東璞(1732-1792)이 武屹九曲을 창조했고, 정위 일가가 주관한 武屹사업의 《武屹九曲圖帖》에 무흘구곡이 시각화되었다는 것을 밝히고자 ...
본 논문은 寒岡 鄭逑(1543-1620)가 아닌 鄭煒 一家의 鄭東璞(1732-1792)이 武屹九曲을 창조했고, 정위 일가가 주관한 武屹사업의 《武屹九曲圖帖》에 무흘구곡이 시각화되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또한 정위 일가가 가문 부흥의 의도로 《무흘구곡도첩》에 18세기 정구 가문의 정세와 정구에 대한 추모를 반영했다는 점에 다가가고자 했다.
《무흘구곡도첩》은 退溪學派에서 陶山圖를 제작하는 관례에서 벗어나 栗谷學派에서 제작하던 朝鮮九曲圖의 틀을 따라 제작된 것으로, 퇴계학파 최초의 조선구곡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정위 일가를 둘러싼 18세기 정구 가문이 기존의 조선구곡도 제작 관련 인물들과 접촉함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무흘구곡도첩》에 나타난 무흘구곡은 , 鄭逑門徒에 의해 일부가 형성되었고, 최종적으로 정동박의 「武屹九曲韻」에 의해 창조되었다. 이후 경상북도 성주에 정착하게 된 정구의 가문 중에서도 鄭煒(1740-1811)를 선봉으로 한 정동박, 鄭㷞(1745-1803)로 구성된 일가는 18세기 정구 가문이 정치적 소외와 선조 정구의 위상문제에 직면하게 되자 가문부흥사업인 동시에 불천위 정구의 추모사업인 무흘사업을 실행하게 된 것이다.
정위 일가가 실행한 무흘사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위는 정구의 8대 종손으로서 무흘사업을 주도했으며, 정후와 함께 1784년에 武屹精舍를 지었다. 무흘구곡 刻字의 경우 무흘사업 이전에 새겨진 각자 외에도 제작자를 알 수 없는 각자 중 일부가 정위의 주도하에 1784년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위의 주도 아래 《무흘구곡도첩》 제작을 담당한 것은 정동박이다. 정동박은 최초이자 완전한 무흘구곡이 드러난 「武屹九曲韻」을 지어 이를 바탕으로 지방화가 金尙眞(1705-1784년 이후)에게 〈무흘구곡도〉를 그리게 했고 1784년에 화첩을 완성시켰다. 또한 정위의 주도 아래 정동박은 1785년에 무흘사업의 연장선상으로 《무흘구곡도첩》과 짝을 지어 《武夷九曲圖帖》을 제작하도록 김상진에게 맡겼다.
《무흘구곡도첩》은 기존의 조선구곡도와 달리 鄭敾(1676-1759)의 화법을 보이는데, 정위 일가가 화첩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한 의도로 보인다. 또한 《무흘구곡도첩》은 이후에 제작된 퇴계학파 조선구곡도에 정선의 화법을 전파시키기도 했다. 정위는 《무흘구곡도첩》과 《무이구곡도첩》 상단의 시를 통해 朱子(1130-1200)-李滉(1501-1570)-정구-18세기 정구 가문으로의 계승을 뜻하도록 주문했다. 정위 일가가 속한 18세기 정구 가문은 정치적 소외에 더하여 불천위 정구의 위상문제가 겹쳤기에, 자신들이 저명한 유학자 주자와 이황과 정구를 이었다고 공표하고자 했던 것이다.
《무흘구곡도첩》의 무흘구곡은 정동박이 새로 지정한 곡과, 기존에도 정구의 무흘정사 아래 지정된 곡으로 구성된다. 이에 의거해 《무흘구곡도첩》에 수록된 김상진의 〈무흘구곡도〉에, 제작주체인 정위 일가가 “18세기 정구가문의 情勢”와 “정구 추모 遺跡”이라는 인식을 반영했는지 분석해보았다. 정동박이 새로 지정한 18세기 정구 가문의 정세를 반영한 곡에는 가문의 藏書閣, 가문의 생활공간, 處士 가문의 상징이라는 인식이 반영되었음을 확인했다. 기존에도 정구의 무흘정사 아래 지정된 정구 추모 유적이 존재하는 곡에는 정구의 名勝, 정구의 무흘정사, 정구의 상징 臥龍이라는 인식이 반영되었음을 확인했다.
본 연구는 정구가 아닌 정동박이 쓴 시인 「무흘구곡운」에서 무흘구곡이 창조되었고, 정위가 무흘사업을 주관해 김상진이 「무흘구곡운」을 그림으로 시각화한 가문적인 기록이〈무흘구곡도〉임을 알아냈다. 또한《高山七曲圖帖》이 아닌 《무흘구곡도첩》이 퇴계학파 최초의 조선구곡도이며, 이후에 제작된 퇴계학파 조선구곡도에 정선의 화법을 전파시킨 점을 새로 밝혔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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