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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말, 오대시기 강남의 사묘신앙과 지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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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의 사묘신앙에 관한 연구는 宋代 이후에 집중되어 왔다. 물론 唐宋變革期에 일어난 급속한 社會ㆍ經濟적인 변화가 民間祠廟信仰의 전개에 있어서도 질...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의 사묘신앙에 관한 연구는 宋代 이후에 집중되어 왔다. 물론 唐宋變革期에 일어난 급속한 社會ㆍ經濟적인 변화가 民間祠廟信仰의 전개에 있어서도 질적, 양적인 변화를 일으켰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唐代의 民間에 불교와 도교이외의 다른 종류의 신앙체계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송대 이후에는 지방지․통속문학작품 등 기층민의 생활을 전해줄 수 있는 여러 자료들이 급격히 증대하는데 반해, 당대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자료라는 것이 주로 정치사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함께 고려해 보아야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唐의 중앙정부와 지방관들에 의해 주도된, 인가되지 않은 祠廟 즉 淫祠에 대한 대규모 禁毁조치는 주목할만하다.
      우선 狄仁傑은 垂功4년(688년)에 江南安撫使에 취임하여, 강남지역에서만 무려 1700餘個所의 淫祠를 폐기시켰으며, 長慶2년(822)에는 李德裕가 浙西觀察使로 부임하여 浙西四郡내에서만 1010餘個所의 淫祠를 폐지시키기도 하였다. 唐代에 진행된 淫祀禁毁 조치로는 이 두 사건이 널리 인구에 회자되지만, 張文琮, 韋景俊, 于頔, 羅珦, 韋正貫 등 적지 않은 지방관들이 각자 부임지에서 淫祠를 근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國史補』에는 매년 해당 관리들이 행해야 하는 제사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매 鄕과 里마다 반드시 祠廟가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淫祠외에 당시 국가제사체계에 속하면서 官民이 함께 제사를 받들었던, 嶽海鎭瀆ㆍ名山大川ㆍ歷代帝王ㆍ先賢등의 합법적인 祠廟까지 합친다면 唐代 민간에는 상당수의 祠廟가 존재하였고, 이러한 祭祀所는 기층 민중들의 신앙활동에 있어 중요한 據點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를 끄는 점은 음사철폐를 단행한 지역이 대부분 강남지역에 편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북송대에 이르러서도 비슷하게 유지되는데, 『宋會要輯稿․禮』의 「諸祠廟門」편에는 사묘신앙의 팽창을 반영하듯 당시 이미 祀典에 등록된 저명한 사묘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비교적 지명이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는 곳이 대략 1147개소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남방지역에 위치한 곳이 무려 873개소에 달한다. 주지하다시피 吳ㆍ越지역은 예부터 샤머니즘적 전통이 강하여, 東漢이래 淫祠에 대한 철폐행동도 대부분 이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으며, 『隋書ㆍ地理誌』에도 “俗信鬼神, 好淫祠”라고 명기되어 있다. 中原과는 대별되는 이러한 이질적인 신앙적 특색은, 당말 강남개발이 가속화되고 국가 경제에 있어 차지하는 비중이 증대되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수면위로 부상하여, 정부나 고지식한 유가 士人들의 신경을 자극하게 되었다. 강남지역이 唐朝 財政의 命脈을 좌우하는 관건적인 지역으로 자리 매김 하게 됨에 따라, 수 천 년에 걸쳐 서서히 침전되듯이 형성된 강남 특유의 독특한 신앙적 습속도 점차 두드러지게 불거져 국가의 주의를 끌게 된 것이다. 정부는 점차 지역적인 통속문화에 대해 통제를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中央의 統治理念과 文化的 기준을 통해 교화함으로써, 양자간의 문화적인 동질성을 확보함과 아울러 모든 가능한 離叛現象을 애초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강남지역에서 사묘신앙이 번성했던 성향은 쉽게 확인 할 수 있겠지만, 본고에서 연구목표로 정한 당말 오대시기 사묘와 강남지역사회와의 관계를 조명하는 작업은 전통사료만 가지고는 규명하기 힘든 한계를 안고 있다. 물론 본격적인 연구가 진척되지 않았지만, 본고는 이런 점은 감안하여 대략 세 방면의 접근방법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음사철폐과정 속에 나타나는 지역사회의 ‘탄원과 제소’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와 사묘간의 밀접한 연계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이 문제는 당시 강남사회에서 널리 유행하던 사묘의 종류뿐 아니라 사묘신앙과 기층사회와의 밀착정도를 개략적이나마 반영해 줄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시기적으로 조금 앞서지만, 狄仁傑의 음사철폐를 사례로 든다면, 이 사건과 관련된 설화가운데에는 東漢이래 吳興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유행하였던 項羽神에 관한 내용이 유난히 자주 등장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그만큼 當地에서 項羽神을 숭배하던 기층민중들과 項羽神廟의 廟祝들이, 精神的 紐帶感을 바탕으로 반발했음을 반영해 준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吳興掌故集』에 보이는 내용으로, 狄仁傑은 項羽廟를 철폐하기에 앞서 檄文을 작성해 項羽神에 대한 숭배행위가 우매하고 부당한 것임을 주민들에게 공포했다. 역사의 흐름과 하늘의 뜻을 어기고 자기의 역량을 과신하여 終局에는 부하들을 죽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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