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일어난 다양한 문화적 변화 중 하나는 見聞과 지식의 확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극도로 번성한 청나라의 수도인 北京에 건너 간 조선의 지식인들은 상이한 세계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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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Abstract)
조선 후기에 일어난 다양한 문화적 변화 중 하나는 見聞과 지식의 확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극도로 번성한 청나라의 수도인 北京에 건너 간 조선의 지식인들은 상이한 세계관, ...
조선 후기에 일어난 다양한 문화적 변화 중 하나는 見聞과 지식의 확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극도로 번성한 청나라의 수도인 北京에 건너 간 조선의 지식인들은 상이한 세계관, 종교, 기술, 정치 및 경제체제, 풍습, 지리, 생물, 생활방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문화적 호기심은 견문 및 지식의 확대로이어졌다. 조선 후기 회화의 특징 중 하나인 서양화법의 수용 또한 당시 서양화에 대한 문화적 호기심 속에서발생한 새로운 시각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서양화법에 대한 관심 및 수용과 관련하여 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서양의 광학 기구인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의 원리가 18세기 후반 조선에 알려졌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 초상화 양식의 변화에 끼친 카메라 옵스큐라의 영향에 대한 최근 연구는 서양의 광학 기구에대한 당시의 문화적 충격과 호기심의 양상을 알려주고 있어 주목된다. 丁若鏞(1762~1836년)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직접 만들어 기이한 광학 현상을 목도하게 되었는데 그의 .漆室觀畵說.은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그의 관심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칠실관화설.은 어두운 방인 漆室에 구멍을 뚫고 그 곳에 안경알 하나를 설치한 후 그 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이 만들어낸 벽에 거꾸로 투사된 신비로운 풍경에 대한 시각적 체험을 기술한 것이다. 李基讓(1744~1802년) 또한 카메라 옵스큐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기양은 정약용의 형인 丁若銓(1758~1816년)의 집에 漆室..眼이라고 불린 카메라 옵스큐라를 설치하고 어떤 화가로 하여금 자신의 초상화 초본을 그리게 하였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해 초상화 초본을 제작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어 흥미롭다. 중국에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가 알려진 것은 아무리 늦어도 1690년대라고 생각된다. 徐乾學(1631~1694년)의 .西洋鏡箱.은 상자형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글이다. 중국의 경우 기하학적 원리, 투시원근법,오목 . 볼록렌즈의 사용 원리, 광학적 지식, 카메라 옵스큐라의 수용 등이 확인되고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중국 그림 중에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해서 그린 작품은 단 한 점도 확인되고 있지 않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다름 아닌 당시 중국에서 정밀한 렌즈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근대 유럽에서도 고품질의 렌즈는 생산되지 못했다. 질이 나쁜 렌즈로는 정확한 빛의 투사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따라서 중국의 경우 비록 카메라 옵스큐라가 소개되었다고 해도 우수한 질의 렌즈가 없었기 때문에 카메라옵스큐라의 성능은 매우 낮았다. 서양의 예수회선교사 중 궁정화가로 활동한 어떤 화가들도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해 그림을 그린 정황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는다. 한편 일본의 경우도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는소개되었지만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우타가와 토요히로(歌川.廣, 1773~1828년)가 그린 한 삽화에는 암실형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가 잘 설명되어 있다. 이 판화에서살펴 볼 수 있듯이 에도시대에 카메라 옵스큐라의 작동 원리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서양의 광학 지식 및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소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해 제작된 에도시대 그림은 알려진 것이 없다. 서양의 일점투시도법을 활용한 판화인 ‘우키에(浮繪)’가 다수 제작된 것은 에도시대에 서양의 원근법이 적용된 판화와 그림들이 큰 인기를 얻었음을 알려준다. ‘아키타 란가(秋田蘭畵)’의 경우 서양의 명암법, 원근법, 유화 기법이 적극적으로 활용된 에도시대의 대표적인 ‘洋風畵’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키에와 아키타 란가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에도시대에 카메라 옵스큐라로 제작된그림은 현재까지 보고된 바가 없다. 결국 중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카메라 옵스큐라의 작동 원리는 소개되었지만 실제로 이 광학 기구가 그림 제작에는 활용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카메라 옵스큐라를 제대로 작동시키는데 필요한 정교한 렌즈가 부재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정약용이 비록 암실형 카메라 옵스큐라를 만들고 실험했지만 당시 조선에서 양질의 렌즈가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던 상황을 고려해 보면 과연 그가 어두운 방에서 본 형상이 얼마나 사실적이었는지 상당한 의문이든다. 姜世晃(1713~1791년)의 .眼鏡說.은 18세기 후반 조선의 광학 기술 수준을 정확히 알려주는 글로써주목된다. 강세황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서는 유리로 된 안경알조차 제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정교한 렌즈의 부재는 18세기 후반에 조선에서 카메라 옵스큐라가 그림 제작에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알려준다. 한편 1787년에 李命基(1756~1802년 이후)가 그린 <兪彦鎬肖像>이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해 제작된 작품일 가능성이 최근 제기되었다. 그런데 이 그림에 보이는 화문석 위에 나타난 그림자의 모습은<유언호초상>이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해 그린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증명해주는 시각적 증거이다. 그림자 표현은 자연 광선 하에서 형성된 그림자를 그린 것으로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할 경우 그림자가 벽이나 종이에 나타나지 않는다.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형성된 이미지는 모두 희미하고 불투명한 상태였으며 양질의 렌즈가 사용되지 않을 경우 불투명성은 현저히 증가한다. 결국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이해는 결코 과학적 또는 근대적 사실주의의 발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암실형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형성된 환상적인 이미지를 보고 정약용과 같은 인물들이 경탄한 것은 광학 기구를 통해 이루어진 신비롭고 기이한 시각체험과 관련된다. 즉 평생 처음 보는 서양의 기이한 물건인 ‘西洋異物’에 대한 그들의 경탄과 호기심은 대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이로운 시각체험이 곧 근대적 사실주의로 나아가는 첩경은 아니었다.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과장된 해석은 결국 ‘虛像’의 미술사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역사적 실상을 왜곡할 수도 있다. 역사적 실상은 오직 객관적인 사실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historical precursor to the modern camera, the camera obscura (from the Latin, 멶ark room? relies on the principle that light travels in straight lines. If a pinhole is placed in the door of a darkened chamber, the light from the outside will pas...
The historical precursor to the modern camera, the camera obscura (from the Latin, 멶ark room? relies on the principle that light travels in straight lines. If a pinhole is placed in the door of a darkened chamber, the light from the outside will pass through the hole and project an upside-down image of the scene outside onto the wall opposite the hole. The use of a lens in place of the small hole or pinhole made the camera obscura a better device. As an optical and scientific device for capturing and projecting visual images, the camera obscura gained popularity among artists and scientists. David Hockney has argued in his controversial book Secret Knowledge: Rediscovering the Lost Techniques of the Old Masters that the camera obscura and other visual devices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development of realism in European painting and many painters including Johannes Vermeer (1632~1675) used the camera obscura actively in the making of their works. Knowledge of the camera obscura and the device itself had been introduced in Qing China, Edo Japan, and Joseon Korea by the late eighteenth century and attracted much attention as a source of novelty and amusement. This paper explores how the camera obscura was introduced and used and how the public knowledge of the optical device laid the foundation for new visual culture in eighteenth-century East Asia. After the Manchu conquest of China in 1644, the Jesuits continued to serve the new rulers. They brought to the court scientific instruments that were used in calendar reforms, astronomical observations, and geographical explorations. The account of a 밯estern mirror box (Xiyang jingxiang)?by the high official and imperial advisor Xu Qianxue (1631~1694) is the most specific evidence proving that the camera obscura had been introduced to the Kangxi (r. 1662~1722) court before Xu's death in 1694. Despite the introduction of the camera obscura, none of the Qing court paintings that were made with the help of the instrument has been known. This means that the camera obscura was perhaps partially used as a visual aid in the creation of a painting. Although the public knowledge of the camera obscura was widely circulated, the practical use of the instrument was extremely limited. By the end of the eighteenth century, the Japanese were better acquainted with European culture and civilization than the people of any non-Western country. The rise of Dutch Learning (Rangaku), and by extension Western learning,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transformation of Japanese culture and society and in the change of 266Japanese attitudes towards foreign countries. Nagasaki served as entry port for artistic inspiration. Vanishing point perspective came to characterize prints and maps, and experiments with copper plates gained popularity. Shiba Kokan (1747~1818) was one of the pioneers of Western-style painting, who saw Western empiricism as an agent of modernization. The interesting characteristic of Kokan's art is that he developed a landscape theme for megane-e (optical paintings viewed through a special device). The camera obscura had been widely known to Japanese scholars and painters by the end of the eighteenth century. It was called an 밶uthenticity-copying lens.?Shiba Kokan described the box as 밶 contrivance to depict scenery so as to make it look to viewers as if they were actually walking through the place.?That Kokan had some great interest in the camera obscura in relation to his art is undeniable. But, there is no proof that Kokan either traced or copied his compositions directly from the projected image of the camera obscura. None of the Japanese paintings showing the use of the camera obscura has survived. Eighteenth-century Korea witnessed the great enthusiasm for practical learning (silhak) which influenced all branches of literature and the arts. Practical learning was inseparable from empirical scholarship that sanctioned new, precise methods by which to understand the past and conceptualize the present. Two of the textual records of the camera obscura have survived to date. The records are filled with the author's amazement at the optical principle of the camera obscura. Knowledge of the camera obscura was introduced to Korea by envoys to China during the eighteenth century. Some scholars attempted to construct dark rooms to experiment with the optical principle of the camera obscura. One notable example is found in Jeong Yagyong's (1762~1836) record of his and Yi Giyang's (1744~1802) experiments with the camera obscura. Sometime in the mid-1780s, Jeong set up a room-type camera obscura to see how the projected upside-down image forms in a dark room. Yi also constructed a room-type camera obscura at the home of Jeong's brother and asked a painter to draw a portrait of him by tracing an inverted image of him projected on the wall. This record is of great interest in that the camera obscura was actively employed in the making of a portrait. Nonetheless, it is still difficult to determine whether eighteenth-century Korean painters actually employed the camera obscura in the creation of landscapes and portraits. One of the reasons to argue against the painter's possible use of the camera obscura is that good mirrors and lenses were not available in eighteenth-century Korea. The effective function of a camera obscura depends on the combination of a concave mirror and a convex lens that produced a clear image. The late eighteenth-century scholar-official Gang Sehwang (1713~1791) wrote of the low quality of lenses for spectacles. He mentioned that good lenses are required for the making of telescopes and spectacles and that while the Chinese learned from Westerners how to make glasses and lenses, the Koreans did not know how to make them. According to Gang, none of the Koreans of his time knew the method of making glasses and lenses. Given that the effective function of a camera obscura relies heavily on the quality of a concave mirror and a convex lens, it is hard to imagine that the eighteenth-century Korean camera obscura was good enough to be used in the making of paintings. The wonders and marvels found in Jeong's records .. .. ... ... .... / ... show late eighteenth-century Koreans' amazement at and curiosities about the 뱒trange things from the West (Seoyang yim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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