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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句麗 南進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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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6398367

      • 저자
      • 발행사항

        용인 : 단국대학교 대학원, 2022

      •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 단국대학교 대학원 , 한국사전공 사학과 , 2022. 8

      • 발행연도

        2022

      • 작성언어

        한국어

      • DDC

        951 판사항(23)

      • 발행국(도시)

        경기도

      • 기타서명

        A study on the southward progress of Goguryeo

      • 형태사항

        ix, 264 p. : 삽화 ; 30 cm.

      • 일반주기명

        단국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지도교수 : 전덕재
        참고문헌 : p. 238-257

      • UCI식별코드

        I804:11017-000000198185

      • 소장기관
        • 단국대학교 퇴계기념도서관(중앙도서관) 소장기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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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본 논고는 고구려의 남진 양상과 그에 따른 대외 관계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특히 고구려의 남진과 백제·신라의 대응을 중심으로 고구려 南境의 변화를 고찰하고, 아울러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진출 지역과 지방 지배방식도 함께 고찰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Ⅱ장에서는 광개토왕대 남진과 백제의 대응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광개토왕은 국남 7성과 국동 6성을 축성하며 강력한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국남 7성은 재령로와 자비령로 상에 포진하고 있는 중・대형산성을 거점성으로 예성강 북쪽(以西) 지역에 대한 영역화 목적을 위해 축조한 것으로, 결국 남진을 위한 방어체계 구축 작업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동 6성은 예성강이나 임진강 상류 방향으로 연결되는 방원령로의 방어를 위해, 즉 백제의 침입을 막기 위한 의도에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릉비」에 전하는 58성에 대한 기록에서 정복순서, 지리적 위치 등 일정한 규칙성과 방향성이 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헌기록과 고고학 자료를 검토한 결과, 관미성은 강화도 교동도 화개산성, 고모루성은 연천 전곡리토성(대전리산성과 조합)으로 비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위치 비정을 근거로 광개토왕이 392년 이전에 남진하여 예성강에서 임진강 사이 지역을 획득하였고, 이어 396년에 아단성(아차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서울, 양주와 그 주변지역, 미추홀(인천 문학산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 강원 북부지역으로 이천, 평강을 중심으로 한 남한과 북한의 강원도 영서 지역, 고모루성(전곡리토성)을 중심으로 연천과 그 주변지역을 차지하였음을 추출할 수 있다. 이들 지역과 이외에 확인되지 않은 지역까지 포함한다면, 광개토왕대에 고구려는 대체로 한강 하류와 경기 남부지역, 강원도 영서지역과 북한강 수계 지역까지 진출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Ⅲ장에서는 장수왕대 한강유역 진출과 남진로 운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장수왕은 427년에 평양천도를 단행한 후 북위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475년에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후 장수왕을 따라 회군한 고구려군 이외의 나머지 군대는 계속해서 성남, 용인, 화성, 안성, 진천, 청원, 세종 등 백제 영토 깊숙한 지역까지 진격하고, 마침내 금강 이북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 지역에서 고구려 석실분 및 산성 등이 발견되는 것을 통해 입증할 수 있다. 한편 고구려는 5세기에 동해안으로 포항시 북구 흥해읍까지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백산맥을 넘어 경북 북부까지 남진하였다. 결국 고구려는 5세기 장수왕대에 백제 방면으로는 아산만에서 충남 일부, 충북 진천, 음성, 괴산, 충주, 제천, 단양지역까지, 신라 방면으로는 소백산맥 이남의 경북 영주, 봉화에서 영덕, 포항 흥해읍에 이르는 지역까지 진출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4~5세기 고구려가 남진할 때 활용한 남진로로서 대략 7개를 추출할 수 있다. 첫째가 海州路이고, 둘째는 漢城路(熊津路), 셋째는 漢江水路, 넷째는 漢城西部橫斷路, 다섯째는 漢城西南路, 여섯째는 新羅王京路, 일곱 번째는 東海岸路이다. 4~5세기에 고구려가 남진할 때 한성로를 가장 많이 활용하였고, 6세기 중반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퇴각할 때에도 역시 이 교통로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4세기 말 이후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할 때에 주로 신라왕경로를 활용하였다가 629년 신라가 고구려 낭비성(포천)을 함락한 이후에 고구려는 더 이상 이것을 활용할 수 없게 되었다.
      고구려는 한강 하류에 대중국 시발점인 한진, 능허대, 미추홀와 같은 중요 거점지역이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공격목표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 지역을 점령한 후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이 지역은 고구려의 남진로 상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고, 산 ․ 하천 ․ 해안선과 灣으로 가로막혀 남쪽으로 진출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이러한 불리한 여건으로 인하여 이 지역을 적극적으로 영역화하지 않고, 느슨하게 통제한 것으로 이해된다.
      몽촌토성에서부터 최남단 지역인 연기 나성리유적과 대전 월평동 산성까지 고구려 유적 간 이격거리는 대체로 6~8km 내외의 거리를 두고 위치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성남 판교동 고분, 용인 동천동 고분, 화성 청계리 고분에서 ‘부부합장묘’로 추정할 수 있는 고분이 확인되었다. 전투지역에 장수(지휘관)가 전쟁터에 투입될 때 가족을 동행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다. 그런데 장수(지휘관)가 가족을 동행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을 고구려가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 의거하여, 고구려는 안성천 이북지역의 경우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치밀한 계획 하에 교통로 상의 요충지를 거점으로 활용하고, 안정적인 지방 지배를 위한 지방관을 파견하였음을 도출할 수 있다. 반면에 진천 대모산성, 세종 남성골 산성, 대전 월평동 산성, 연기 나성리 유적 등 안성천 이남지역의 경우는 장기간에 걸쳐 안정적으로 지배하였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이 지역의 경우는 거점을 중심으로 군사적 활동을 주로 전개하였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결과적으로 고구려는 대체로 안성천에서 正東 방향에 위치하고 있는 國原城(충주)을 잇는 선을 경계로 ‘영역 지배’를 관철시켰다고 정리할 수 있다.
      Ⅳ장에서는 고구려 남진의 좌절과 南境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6세기에 들어 고구려는 왕위계승 과정에서 당시 귀족세력 간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였다. 신라는 이러한 틈을 타서 551년 이전에 신라가 죽령을 넘어 적성 지역을 공략하였고, 551년에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한강유역을 공격하였다. 이때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차지하였다. 신라는 진흥왕 14년(553)에 백제가 차지한 6군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이것과 한강 상류의 10군을 영역으로 하는 新州를 설치하였다.
      신라는 진흥왕 26년(565)에 北齊로부터 ‘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이라는 책봉호를 제수받았는데, 이를 통해 北齊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급격하게 성장한 신라를 고구려를 대신하여 동이 세계를 대표하는 나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중심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졌던 고구려로서는 한강유역을 회복하고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리려 하였다. 이에 온달이 590~594년 사이에 故土의 回復을 위해 출정하였다가 실패하였다. 7세기에 들어 신라와 고구려가 전투를 벌인 곳은 北漢山城(서울 아차산성), 七重城(파주시 적성면), 牛鳴山城(강원도 춘천) 등 임진강과 한강유역 사이의 지역이다. 고구려는 603년에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가 실패하였고, 608년에 고구려가 춘천지역에 위치한 우명산성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신라는 629년에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이후 춘천지역을 회복한 다음, 637년에 牛首州를 설치하였다. 고구려는 낭비성 상실 이후 포천 방면에서 한강유역에 이르는 진출로가 차단되기에 이르자, 파주시 적성면에 위치한 七重城을 집중 공격하였다. 고구려가 북한산성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칠중성을 거쳐야 하는 요충지이기 때문이지만,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남진 진출지점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교통로인 칠중성 방면으로 진출을 모색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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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고는 고구려의 남진 양상과 그에 따른 대외 관계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특히 고구려의 남진과 백제·신라의 대응을 중심으로 고구려 南境의 변화를 고찰하고, 아울러 이 과정에�...

      본 논고는 고구려의 남진 양상과 그에 따른 대외 관계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특히 고구려의 남진과 백제·신라의 대응을 중심으로 고구려 南境의 변화를 고찰하고, 아울러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진출 지역과 지방 지배방식도 함께 고찰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Ⅱ장에서는 광개토왕대 남진과 백제의 대응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광개토왕은 국남 7성과 국동 6성을 축성하며 강력한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국남 7성은 재령로와 자비령로 상에 포진하고 있는 중・대형산성을 거점성으로 예성강 북쪽(以西) 지역에 대한 영역화 목적을 위해 축조한 것으로, 결국 남진을 위한 방어체계 구축 작업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동 6성은 예성강이나 임진강 상류 방향으로 연결되는 방원령로의 방어를 위해, 즉 백제의 침입을 막기 위한 의도에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릉비」에 전하는 58성에 대한 기록에서 정복순서, 지리적 위치 등 일정한 규칙성과 방향성이 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헌기록과 고고학 자료를 검토한 결과, 관미성은 강화도 교동도 화개산성, 고모루성은 연천 전곡리토성(대전리산성과 조합)으로 비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위치 비정을 근거로 광개토왕이 392년 이전에 남진하여 예성강에서 임진강 사이 지역을 획득하였고, 이어 396년에 아단성(아차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서울, 양주와 그 주변지역, 미추홀(인천 문학산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 강원 북부지역으로 이천, 평강을 중심으로 한 남한과 북한의 강원도 영서 지역, 고모루성(전곡리토성)을 중심으로 연천과 그 주변지역을 차지하였음을 추출할 수 있다. 이들 지역과 이외에 확인되지 않은 지역까지 포함한다면, 광개토왕대에 고구려는 대체로 한강 하류와 경기 남부지역, 강원도 영서지역과 북한강 수계 지역까지 진출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Ⅲ장에서는 장수왕대 한강유역 진출과 남진로 운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장수왕은 427년에 평양천도를 단행한 후 북위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475년에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후 장수왕을 따라 회군한 고구려군 이외의 나머지 군대는 계속해서 성남, 용인, 화성, 안성, 진천, 청원, 세종 등 백제 영토 깊숙한 지역까지 진격하고, 마침내 금강 이북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 지역에서 고구려 석실분 및 산성 등이 발견되는 것을 통해 입증할 수 있다. 한편 고구려는 5세기에 동해안으로 포항시 북구 흥해읍까지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백산맥을 넘어 경북 북부까지 남진하였다. 결국 고구려는 5세기 장수왕대에 백제 방면으로는 아산만에서 충남 일부, 충북 진천, 음성, 괴산, 충주, 제천, 단양지역까지, 신라 방면으로는 소백산맥 이남의 경북 영주, 봉화에서 영덕, 포항 흥해읍에 이르는 지역까지 진출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4~5세기 고구려가 남진할 때 활용한 남진로로서 대략 7개를 추출할 수 있다. 첫째가 海州路이고, 둘째는 漢城路(熊津路), 셋째는 漢江水路, 넷째는 漢城西部橫斷路, 다섯째는 漢城西南路, 여섯째는 新羅王京路, 일곱 번째는 東海岸路이다. 4~5세기에 고구려가 남진할 때 한성로를 가장 많이 활용하였고, 6세기 중반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퇴각할 때에도 역시 이 교통로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4세기 말 이후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할 때에 주로 신라왕경로를 활용하였다가 629년 신라가 고구려 낭비성(포천)을 함락한 이후에 고구려는 더 이상 이것을 활용할 수 없게 되었다.
      고구려는 한강 하류에 대중국 시발점인 한진, 능허대, 미추홀와 같은 중요 거점지역이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공격목표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 지역을 점령한 후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이 지역은 고구려의 남진로 상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고, 산 ․ 하천 ․ 해안선과 灣으로 가로막혀 남쪽으로 진출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이러한 불리한 여건으로 인하여 이 지역을 적극적으로 영역화하지 않고, 느슨하게 통제한 것으로 이해된다.
      몽촌토성에서부터 최남단 지역인 연기 나성리유적과 대전 월평동 산성까지 고구려 유적 간 이격거리는 대체로 6~8km 내외의 거리를 두고 위치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성남 판교동 고분, 용인 동천동 고분, 화성 청계리 고분에서 ‘부부합장묘’로 추정할 수 있는 고분이 확인되었다. 전투지역에 장수(지휘관)가 전쟁터에 투입될 때 가족을 동행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다. 그런데 장수(지휘관)가 가족을 동행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을 고구려가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 의거하여, 고구려는 안성천 이북지역의 경우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치밀한 계획 하에 교통로 상의 요충지를 거점으로 활용하고, 안정적인 지방 지배를 위한 지방관을 파견하였음을 도출할 수 있다. 반면에 진천 대모산성, 세종 남성골 산성, 대전 월평동 산성, 연기 나성리 유적 등 안성천 이남지역의 경우는 장기간에 걸쳐 안정적으로 지배하였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이 지역의 경우는 거점을 중심으로 군사적 활동을 주로 전개하였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결과적으로 고구려는 대체로 안성천에서 正東 방향에 위치하고 있는 國原城(충주)을 잇는 선을 경계로 ‘영역 지배’를 관철시켰다고 정리할 수 있다.
      Ⅳ장에서는 고구려 남진의 좌절과 南境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6세기에 들어 고구려는 왕위계승 과정에서 당시 귀족세력 간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였다. 신라는 이러한 틈을 타서 551년 이전에 신라가 죽령을 넘어 적성 지역을 공략하였고, 551년에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한강유역을 공격하였다. 이때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차지하였다. 신라는 진흥왕 14년(553)에 백제가 차지한 6군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이것과 한강 상류의 10군을 영역으로 하는 新州를 설치하였다.
      신라는 진흥왕 26년(565)에 北齊로부터 ‘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이라는 책봉호를 제수받았는데, 이를 통해 北齊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급격하게 성장한 신라를 고구려를 대신하여 동이 세계를 대표하는 나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중심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졌던 고구려로서는 한강유역을 회복하고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리려 하였다. 이에 온달이 590~594년 사이에 故土의 回復을 위해 출정하였다가 실패하였다. 7세기에 들어 신라와 고구려가 전투를 벌인 곳은 北漢山城(서울 아차산성), 七重城(파주시 적성면), 牛鳴山城(강원도 춘천) 등 임진강과 한강유역 사이의 지역이다. 고구려는 603년에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가 실패하였고, 608년에 고구려가 춘천지역에 위치한 우명산성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신라는 629년에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이후 춘천지역을 회복한 다음, 637년에 牛首州를 설치하였다. 고구려는 낭비성 상실 이후 포천 방면에서 한강유역에 이르는 진출로가 차단되기에 이르자, 파주시 적성면에 위치한 七重城을 집중 공격하였다. 고구려가 북한산성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칠중성을 거쳐야 하는 요충지이기 때문이지만,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남진 진출지점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교통로인 칠중성 방면으로 진출을 모색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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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Ⅰ. 序論 1
      • 1. 연구 동향과 연구 목적 1
      • 2. 연구 방법과 구성 16
      • Ⅱ. 廣開土王代 南進과 百濟의 對應 22
      • 1. 국제정세의 변화와 高句麗의 南進 배경 22
      • Ⅰ. 序論 1
      • 1. 연구 동향과 연구 목적 1
      • 2. 연구 방법과 구성 16
      • Ⅱ. 廣開土王代 南進과 百濟의 對應 22
      • 1. 국제정세의 변화와 高句麗의 南進 배경 22
      • 1)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 22
      • 2) 고구려 남진의 배경과 의미 24
      • 2. 高句麗의 南進路와 방어체계 구축 30
      • 1) 고구려의 방어체계와 남진로 30
      • 2) 國南 7城, 國東 6城의 위치 41
      • 3. 廣開土王의 南進 범위 63
      • 1) 關彌城의 위치 비정 63
      • 2) 58城의 위치와 그 성격 69
      • Ⅲ. 長壽王代 漢江流域 進出과 南進路 運營 85
      • 1. 長壽王의 南進과 漢城陷落 85
      • 1) 한성함락과 고구려의 西南 경계 85
      • 2) 百濟의 한강유역 領有說 검토 101
      • 2. 高句麗의 南進路 운영과 漢江流域 지배방식 107
      • 1) 高句麗의 南進路 운영과 그 변천 107
      • 2) 高句麗의 한강유역 지배방식 125
      • Ⅳ. 高句麗 南進의 좌절과 南境의 변화 157
      • 1. 6세기 중반 高句麗의 漢江流域 喪失 157
      • 1) 동아시아 국제정세 변화와 고구려 내분 157
      • 2) 나제 연합군의 北上과 한강유역 상실 162
      • 2. 6세기 중반~7세기 高句麗 ․ 新羅의 境界와 그 변천 182
      • 1) 고구려의 한강유역 회복을 위한 노력 182
      • 2) 牛鳴山城의 위치와 고구려의 東南 境界 189
      • 3) 娘臂城 전투와 고구려의 西南 境界 194
      • Ⅴ. 結論 213
      • 부 록 227
      • 참고문헌 238
      • Abstract 258
      • 中文槪要 262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韓國驛制史, 趙炳魯,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 2002

      2. 朝鮮上古史Ⅰ, 申采浩, 동서문고, , 1977

      3. 譯註 三國史記, 이병도, 乙酉文化社, , 1977

      4. 고구려 남방진출사, 장창은, 경인문화사, , 2014

      5. 三國時代의 城郭硏究, 李元根, 檀國大 博士學位論文, , 1981

      6. 廣開土王碑文 新硏究, 權仁澣, 박문사, , 2016

      7. 歷史地理, 韓國史論1,, 方東仁, 國史編纂委員會., , 1978

      8. 국역 삼국사기(상)(하), 이병도, 을유문화사, , 2001

      9. 삼국시대 전쟁과 국경, 장창은, 온샘, , 2020

      10. 高句麗 後期 對外關係史 硏究, 金鎭漢,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 2010

      1. 韓國驛制史, 趙炳魯,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 2002

      2. 朝鮮上古史Ⅰ, 申采浩, 동서문고, , 1977

      3. 譯註 三國史記, 이병도, 乙酉文化社, , 1977

      4. 고구려 남방진출사, 장창은, 경인문화사, , 2014

      5. 三國時代의 城郭硏究, 李元根, 檀國大 博士學位論文, , 1981

      6. 廣開土王碑文 新硏究, 權仁澣, 박문사, , 2016

      7. 歷史地理, 韓國史論1,, 方東仁, 國史編纂委員會., , 1978

      8. 국역 삼국사기(상)(하), 이병도, 을유문화사, , 2001

      9. 삼국시대 전쟁과 국경, 장창은, 온샘, , 2020

      10. 高句麗 後期 對外關係史 硏究, 金鎭漢,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 2010

      11. 娘臂城과 娘子谷城考, 史學志 21, 金崙禹, 檀國大學校 史學會, , 1988

      12. 古代南堂考, 서울대학교 論文集1, 李丙燾, 서울대학교, , 1954

      13. 熊津 遷都와 熊津城, 百濟文化 30, 朴賢淑,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 소, , 2001

      14. 高句麗의 道西縣城考, 史學硏究36, 閔德植, 한국사학회, , 1983

      15. 廣開土王의 雄略, 韓國古代史硏究, 이병도, 박영사, , 1976

      16. 龍馬山 第2堡壘–發掘調査報告 書–, 이정은, 이선복, 양시은, 조가영, 김진경, 서울대학교박물관 ․ 서울特別市, , 2009

      17. 고구려의 민족사적 위상, 선사와 고대 28, 申瀅植, 한국고대학회, , 2008

      18. 阿旦城과 長漢城에 대한 考察, 鄕土서울 51, 金永上, 서울시사편찬위 원회,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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