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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經世․李埈의 穌齋觀-鄭經世의 비판적 흡수론과 李埈의 계승적 변호론을 중심으로- = Jeong Gyeong-se and Yi Jun’s Viewpoint on Sojae -Based on Critical Absorption Theory of Jeong Gyeong-se and Successional Defense Theory of Yi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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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조선의 통치 이념은 朱子學이었고, 그 주자학은 사상적 획일성 또는 純血性에 집착하는 과정에서 ‘權力’이 되었다. 이 배타적 권력의 이념적 통제의 감각 장치는 불교․도교 등 여타 敎學 체계는 물론 유학 내부로까지 깊숙하게 침투하여 작동하였다. 그 선봉에 그들에 의해 ‘동방의 주자’로 예칭되었던 이황이 嚴峻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노수신의 학문은 刻苦의 산물이었지만 그 내용은 질실했고, 그 쓰임은 輔君․經世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16세기 중엽 조선 학계의 宗主 李滉으로부터 배척을 받았고, 그 배척은 하나의 烙印이 되어 이황의 후학들에게 대물림되었다.
      이 글은 같은 퇴계연원이었지만 盧守愼에 대한 인식은 사뭇 달랐던 정경세와 이준의 시선을 ‘비판적 흡수론’과 ‘계승적 변호론’으로 분절하여 검토한 것이다. 이성형제로까지 일컬어졌던 두 사람은 노수신에 관한 사안에서만큼은 왜 더없이 긴장했던 것일까? 그것은 주자학 또는 퇴계학의 純血性을 강조했던 권위론과 작은 허물보다는 큰 성과에 착목해야 함을 역설했던 절충론의 충돌에서 기인했고, 17세기 초반 영남학계는 후자를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 절충론 내지 변호론의 좌절은 이황의 권위에 대한 숙임의 과정이었고, 그 종착점은 퇴계학의 권력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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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통치 이념은 朱子學이었고, 그 주자학은 사상적 획일성 또는 純血性에 집착하는 과정에서 ‘權力’이 되었다. 이 배타적 권력의 이념적 통제의 감각 장치는 불교․도교 등 여타 敎學...

      조선의 통치 이념은 朱子學이었고, 그 주자학은 사상적 획일성 또는 純血性에 집착하는 과정에서 ‘權力’이 되었다. 이 배타적 권력의 이념적 통제의 감각 장치는 불교․도교 등 여타 敎學 체계는 물론 유학 내부로까지 깊숙하게 침투하여 작동하였다. 그 선봉에 그들에 의해 ‘동방의 주자’로 예칭되었던 이황이 嚴峻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노수신의 학문은 刻苦의 산물이었지만 그 내용은 질실했고, 그 쓰임은 輔君․經世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16세기 중엽 조선 학계의 宗主 李滉으로부터 배척을 받았고, 그 배척은 하나의 烙印이 되어 이황의 후학들에게 대물림되었다.
      이 글은 같은 퇴계연원이었지만 盧守愼에 대한 인식은 사뭇 달랐던 정경세와 이준의 시선을 ‘비판적 흡수론’과 ‘계승적 변호론’으로 분절하여 검토한 것이다. 이성형제로까지 일컬어졌던 두 사람은 노수신에 관한 사안에서만큼은 왜 더없이 긴장했던 것일까? 그것은 주자학 또는 퇴계학의 純血性을 강조했던 권위론과 작은 허물보다는 큰 성과에 착목해야 함을 역설했던 절충론의 충돌에서 기인했고, 17세기 초반 영남학계는 후자를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 절충론 내지 변호론의 좌절은 이황의 권위에 대한 숙임의 과정이었고, 그 종착점은 퇴계학의 권력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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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governing ideology of Joseon was Neo-Confucianism, and it became "power" in the process of obsessing over ideological uniformity or pure blood. This sense of the ideological control of exclusive power penetrated deeply into other systems of education and scholarship, such as Buddhism and Taoism, as well as into the Neo-Confucianism. At the vanguard, Yi Hwang, who was given the title of honor as ‘Zhu Xi in the East’, stayed solemnly.
      No Su-sin’s studies were a product of a great deal of effort but the contents were simple and sincere, and the use of his studies were aimed at aiding the king and the statecraft. However, his studies were ostracized by Yi Hwang, the scholarly forefather of the late 16th century Joseon. and this exclusion was branded passed on to Yi Hwang’s younger scholars.
      The article is based on two different viewpoints of Jeong Gyeong-se and Yi Jun, both who have their origin in Toegye studies―critical absorption theory of Jeong Gyeong-se and successional defense theory of Yi Jun. Why were the two men, who were even referred to as brothers, so nervous about the issue of No Su-sin? It was due to the clash of authority that emphasized the purity of Neo-Confucianism or Toegye studies and the compromise which stressed the need for great achievement rather than small ruin and the Yeongnam School of the early 17th century never tolerated the latter. The breakdown of theory of compromise or defense was the process of submission to Yi Hwang’s authority, and its end point was the thriving of Toegye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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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governing ideology of Joseon was Neo-Confucianism, and it became "power" in the process of obsessing over ideological uniformity or pure blood. This sense of the ideological control of exclusive power penetrated deeply into other systems of educat...

      The governing ideology of Joseon was Neo-Confucianism, and it became "power" in the process of obsessing over ideological uniformity or pure blood. This sense of the ideological control of exclusive power penetrated deeply into other systems of education and scholarship, such as Buddhism and Taoism, as well as into the Neo-Confucianism. At the vanguard, Yi Hwang, who was given the title of honor as ‘Zhu Xi in the East’, stayed solemnly.
      No Su-sin’s studies were a product of a great deal of effort but the contents were simple and sincere, and the use of his studies were aimed at aiding the king and the statecraft. However, his studies were ostracized by Yi Hwang, the scholarly forefather of the late 16th century Joseon. and this exclusion was branded passed on to Yi Hwang’s younger scholars.
      The article is based on two different viewpoints of Jeong Gyeong-se and Yi Jun, both who have their origin in Toegye studies―critical absorption theory of Jeong Gyeong-se and successional defense theory of Yi Jun. Why were the two men, who were even referred to as brothers, so nervous about the issue of No Su-sin? It was due to the clash of authority that emphasized the purity of Neo-Confucianism or Toegye studies and the compromise which stressed the need for great achievement rather than small ruin and the Yeongnam School of the early 17th century never tolerated the latter. The breakdown of theory of compromise or defense was the process of submission to Yi Hwang’s authority, and its end point was the thriving of Toegye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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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廬江志"

      2 尹宣擧, "魯西遺稿"

      3 김학수, "조선시대의 사회와 사상" 조선사회연구회 1998

      4 김광순, "소재 노수신 연구-문학․정치․사상을 중심으로" 경북대 퇴계연구소 17 : 1989

      5 趙靖, "黔澗集"

      6 李宜顯, "陶谷集"

      7 김학수, "鄭逑(1543-1620)의 학자․관료적 삶과 安東”使 재임" 영남문화연구원 (17) : 75-111, 2010

      8 柳成龍, "西厓集"

      9 柳成龍, "西厓集"

      10 李埈, "蒼石集"

      1 "廬江志"

      2 尹宣擧, "魯西遺稿"

      3 김학수, "조선시대의 사회와 사상" 조선사회연구회 1998

      4 김광순, "소재 노수신 연구-문학․정치․사상을 중심으로" 경북대 퇴계연구소 17 : 1989

      5 趙靖, "黔澗集"

      6 李宜顯, "陶谷集"

      7 김학수, "鄭逑(1543-1620)의 학자․관료적 삶과 安東”使 재임" 영남문화연구원 (17) : 75-111, 2010

      8 柳成龍, "西厓集"

      9 柳成龍, "西厓集"

      10 李埈, "蒼石集"

      11 李埈, "蒼石續集"

      12 李埈, "蒼石別集"

      13 김학수, "竹牖 吳澐" 예문서원 2018

      14 鄭宗魯, "立齋集"

      15 盧守愼, "穌齋集"

      16 趙誠乙, "穌齋 盧守慎의 學問과 政治活動"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10 : 2000

      17 金覺, "石川集"

      18 金坽, "溪巖日錄"

      19 蔡濟恭, "樊巖集"

      20 鄭佺, "松塢集"

      21 尹根壽, "月汀漫筆"

      22 "月川門人錄"

      23 鄭經世, "愚伏別集"

      24 "愚伏先祖別集營刊時文蹟"

      25 朴承任, "嘯皐集"

      26 강정화, "后溪 金範의 學問性向과 士意識"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10 : 2000

      27 柳袗, "修巖集"

      28 沈喜壽, "一松集"

      29 김학수, "16~17세기 사림계의 ‘晦齋認識’, 인류의 평화공존과 번영-주자와 회재에게 길을 묻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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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9 0.79 0.74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72 0.66 1.364 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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