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유산의 한 분야인 공예 기술의 연구에 있어서, 전통과 현대의 가교역할을 한 근대,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가 이루어진 해방 이후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전통 시기의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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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대학원, 2023
학위논문(박사)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대학원 , 문화유산융합학과 무형유산학 전공 , 2023. 2
2023
한국어
충청남도
26 cm
지도교수: 정성미
I804:44031-20000066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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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유산의 한 분야인 공예 기술의 연구에 있어서, 전통과 현대의 가교역할을 한 근대,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가 이루어진 해방 이후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전통 시기의 공...
무형유산의 한 분야인 공예 기술의 연구에 있어서, 전통과 현대의 가교역할을 한 근대,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가 이루어진 해방 이후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전통 시기의 공예는 장인(匠人)이 오랜 시간에 걸쳐 터득한 경험과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는 수공업이었다. 그러나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근대화를 경험하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일상생활의 필수품인 종이를 만드는 제지(製紙)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대문화의 발달과 지폐 제조, 신문발간 등 각종 인쇄물의 증가에 따라 종이 수요는 급증하였고, 제지업은 유망한 공업(工業)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자주적으로 근대 제지공업을 도모하고자 했던 조선 정부의 노력은 조선 후기 박지원(朴趾源), 이규경(李圭景), 이유원(李裕元) 등이 제기했던 제지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바탕이 되었다.
조선 정부는 부국강병과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수신사(修信使)와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당시 일본에서 다양한 원료로 증기기관을 통해 종이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조선에 기계공업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에 1882년 470여 년 동안 관영 제지업을 담당했던 조지서(造紙署)가 폐지되었다.
장인의 손과 기술, 소도구에 의지하는 전근대적인 수공업에서 기계를 이용한 제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02년 전환국(典圜局) 조지소(造紙所)에서 지폐 용지를 만들게 되면서부터이다. 1904년 전환국 폐지 이후에는 인쇄국(印刷局)으로 제지사업이 인계되었고, 조지부(造紙部)를 설치하고 외국인 기사를 고빙(雇聘)하였다.
특히 1898년부터 전환국 분석기사로 근무한 후케다 신야(更田信彌)는 우리나라 근대 제지기술 교육과 정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가 남긴 강점 이전의 제지 실태조사 관련 자료는 제지기술의 변화과정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일제 강점 이후 조선총독부는 제지업을 유망한 공업의 하나로 인식하였고, 동시에 부업으로 제지업을 장려하기 위하여 개량 정책을 시행하였다. 총독부는 기술자를 파견하여 주요 제지 산지를 조사하였고, 조선의 제지업에서 시급한 개선사항을 파악하여 개량의 방향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공업장려 보조사업으로 기술원(또는 순회교사) 배치, 강습회(講習會) 등을 개최하였다. 이 중 제지강습회는 효율성과 경제성을 중시한 개량 기술의 보급과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1912년 설립된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中央試驗所)는 일제강점기 제지 정책의 수립과 시행에서 이론적․과학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4회에 걸친 제지시험 보고와 그 결과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강습회, 실지지도 등을 통해 중앙시험소는 제지기술의 보급과 확산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1930년대 후반에는 전시(戰時) 경제체제로 전환되면서 공정가격화, 제지원료의 통제, 가격 지정이 이루어졌고, 조선지(朝鮮紙)로 명칭과 규격이 통일되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제지 정책 결과, 다양한 원료의 사용, 화학약품의 응용, 도구의 개량과 기계의 도입 등 제지기술과 공정상 경제성과 효율성이 높아졌고, 제품검사를 통한 품질 개선 등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전통 제지기술의 특징인 도침(搗砧) 공정은 줄어들었고, 조선 고유의 특성과 개성이 사라지는 등 전통의 쇠퇴는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이 시기 제지 정책이 공급자 중심으로 진행된 측면이 있으나, 수요자(제지기술자 등)는 개량 기술에 대한 비판과 조선지의 복구를 위한 대책을 제시하면서 주체적으로 수용했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해방 이후에는 지질이 견고하고 풍미가 우수한 종이에 대해 ‘한지(韓紙)’라는 명칭이 사용되었고, 한지의 규격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또한 농촌진흥청(農村振興廳)에서는 농가의 소득 증대를 목적으로 1967년부터 농촌부업단지(農村副業團地)를 조성하여 한지 제조를 장려하였다. 1972년 상공부(商工部)에서는 경상도, 전북, 충북 지역의 한지를 수출 품목이자 지역특화산업으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1973년부터 한지를 생산하는 새마을공장이 건설되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정책은 1960년대 「문화재보호법」의 제정이다. 이를 통해 무형유산으로서 한지의 가치를 인정하고자 하는 인식이 대두되었다. 1961년 문화재보존위원회에서 무형문화재 보존 종목으로 제지기술을 선정하였고,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여 제지기술을 포함한 무형문화재의 보존과 관리를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후 1973년 문화재관리국의 ‘한지-지장(紙匠)’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95년에 이르러 경상북도에서 청송의 한지장을 도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10년 뒤인 2005년에 국가무형문화재 한지장이 지정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경기도, 전북, 경남, 충북 지역에서도 한지장 지정을 통해 전통한지 기술의 전승이 이어지고 있으며, 전통한지 산업과 기술의 전승 확대를 위한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한지 종목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많은 분야에서 노력하고 있는 지금, 전통한지 기술에 대한 체계적인 복원과 과학적인 분석, 기술의 전승을 도모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전통한지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공정에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근대와 해방 이후의 상황을 정리하여 지금의 한지가 있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는 작업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본 연구에서 한지에 대한 통시적 변화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기술과 공정에 많은 변화가 이루어진 근현대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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