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목적은 1922년 1월말 2월 초에 전개된 김윤식사회장 찬반운동의 성격을 해명하는 데에 있다. 김윤식사회장위원회를 주도한 세력은 둘이었다. 하나는 민족주의 기호파이고, 다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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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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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1922년 1월말 2월 초에 전개된 김윤식사회장 찬반운동의 성격을 해명하는 데에 있다. 김윤식사회장위원회를 주도한 세력은 둘이었다. 하나는 민족주의 기호파이고, 다른 하나...
이 글의 목적은 1922년 1월말 2월 초에 전개된 김윤식사회장 찬반운동의 성격을 해명하는 데에 있다. 김윤식사회장위원회를 주도한 세력은 둘이었다. 하나는 민족주의 기호파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상해파 세력이었다. 사회장위원회는 양대 세력의 한시적인 연합기관이었다.
사회장반대운동을 이끈 세력은 상해파를 제외한 신흥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상해파의 통일전선 정책에 반대하는 4개 사회주의 단체가 그에 참여했다. 조선공산당(중립당), 사회혁명당(서울파), 재일본조선인공산주의단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국내부가 그것이다.
따라서 사회장반대운동의 성격은 이중적으로 이해함이 옳다. 첫째, 그것은 신흥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을 적대시한 계급투쟁이었다. 신흥 사회주의자들은 식민지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이 반일운동의 동맹자가 될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둘째, 이 사건은 사회주의자들의 내부투쟁이었다. 상해파 공산당의 민족통일전선 정책에 반대하는 신흥 사회주의자들의 반상해파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고비로 하여 상해파 공산당이 쥐고 있던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헤게모니는 점차 약화되어 갔다. 그것은 신흥 사회주의자들에게로 점차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