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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차 유대전쟁(A.D. 66-70)의 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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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1277550

      • 저자
      • 발행사항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 2008

      •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석사) -- 고려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서양사전공 , 2008.2

      • 발행연도

        2008

      • 작성언어

        한국어

      • 발행국(도시)

        서울

      • 형태사항

        50 p. : 삽도 ; 26 cm.

      •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김경현
        단면인쇄임
        참고문헌 : p. 46-50

      • 소장기관
        •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기관정보
        • 고려대학교 세종학술정보원 소장기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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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주후 1세기에 발생한 제 1차 유대전쟁은 유대사회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유대인들은 본래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갖고 있었고, 유대사회는 유일신 야훼의 대리인으로 인식된 대제사장이 관할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정신적 기준은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의 율법이었다. 기원전 10세기에 뿌리내린 이런 유대사회의 특성은 바벨론,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도 변치 않았다. 오히려 알렉산더와 헬레니즘 왕국들 치하에서도 시대의 주류 사상이었던 헬레니즘에 동화되지 않고 유대사회의 전통을 이어 왔다. 이런 유대사회의 종교적 특성은 기원전 168년 셀레우커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와의 갈등을 겪으면서 마카비 전쟁이라는 형태로 분출 되었다. 또한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유대사회가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면서도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이 후 로마와 지속적인 갈등을 겪은 유대사회는 마침내 주후 66년에 제 1차 유대전쟁이라는 형태로 분출되었고, 70년에 티투스 장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되었다. 유대전쟁은 주후 70년 이후 오늘날까지 유대교의 형태에 변화를 준 전환점이었다. 더 이상 유대사회에는 그들의 신앙 구심점이었던 성전과 대제사장이 존재하지 않는 대신, 랍비로 알려진 ‘현자(賢者, Sages)’들이 유대인들을 지도했다. 대신 율법이 유대사회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기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함락은 유대인들을 공동체를 확장시킴과 동시에 크리스트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확산되면서 크리스트교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은 계기이기도 했다.
      제 1차 유대전쟁이 유대사회와 기독교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 온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원인에 대한 연구는 국내에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며, 이를 조명하는 사료 역시 한계가 있다. 동시대의 역사가인 타키투스(Tacitus)나 필로(Philo),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작품들은 유대전쟁에 대해 파편적인 정보를 줄 뿐이며, 신약성서는 관점과 정보에 있어 유대전쟁의 성격을 규명하기에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유대전쟁을 직접 참전하고 목격한 이후 방대한 작품들을 기록해 놓았다. 요세푸스의 작품들은 주후 1세기의 유대사회의 갈등과 구조, 그리고 제 1차 유대전쟁의 전모를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사료다. 이런 이유로 요세푸스의 작품들이 유대사회를 조망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자료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의 작품들은 초대교회와 교부들에게 널리 활용되었다. 신약성서가 396년 카르타고 종교회의를 통해서 정경으로 인정되었고, 그 때까지 서신(Epistle)의 형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요세푸스의 작품들은 기독교 세계에서도 유일무이한 사료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예수 시대의 배경과 정보를 주는 사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세푸스 작품들의 신빙성 문제가 역사가들에 의해 제기 되면서 요세푸스 기록의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요세푸스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았고, 특정한 목적을 위임받고 있었으므로 심지의 그의 작품을 객관적 사료로 보지 않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작품에 대해 진위 여부를 가리기 보다는 그가 처한 상황을 고려한 후 작품을 분석한다면 그 속에서 객관적이고 가치 있는 정보를 복원해 낼 수 있다는 것이 본 연구의 취지이자 목적이다.
      제 1차 유대전쟁은 한 두 가지 요인으로 규정할 수 있는 전쟁은 아니다. 오랜 시간동안 다양한 모티브가 가미되어 발생한 전쟁이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유대사회의 변혁을 가져온 제 1차 유대전쟁의 다양한 원인들을 분석하기 위해 요세푸스의 작품을 토대로 할 것이다. 그가 위임 받았던 정치적 기록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그 사안을 넘어선 그의 진의(眞意)가 무엇인지도 연구해 볼 것이다. 혹은 그가 처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동지(同志)들에게는 유대전쟁에 대한 일종의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고, 정적들에게는 책임을 전가시키는 부분들은 없는지에 대해서도 규명해 나갈 것이다. 아울러 그가 간과했거나 함구해야 했던 유대전쟁의 측면은 무엇인지도 연구할 것이다. 이를 위해 타키투스의 『역사』(Histories)와 『연대기』(Annales) 두 작품과 수에토니우스의 작품도 참고할 것이다. 또한 요세푸스와 동시대 인물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의 작품 『로마 황제 가이우스에의 사절』(The Embassy to Gaius)도 병행하여 비교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료다. 본 논문은 1장에서 요세푸스의 생애와 작품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2장에서는 요세푸스가 주목하고 있는 제 1차 유대전쟁의 원인에 대해 그가 표면적으로 기록해야 했던 것과 그가 내면적으로 의도하고 있던 사안들에 대해 두 부류로 고찰해 볼 것이다. 끝으로 3장에서는 요세푸스의 작품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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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후 1세기에 발생한 제 1차 유대전쟁은 유대사회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유대인들은 본래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갖고 있었고, 유대사회는 유일신 야훼의 ...

      주후 1세기에 발생한 제 1차 유대전쟁은 유대사회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유대인들은 본래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갖고 있었고, 유대사회는 유일신 야훼의 대리인으로 인식된 대제사장이 관할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정신적 기준은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의 율법이었다. 기원전 10세기에 뿌리내린 이런 유대사회의 특성은 바벨론,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도 변치 않았다. 오히려 알렉산더와 헬레니즘 왕국들 치하에서도 시대의 주류 사상이었던 헬레니즘에 동화되지 않고 유대사회의 전통을 이어 왔다. 이런 유대사회의 종교적 특성은 기원전 168년 셀레우커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와의 갈등을 겪으면서 마카비 전쟁이라는 형태로 분출 되었다. 또한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유대사회가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면서도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이 후 로마와 지속적인 갈등을 겪은 유대사회는 마침내 주후 66년에 제 1차 유대전쟁이라는 형태로 분출되었고, 70년에 티투스 장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되었다. 유대전쟁은 주후 70년 이후 오늘날까지 유대교의 형태에 변화를 준 전환점이었다. 더 이상 유대사회에는 그들의 신앙 구심점이었던 성전과 대제사장이 존재하지 않는 대신, 랍비로 알려진 ‘현자(賢者, Sages)’들이 유대인들을 지도했다. 대신 율법이 유대사회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기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함락은 유대인들을 공동체를 확장시킴과 동시에 크리스트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확산되면서 크리스트교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은 계기이기도 했다.
      제 1차 유대전쟁이 유대사회와 기독교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 온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원인에 대한 연구는 국내에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며, 이를 조명하는 사료 역시 한계가 있다. 동시대의 역사가인 타키투스(Tacitus)나 필로(Philo),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작품들은 유대전쟁에 대해 파편적인 정보를 줄 뿐이며, 신약성서는 관점과 정보에 있어 유대전쟁의 성격을 규명하기에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유대전쟁을 직접 참전하고 목격한 이후 방대한 작품들을 기록해 놓았다. 요세푸스의 작품들은 주후 1세기의 유대사회의 갈등과 구조, 그리고 제 1차 유대전쟁의 전모를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사료다. 이런 이유로 요세푸스의 작품들이 유대사회를 조망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자료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의 작품들은 초대교회와 교부들에게 널리 활용되었다. 신약성서가 396년 카르타고 종교회의를 통해서 정경으로 인정되었고, 그 때까지 서신(Epistle)의 형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요세푸스의 작품들은 기독교 세계에서도 유일무이한 사료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예수 시대의 배경과 정보를 주는 사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세푸스 작품들의 신빙성 문제가 역사가들에 의해 제기 되면서 요세푸스 기록의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요세푸스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았고, 특정한 목적을 위임받고 있었으므로 심지의 그의 작품을 객관적 사료로 보지 않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작품에 대해 진위 여부를 가리기 보다는 그가 처한 상황을 고려한 후 작품을 분석한다면 그 속에서 객관적이고 가치 있는 정보를 복원해 낼 수 있다는 것이 본 연구의 취지이자 목적이다.
      제 1차 유대전쟁은 한 두 가지 요인으로 규정할 수 있는 전쟁은 아니다. 오랜 시간동안 다양한 모티브가 가미되어 발생한 전쟁이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유대사회의 변혁을 가져온 제 1차 유대전쟁의 다양한 원인들을 분석하기 위해 요세푸스의 작품을 토대로 할 것이다. 그가 위임 받았던 정치적 기록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그 사안을 넘어선 그의 진의(眞意)가 무엇인지도 연구해 볼 것이다. 혹은 그가 처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동지(同志)들에게는 유대전쟁에 대한 일종의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고, 정적들에게는 책임을 전가시키는 부분들은 없는지에 대해서도 규명해 나갈 것이다. 아울러 그가 간과했거나 함구해야 했던 유대전쟁의 측면은 무엇인지도 연구할 것이다. 이를 위해 타키투스의 『역사』(Histories)와 『연대기』(Annales) 두 작품과 수에토니우스의 작품도 참고할 것이다. 또한 요세푸스와 동시대 인물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의 작품 『로마 황제 가이우스에의 사절』(The Embassy to Gaius)도 병행하여 비교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료다. 본 논문은 1장에서 요세푸스의 생애와 작품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2장에서는 요세푸스가 주목하고 있는 제 1차 유대전쟁의 원인에 대해 그가 표면적으로 기록해야 했던 것과 그가 내면적으로 의도하고 있던 사안들에 대해 두 부류로 고찰해 볼 것이다. 끝으로 3장에서는 요세푸스의 작품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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